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도록
‘예술의 위기’가 심심치 않게 거론되지만, ‘비평의 위기’에 비하면 허상에 가깝다. 이브 미쇼(Yves Michaud)에 따르면, “소위 말하는 현대 예술의 위기는 예술에 대해 생각하는 바의 위기이고, 그의 기능에 대해 생각하는 바의 위기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 두 가지 함의를 전하는데, 첫째는 예술의 위기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가 예술의 위기라고 인식하는 것이 어쩌면 비평의 위기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예술에 대해 생각하는 바’란 비평의 정의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밑도 끝도 없이 들먹이는 비평의 위기를 진단하기 위해서는 먼저 비평이 무엇인지를 숙고해야 한다. 비평은 작가와 관객 사이를 중재한다. 작품에서 드러나지 않은 것을 보게 한다. 작가의 의도를 언어로 드러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저의를 까발리거나 사회구조와의 역학관계를 드러낸다. 작품을 통한 미적 경험을 한층 더 두텁게 만든다. 그로부터 작품을 보아야 할 이유,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논해야 할 이유를 한 가지 이상 증명한다. 미적 세계와 일상 사이의 대화를 촉진한다.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가 추구했던, “편파적이고 열의에 차고 정치적인” 비평은 그 자체로 작품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비평은 작품의 진리성분을 구해내어 사후생(死後生)으로 이끈다.
비평의 위기는 이러한 본질적 기능에서의 후퇴를 의미할진대, 비평가들이 비평가들을 인터뷰한 이 책 속에서 우리는 위기의 전말을 읽어낼 수 있을까?
서문은 저자들이 크게 세 개의 사고틀에 입각해 비평가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정리했다고 밝히고 있다. 비평의 형식, 정치, 그리고 사회적 의미가 그것이다. 여기서 형식은 비평이 단순한 묘사나 해명을 넘어 새로운 미적 형식을 갖춘 독창적 작품으로서 옹립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다음으로 정치는 미술의 경계 안팎에서 비평이 올바른 역할과 실천을 해낼 수 있는지와 관련 있다. 끝으로 사회적 의미 측면에서의 고찰은 비평이 고도의 전문가 집단을 지향하는 것과 문턱을 낮추는 것 사이에서 어떠한 자세를 취할지에 관한 가치판단을 요구한다. 세 개의 사고틀은 논란의 여지 없이 오늘날 비평의 지형도를 진단하기에 적합해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이 각각의 사고틀에서 논의될 수 있는 무궁무진한 가치판단의 영역들을 거슬러 최상류로 올라가면 지배적인 독립변수 하나만이 우뚝 서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돈이다.
경제 주체로서의 생산과 소비 문제가 생을 영위하는 모든 조건의 저변에서 가장 핵심적인 관건이 된다는 사실을 굳이 되새길 필요는 없다. 우리는 촘촘한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태어나 그 방식을 따라 먹고, 마시고, 싸고, 잠든다. 우리는 다른 구조를 경험한 적이 없으므로 다른 구조를 상상하거나 현실화할 수 없다. 다만 구조적 문제를 조금이나마 극복하는 열쇠는 그 구조가 특정한 분야에 어떠한 영향을 어떻게 미치는가에 대한 섬세한 시선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책은 오늘날 비평의 문제에서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동시대 비평의 유통은 돈의 흐름에 철저히 귀속되어 있다. 전문적인 비평은 독자가 희소하므로 비평가 스스로 자체적인 시장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렇다면 매체에 기대야 하는데, 정기구독을 끊어야 먹고사는 미술잡지는 의무감에 불타는 몇몇 애호가 덕에 근근이 입에 풀칠하는 수준이다. 잡지사가 원고료와 인건비를 집행하려면 광고 수익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광고를 주는 자는 언제든지 논조에 관여할 권한을 얻게 되었다고 믿는 법이다. 또한, 매체의 영세성은 보신주의로 귀결된다. 신랄한 비평이나 기획취재를 꿈꾸지만, 그로 인해 자칫 송사라도 휘말렸다가는 누구 하나 옷 벗거나 간판을 내릴 각오를 해야 한다.
결국, 비평가는 자비로운 후원자나 청탁을 찾아 헤매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타의에 의한 비평이 주된 밥벌이 수단이 된다. 비평가 내부의 자발적 열망에서 기인하지 않은 비평은 “편파적이고 열의에 차고 정치적인” 비평과 점점 멀어진다. 핵심을 짚어내지 못하고 찬사 일변도로 흐르거나 저명한 철학자의 이름과 신조어로 버무려진 비평은 그나마 남아있던 독자마저 떨구어 낸다. 시장은 더 황폐해진다.
매체가 경영난에 허덕이고 영혼 없는 청탁 비평으로만 연명하는 것이 버거워진다면 결국 공적 기관의 도움에도 손을 뻗게 되는데, 가뜩이나 경쟁이 ‘박터지는’ 문화예술 지원사업 포트폴리오에서도 비평 관련 항목은 한 줌도 안 된다. 그나마도 누가 어떠한 기준으로 지원대상 비평가를 선정하는지, 그리고 그 지원은 특정 정권의 정파성과 무관한지 의심의 눈초리가 가시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평가들은 남은 역량을 짜내고 짜내 대중친화적인 말랑말랑한 단행본으로 돌파구를 마련하거나, 전시 기획 쪽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다. 젖과 꿀이 흐르는 정교수 자리는 이미 선배들이 다 가져갔고, 그 자리에 앉은 이들, 그리고 그 자리를 바라보며 학교 문턱을 넘나드는 이들은 늘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경거망동을 삼간다. 경거망동을 삼간다는 말은 제대로 된 비평을 삼간다는 말의 또 다른 사본이다.
미술계에 ‘내가 (전업) 비평가올시다’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는 이들은 손에 꼽게 되었다. 그 전업 비평가들도 온갖 레지던시나 전시지원 프로그램, 미술상후보선정위원회, 작품선정위원회 등에 불려 다니며 거의 비정규직 공무원이 되었다(김정현, 451p). 공무원들이 부르기 좋아하는 사람은 이미 전에 불러봤던 사람이다. 한번 선정된 사람은 계속 다시 선정된다. 경로에 의존하는 것은 안전한 선택이다. 온갖 위원회가 위촉하는 전문가의 풀(pool)이 고착될수록 시대의 미감도 고착되기 마련이다.
비평 시장의 위축이 비평 자체의 위축을 더욱 부추길 것이라는 전망은 지당하다. 비평가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비평이 마음껏 생산되고 유통되어 미적 의미의 세계가 한층 더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선순환적 시장 생태계를 마련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미술 창작 지원금을 확충하고 거기서 일부가 비평가들에게 돌아가도록 통로를 마련해야 한다. 비평가에 대한 직접지원과 창작을 경유한 간접지원의 적정 비중에 대한 포트폴리오도 논의되어야 한다. 민간과 공적 기관이 십시일반으로 참여하여 비평 촉진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 기금의 운용은 특정 이해관계자나 정파의 이해에서 독립된 배분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말이 쉽지 유사 이래 단 한번도 그런 체계가 확립된 적이 없다. 궁극적으로 탄탄한 역사철학적 논리와 균형 잡힌 시선과 아름다운 문장을 갖춘 비평가라면 오직 자발적인 비평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는 생태계가 마련되어야 한다.
저자 3인은 인터뷰어로 참여하고 몇몇 중요한 대목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나, 그들의 의견은 딱히 중요하지 않다. 다채로운 삶의 궤적을 보유한 여러 비평가를 한자리에서 만나고 그들의 가치관을 접할 기회이므로 인터뷰이에만 집중하면 된다. 비평이라는 하나의 행위를 놓고도 다양한 해석과 실천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 창작에서 다양한 형식과 접근이 권장되는 것처럼, 비평에서도 단일한 정답은 없으며, 폭넓은 가능성은 병치될 수 있다.
- 작품의 질은 말할 수 있고, 말해야만 한다. 독특한 문체를 통해서 자신만의 안목을 관철하는 것이 중요하다. (박영택)
- 형식적 차원에서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는 비평도 가능하다. 비평을 통하여 독자적인 저자성을 획득할 수 있으며, 형식적 실험은 권장되어야 한다. (김장언)
- 즉물적인 경험과 감각에만 매몰되지 말 것. 역사적 총체성의 가능성은 포스트모던의 광풍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가능하며, 그 가능성을 포기한다면 비평의 존재 이유 자체를 회의해 봐야 한다. 오늘날, 진정한 의미에서 미술 비평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147p). 다원주의 시대에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의견 하나 내놓는다고 해서 비평일 리는 없다(148p) (서동진)
- 아무도 읽지 않을법한 매체(잡지)에 헌신하는 것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오늘날 비평은 사실상 자생 불가능한 생태계라고 봐야 한다. 가장 읽기 힘든 비평은 입장이 없거나 드러나지 않는 비평이다. (백지홍)
- “비평을 비난으로 새기는 문화 권력은 광고를 주지 않았죠(190p).” (홍경한)
- 미술계는 알면 알수록 알고 싶지 않은 곳이다(221p). 비평은 재현이 아닌 생성이다. 논쟁가가 교수가 되면 논쟁을 그친다. 즉, 자리가 의식을 결정한다(226p). 페미니즘 맥락에서의 해석을 거부하는 여성 작가들이 많다. 만약 페미니즘이 멋지다면 여성 작가들이 페미니즘 프레임을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이론가들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선영)
- 자본주의와 글로벌리즘은 미술의 도구화, 작품의 상품화, 그리고 비판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 오늘날이 상대주의 시대인 것은 맞지만, 불확실성과 복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논점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책략에 가깝다(294p). 비평이 부재한 시대에 참담함을 느낀다. (심상용)
- 미술제도가 현실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지라도 제도비평에 매진하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홍태림)
- 잘나가는 미술책을 쓰고 싶다면 자기 이야기를 쓰라. (정민영)
- 모든 것이 개인화(내면화)되는 시대에 미술, 그리고 비평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양효실)
- 비평만으로 먹고 살 수 없는 시대이므로 비평가들이 자꾸 작품의 과정에 참여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작품의 결과만 놓고 이야기할 사람은 없게 된다(439p). 최근 비평가는 미술계의 비정규직 공무원이자 하청업자에 가깝다(451p). (김정현)
- 물질 뒤에 숨은 무언가를 본다는 점에서는 기계비평이나 미술비평이나 같다. 비평가가 솔직할수록 오히려 비평적 객관성을 얻게 된다(473p). (이영준)
이 중에서도 오늘날 비평이 무너지는 과정의 핵심을 짚은 심상용, 비평가의 생존 문제를 진솔하게 풀어낸 이선영, 자신만의 독특한 비평적 시그니처를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이영준, 다원주의 시대에도 헤겔주의자로서 뚝심을 지켜가는 서동진의 인터뷰가 특히 중요하며, 책을 살 돈이 없다면 서점에서 이 대목만이라도 발췌해서 읽기 바란다.
끝으로, 혹여 당신이 지금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면 옐로우펜클럽, 현시원, 집단오찬의 인터뷰는 읽지 말라. 아마추어리즘과 자기방어가 지나쳐 지면이 아깝다.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기만 하니까 자꾸 인터뷰어가 개입한다. 기본적으로 나는 말끝마다 “~인 것 같아요”를 습관적으로 붙이는 ‘같아요충’들이 비평가라고 자임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임에도 확신도 없이 추정이나 해대면서 어떻게 타인의 작품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솔직하고 날서있는 리뷰라 읽는게 재밌었습니다! 혹시 주일님은 적을 두고 계신 곳이 있는지요? 리뷰어 분이 어떤 작업을 해오셨는지 궁금하네요
좋아요Liked by 1명
감사합니다 ^^ 저는 그냥 과학기술정책을 연구하면서 먹고 삽니다. 예술에 대해서는 취미로 끄적거립니다.
좋아요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