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mond John Morris, Postures: Body Language in Art
거짓말은 쉬운 편이다. 하지만 몸짓을 가장하기란 여간 어렵지가 않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므로 악의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단순히 본심을 숨기고자 할 때 몸짓이나 표정을 통제하기 위해 애쓴다. 그럴수록 몸은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뻣뻣해지거나 아예 간과했던 부위에서 본심을 드러내곤 한다.
동물학자이자 초현실주의 화가인 데즈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는 선사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각 예술의 유구한 역사에 걸쳐 인간의 포즈가 어떠한 진실을 말해 왔는지, 그리고 그 의미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설명의 눈높이는 철저히 대중에 맞춘다. 작품 속 포즈는 환영, 축복, 위협, 에로틱 등 아홉 개의 유형으로 분류되었고, 각 유형 아래에 세부적인 자세, 표정, 몸짓을 다시 구체화했다. 서술 형식은 간단하다. 포즈를 묘사하고, 그 생물학적/문화적 기원을 살펴본다. 이어서 총천연색 도판과 함께 구체적으로 작품 속에서 특정 포즈가 드러난 사례들을 살펴보며 의미와 용례를 짚어준다.
악수나 눈물과 같이 인간사의 희노애락에서 너무나 빈번하고 보편적인 포즈에서부터 튀어나온 발, 웅크리기, 위협하는 얼굴, 다리꼬기 등과 같이 도저히 학술적인 의미가 없어 뵈는 하찮은 몸짓까지도 다루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아무런 기원도, 의미도, 목적도 없는 몸짓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그냥’이라는 단어는 커뮤니케이션의 세계에서 추방해야 한다. 그냥이란 없다. ‘그냥’, ‘아무거나’,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같은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은 최대한 멀리하는 편이 낫다. 포즈를 이해하기 위하여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더욱 풍성하고 정확한 진실에 다가서는 과정이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저자가 알려주는 자세의 기원과 의미 변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다른 시공간에 속한 인간을 해하는 단초를 얻을 수 있다. 그 단초는 ‘지금, 여기’를 이해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히틀러의 나치식 경례는 고대 그리스-로마에 대한 동경에서 출발했다. 히틀러는 오른팔을 곧게 치켜든 경례 자세가 로마 제국의 곧은 절개를 더없이 잘 보여주는 자세라고 여겨 차용했다. 하지만 고대의 작품들과 사료들을 꼼꼼히 살펴본 결과에 따르면, 로마 제국이 실제로 그렇게 경례했다는 근거는 없다. 나치식 경례는 18세기 고전주의 화가들이 고대를 상상하며 그린 작품들에서 따온 허구적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고대에 대한 근거 없는 동경이 오늘날 서구 사회의 사상적 토대를 이루는 사례가 많다. 지금 미국을 상징하는 독수리는 한때 로마 제국이 인접 국가를 징벌하러 갈 때 쓰던 깃발 문양에서 따왔다. 편견을 지우고 동작 자체만 보면 나치식 경례는 무기가 없다는 것, 즉 적의가 없다는 것을 상대에게 보이면서도 축복하는 자세와 비슷하다는 점이 경례 자세로서 적합하다. 하지만 악마가 그것을 선점했으므로 오늘날 우리는 그 자세를 취할 수 없게 되었다.
무릎을 꿇는 자세에서 재미있는 대목은 청혼이다. 서구 사회에서 신랑이 신부에게 무릎을 꿇는 자세를 취하는 문화는 18세기 혼례식에서 유래하여 현재의 프로포즈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에도 한쪽 무릎을 꿇는 자세는 전형적인 프로포즈 순간으로 인식된다. 오죽하면 에펠탑 근처에서 연인과 함께 산책할 때는 운동화 끈도 함부로 묶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당시 남성은 여성에게 몸을 낮추며 공손하게 청혼을 했지만, 여성이 그 청혼을 받아들이는 순간, “여성은 곧 자신이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훨씬 더 낮은 지위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무릎 꿇는 몸짓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한 일종의 속임수였다(33p).” 권력을 지닌 존재는 아무 이유 없이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 몸짓에는 고도의 속임수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턱밑으로 나를 얕잡아 보는 사람보다는 느닷없이 무릎 꿇는 사람을 더 경계해야 한다.
나폴레옹이 즐겨 취한 포즈인 숨긴 손도 고대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연설 할 때 격정에 차서 손을 휘적거리는 자세를 못마땅해했다. 손을 차분히 옷자락에 감춘 자세는 훌륭한 연설가들의 모범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논리가 부족한 사람들은 감정에 호소하고 표정과 몸짓이 현란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전장을 지배하던 나폴레옹이 왜 연설가들의 자세에 집착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는다. 최고의 문관은 무관을 흉내 내고, 최고의 무관은 문관을 흉내 내는 법이다.
16세기 초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중으로 벌린 손, 즉 집게손가락은 떨어뜨리고 중지와 약지는 붙이고 소지는 다시 떨어뜨린 채로 손을 쭉 편 자세는 여러 가지 해석을 낳았다. 일부러 의도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취하기 어려운 이 자세는 고위 계층의 초상화나 성모가 수유하는 장면에서 종종 등장하였다. 혹자는 유대교인들의 비밀 신호라고 주장하고, 또 다른 이론은 종교적 아픔의 표상이라고 한다. 심지어 어떤 이론에서는 그냥 그 모델의 손가락에 장애가 있다고도 한다. 그나마 나은 설명은 성모가 수유할 때 취하기 좋은 자세이고, 그 의미를 동경하는 이들이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손가락 모양 하나를 놓고 여러 이론과 주장이 난무하며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는 것이 미술사의 묘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묘미는 일반 대중을 미술사로부터 밀어내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종합해보면, 너무나 직관적이고 손쉬운 상징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아주 오랫동안 사랑받았음을 알 수 있다. 중지를 곧추세운 ‘퍽유’ 동작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보여선 안 될 남근과 고환을 세트로 재현하며 보여줄 수 있는 기호로서 이보다 적절한 동작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엄지를 중지와 집게손가락 사이에 끼운 ‘음문손’ 동작도 2000년 전부터 사용했다. 이 동작들이 모욕을 주는 맥락에서 끊임없이 사랑받아 왔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입을 다문 순간조차 ‘그것’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음을 반증한다.
그 밖에도 이 책에는 하품하는 이유, 치아 보여주기가 모욕인 이유, 중국 황제가 영국 사절단에게 절을 강요했다가 오히려 홍콩을 빼앗긴 이야기 등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과학, 역사, 미술에 대한 저자의 폭넓은 지식이 짜임새 있게 얽혔다. 개별 포즈들에 대한 서술은 매우 짤막한 편으로, 몇몇 대목에서는 설명하다 만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책 자체는 두꺼우나 활자의 분량은 턱없이 부족하다. 미술사에서 애도를 다룬 작품은 어마어마한데 표면만 핥은 수준이다. 특히 나체나 에로틱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 기색이 역력하다. 분량의 제약 없이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풀어놓았다면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제도권 미술을 넘어 만화, 광고, 낙서 등과 같이 시각문화 전반을 아울러 진정한 ‘포즈의 인류문화학’으로 발전시켰으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도 남는다. 저자의 능력은 그것을 충분히 해낼 수 있으나, 90이 넘은 연세가 문제다.
도판 중에 초현실주의 작품이 자주 보인다. 초현실주의 화가로 활동하기도 하는 저자의 개인적 관심사가 드러난 대목이 아닌가 싶다. 혁혁한 학문적 공로를 세운 동물학자이자 생태학자이면서, 테이트에 소장된 초현실주의 화가이기도 하다니 그야말로 놀랍다. 20~21세기의 다빈치라고 해야 할까? 검색을 해보니 펜데믹으로 미술계가 쑥대밭이 된 올해도 왕성하게 신작을 전시했다. 참… 괴물이다.
끝으로, 320페이지의 양장본임에도 가름끈을 끼워주지 않은 을유문화사에게 심심한 규탄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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