브누아 페터스의 「데리다, 해체의 철학자」

Benoit Peeters, Derrida: A Biography

철학한다는 것, 그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1038p

나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평전을 읽고 남긴 글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거부한 아들’이라는 주제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여기서 아들은 푸코 자신이다. 푸코의 오이디푸스적 개명은 혈연과 성장배경, 구시대의 전통을 떠나 자신만의 이름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겠다던 당당한 지식인의 모습과 겹친다. 흥미롭게도, 같은 시대를 거쳐 간 (그리고 서로 만만치 않은 인연을 나눈)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평전에서도 이름을 스스로 바꾼 아들이 등장한다. 정확하게는 이름이 아닌 성(姓)을 바꾼 것이다. 여기서 아들은 데리다의 장남 피에르다. 피에르 데리다는 외할머니의 이름을 따 피에르 알페리(Pierre Alféri)라는 이름으로 첫 저서를 출판했다. 심지어 단순한 가명이나 필명이 아닌 제도적 개명이었다. 철학에서 출발하여 문학으로, 어쨌든 아버지의 유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도상에 발을 걸친 피에르에게 ‘데리다’라는 성은 그만큼 큰 산이었다(797p).

저자 브누아 페터스(Benoit Peeters)는 서론의 말미에서 일찌감치 자신의 목표를 천명했다. “과연 평전 작가는 자신의 ‘주인공’ 앞에서 자신이 쓴 평전을 들고 감히 버텨낼 수 있을까?”(17p) 이보다 수준 높은 성과지표를 본 적이 없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관한 비평문 10페이지를 써서 미켈란젤로에게 보여주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이는 뱅크시가 어디선가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뱅크시에 관하여 써서 미술잡지에 투고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저자의 작업은 더없이 훌륭했지만 그래도 버텨내기 힘들 것이다. 한 인간을 총체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하물며 그 한 인간이 위대한 철학자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마지막 인물이라면? 지금 어두컴컴한 서재에서 열심히 철학을 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위대한 철학자의 시대가 다시 올 것 같지 않다. 인류가 사상적으로 퇴화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오늘날 병적으로 집착하는 다원주의에의 강박이 위대한 단일 인격체의 부상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으리라는 막연한 우려에서 하는 말이다.


데리다는 경계인이다. 프랑스령 알제리의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프랑스에도, 알제리에도, 유대인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했다. 어딘가에도 완벽한 소속감을 느껴본 적이 없는 천재가 본 세상에는 공고한 척하는 허술한 무대만이 만연했다. 유대교 의식들은 돈벌이에만 급급했다(46p). 고등사범학교 준비반에서는 “규정을 받아들이고 ‘창안’하지 말 것”을 종용받았다(98p). 정형화된 프랑스 대학 체계의 규범은 누군가의 사상에서 조금이라도 모난 구석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153p). 정의를 기치로 내걸었던 공산당은 당의 안위를 위하여 행동 통일의 강령만을 부추겼다(173p). 이 모든 과정을 경험한 경계인 데리다에게 공동체 혐오는 뿌리 깊은 것이었다; “공동체라는 이 말 자체부터 나는 구역질 난다.”(574p) 낭테르 대학에서 교수 임용에 낙방하고 나서부터는 공동체 혐오가 기관 혹은 제도 혐오로 굳어졌다. 내 편이 아닌 사람은 적이라는 식의 지적 편협성을 드러내기도 했지만(645p), 기관이 사유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는 신념을 꺾을 수는 없었다(737p). 그 결과 우리는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의 교수로서 푸코를 기억하는 것과 달리, 단독자 데리다를 회상한다.

데리다가 선택할 궤적은 자명했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사유하고, 결국 해체하여 도래할 타자를 위한 빈틈을 만드는 것. 그것이 데리다가 선택한 해체의 전략이며, 생을 관통할 그 과업은 교수자격시험을 치르기도 전인 이십대 중반에 이미 다음과 같이 천명되었다; “나는 이 세계를 부수고 다시 만드는 것에만 소질이 있네.”(150p) 다른 말로 “우리가 이해했다고 생각한 것을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작업”(299p)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작업에 성역은 없기에, 해체의 칼날은 필연적으로 그 주창자를 겨누기도 했다. 데리다는 어쩔 수 없이 “수컷, 백인, 유혹자, 철학자”였고, 여러 면에서 “자기 자신의 투쟁의 희생자가 되었다.”(945p)

해체가 허무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새롭게 도래하는 무언가가 두렵거나, 누군가의 두려움을 조장하고 싶은 사람들이었다(778p). 해체는 그들 스승의 권위와 그들의 밥줄을 동시에 위협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대학의 담론 시장에서 출시되었던 것 중 가장 수익성이 좋은 상품”이 된 해체는 그동안 소외된 자들, 특히 여성들을 효과적으로 불러모았고, 그러한 상황은 주류 학자들이 해체를 적으로 간주하기에 더없이 좋은 여건을 제공했다.

하지만 해체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이 “결코 파괴하지 않고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 해체하는 것(1012p)”임을 안다. 해체는 혹자가 생각하듯 대안 없는 비난이 아니다. 스스로 맞지 않는 옷이라고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개혁을 위한 위원회의 수장을 맡았던 일이나 얀후스재단을 설립해 체코 지식인들을 도왔던 데리다의 행적을 보면 알 수 있듯, 해체는 단지 서고에 머무르지 않는다. 데리다는 죽어가는 병상에서도 투우에 반대하는 사회단체의 명예회장직을 수락하기 위하여 편지를 썼다(1015p).

데리다가 허무주의자로 오해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종종 침묵했기 때문이다. 충분한 명성을 얻은 말년에는 더 자주, 더 선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지만, 초기에는 신중할 때가 더 많았다. 그는 모든 것을 빠르게 파악하고 알 수 있었지만, 더 정확하게 알고 싶어 했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말할 수는 없었다. 어떠한 저자나 저술이 하나의 의미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 대다수에게 데리다는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438p). 오직 집중적인 연구를 마쳤을 때만 침묵을 깰 수 있었다(439p).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원칙도 잘 알고 있었다(304p). 이러한 학문적 조심스러움은 정치적 참여에서도 나타났다(442p). 데리다는 세상을 흑백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 무수한 중간과 변두리가 존재한다는 것, 복잡함이 진리에 가깝다는 것을 가장 앞장서서 표명한 사상가였다.

나는 신중하라는 조언을 듣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진실의 충동이라 부릅니다. 진실은 말해져야 합니다.

788p

“복잡성을 포기하는 것은 그에게는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굴복하기를 요구하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혐오스러운 행동”이었다.”(984p) 그것이 9.11테러처럼 명명백백하게 폭력적이고 잘못된 행동일지라도 데리다는 사안을 복잡하게 만드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데리다는 복수의 광풍 속에서도 국제관계의 복잡한 사슬과 암투, 미국의 패권적 야심, 그리고 유럽의 비열한 방조를 드러내 보이기 원했다. 권력자는 이원성을 추구하고, 그것을 무기 삼아 누군가를 적으로 만들어 자리를 보존한다. 데리다가 그 권력에 대응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에게 요청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이원성의 어느 한 극단에서 농락되지 않고 그것을 오히려 해체하는 것이다(991p). 오해를 사더라도 사안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990p). 그리고 남의 정책에 대하여 왈가왈부하기 전에 우선 내가 속한 집단의 정책을 먼저 들여다보고 비판하는 것이다.


기관의 해체가 전제되지 않는 한 이론의 해체는 무가치하다. “만일 철학 기관에 대해 공격하지 않으면 일종의 이론적인 한 시도만이 남을 것이다.”(541p) 이 사회에 철학의 설 자리가 줄어들면 그만큼 권력에 대한 비판도 줄어들 것이다(543p). 데리다가 교육개혁에 투신했던 일은 그에게 두고두고 큰 실망으로 남았고, 미디어에 대한 고질적인 불신까지 겹쳐 효과도 미미했다(604p). 하물며 데리다도 철학이 추방되는 교육제도의 현실에 대해 개탄하고 개입했는데, 우리의 미래 세대는 오늘날 전지구적으로 시급한 주제들에 관하여 깊게 사유할 기회를 충분히 누리고 있나? 오늘날 우리 지식인들은 그 기회를 열어주기 위하여 무슨 노력을 하고 있나? 아이들을 철학자로 키우자는 말이 아니다. 지금 인류 공동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하여 사유하고 논쟁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끝으로, 형식적 차원에서 이 책에 대하여 더 논의하자면, 우선 방대한 자료와 인터뷰에 힘입어 사상가에 관한 ‘사적인 평전’의 끝판왕 지위에 오를만한 작품이다. 이 책이 발간된 시점에 데리다의 가족과 동료 상당수가 아직 생존해 있다는 점이 이러한 독보적인 장점을 만들어 줬겠지만, 어디까지나 공로는 저자가 가져가야 한다. 그리고 그 이점은 몇몇 진실들을 뭉뚱그려 놓게 만드는 단점이 되기도 하였다. 어쨌든 저자가 진정 이 평전을 들고 그 주인공 앞에 당당히 설 수는 없을지언정, 그의 책상 위에 슬며시 올려놓을 수는 있으리라.

우리에게는 한 위대한 사상가의 사생활을 낱낱이 파헤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저자도 공적인 영역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간 데리다의 사생활을 철저히 조사했던 듯싶다. 하지만 노출된 장면이 그렇게까지 촘촘하지는 않다. 앞서 언급하였듯, 주인공의 명예, 살아 있는 가족 및 친지들의 평판, 이해관계자들의 이권 등을 고려하여 수위를 조절했을 것이다. 대신에 독자들에게 뜻밖의 선물 하나를 툭 안기듯, 데리다의 시시콜콜한 면모들에 관한 별도의 장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 3부 4장에 해당하는 <예순살 철학자의 초상>이 그것인데, 이 책이 너무 두꺼워서 읽을 엄두조차 들지 않는다면 이 장만이라도 읽기를 권한다. 대략 몇 가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데리다는 한때 문학과 철학의 기로에서 갈등한 바 있고, 스스로 예술가로서 철학을 한다고 생각했다(801p). 그의 미려한 문체는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미술을 좋아했고, 다시 태어나면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말도 했다. 미술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으나, 공식적으로 남긴 글은 많지 않다. 고흐의 신발에 대하여 남긴 글과 그 전후에 나타난 철학자 및 미술사학자와의 논쟁이 유명하다. 전시를 기획하고 문학에 가까운 글을 썼다.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였으나, 정작 데리다 자신은 그 거론에 비통함을 느꼈다. 죽음이 임박했기에 상을 주려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과부하의 삶을 살았다(816p). 미국과 프랑스를 수시로 오갔고, 세계 곳곳에서 답지하는 각종 강연, 세미나, 시상식 참석 요청에 버거워했으나 생각보다 호의적으로 응했다. 그는 슈퍼스타 기질이 있었고, 그 기질을 동력 삼아 힘을 얻었다. 그의 연구 및 저술의 상당 부분은 자발적인 탐구라기보다 청탁에서 출발하여 대규모 작업으로 발전한 경우가 더 많았다. 철학사에서 청탁을 연구의 동력으로 전환하는 능력이 가장 뛰어났던 인물이다(843p).

점차 치솟는 명성이 그를 방랑자로 만들었고, 그 방랑기질이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실상 대부분의 여행은 출장이었고, 명사들의 환대와 더불어 특급호텔과 일등석으로 구성된 출장 자체를 즐길 줄도 알았다(845p). 해체가 여성주의와 결합하여 폭발적으로 파급된 것과 무관하지 않게, 그의 주변에는 늘 여성들이 넘쳤다. 그 여성들은 유혹자로서 그의 매력 중 하나로 하나같이 경청을 꼽았다. 그렇게 성공한, 그렇게 지적인, 그렇게 강한 자기도취의 남자가 그렇게나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점은 강렬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콜로키움에서 서너 시간씩 쉬지 않고 철학을 이야기하는 남자와 호텔 레스토랑에서 서너 시간씩 눈을 마주치고 경청하는 남자가 동일인물이다. 이보다 강렬한 유혹은 별로 없다.

명성을 얻은 말년에 데리다는 늘 조급했고, 사실상 모든 일에 책임감을 느꼈다(819p). 췌장암 투병 중에도 자신을 추대하는 자리에는 빠지지 않았으며, 공개석상에서 아무도 그가 아픈 줄 모를 정도였다. 그에게는 자신의 모든 흔적이 역사가 될 것이라는 막연한 예상이 있었다. 그 막연함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확신으로 굳어졌다. 그가 두 아카이브에 각각 보관한 자료는 철학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시시콜콜하다. 그는 자기 문 앞에 지인이 붙여 놓은 메모 하나조차 보존했다. 이러한 기억, 흔적, 역사에 관한 강박은 자기도취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기록에 대한 열망은 “완벽한 연대기에 대한 욕망이다.”(570p) 그에게는 불필요한 자료도, 경험도, 기억도 없다. 아주 불쾌했던 것일지라도, 모든 경험은 나름의 가치가 있다. 경험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은 없다(829p).

모든 흔적은 본질적으로 유언적입니다.

993p

더 사적인 영역에서, 그는 온갖 종류의 TV 프로그램 보는 것을 즐겼는데, 한편으로는 TV를 보느라 연구에 소홀해질까 봐 죄책감까지 느꼈다(832p). 이 지점은 어쩌면 우리가 데리다와 닮은 유일한 대목일지 모른다.

파리에 처음 도착했던 알제리 촌뜨기는 패션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멋 부리기를 즐기는 댄디가 되었다. 브랜드 중에서는 겐조를 좋아했다(836p). 하지만 자동차는 실용주의를 추구했다. 정비소가 가장 가까운 시트로앵을 탔다.

글을 쓸 때는 몸의 자세가 글에 반영된다는 것을 인식했다. 엎드려서 쓴 글과 앉아서 쓴 글은 다른 법이다. 운전하면서 편지를 쓰다가 뒷 차가 빵빵거려서 분노한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럼에도 사고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데리다는 철학의 욕망과 야망이 정치인의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는 것을 알았다(858p). 그런 점에서 데리다는 욕망덩어리 그 자체다. 우리는 위대한 욕망덩어리가 남긴 잔해물들을 보고 있다. 어떻게 수습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바로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도래할 타자이기 때문이다.


진짜 끝으로, 이토록 방대한 책에 인명 및 작품 색인이 없다는 점은 치명적인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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