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알튀세르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Louis Pierre Althusser, L’avenir dure longtemps, suivi de Les Faits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은 아버지 없이 태어났으며 이론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고독 속에서, 그리고 자신들이 이 세상과 마주해 맞게 된 고독한 위험 속에서 살았다.”

229p

다시 한번 이름에 관한 생각이 나를 사로잡는다. 이게 다 이름을 짓지 않고 ‘고르는’ 양놈들 때문이다.

푸코(Michel Foucault)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부하고 자신의 이름을 선택했다.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아들도 같은 선택을 했다. 오이디푸스적 개명은 피의 선험적 구속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려는 야심을 반영한다.

알튀세르는 개명하지 않았으나, 결국 그의 이름에 투영된 타자의 욕망에 굴복했다. 그가 실패했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오이디푸스적 개명을 선택하지 않은 데서 찾아야 할까? 이 질문은 전제가 잘못되었다. 오늘날 그를 실패한 철학자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다른 분야지만, 고흐(Vincent van Gogh)에 대한 하나의 가설도 떠 오른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린 형 ‘빈센트’의 이름을 물려받았는데, 그로 인해 죽은 형의 운명이 자신과 늘 따라다닌다고 여겼고, 우울감이 덮치는 순간마다 그 운명을 떠올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게 다 이름을 짓지 않고 ‘고르는’ 양놈들 때문이다.


1980년 11월 16일, 여느 때와 다름없던 나른한 일요일 아침 9시, 알튀세르(Louis Althusser)는 아내 엘렌느 리트만(Hélène Rytmann)을 목 졸라 살해했다. 온갖 부도덕한 여성 편력에도, 극심한 우울증에도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 지혜롭고 용감한 여인이었다. 그런 아내를 교살한 철학자. 철학사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만큼 충격적이고 선정적인 사건이었다. 어쩌면 알튀세르의 이름이 프랑스 국경을 넘어선 이유를 이 사건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고등사범의 교수로서, 프랑스 현대철학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였고, 특히나 마르크스 철학의 해석과 제도권 정치에의 접목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선두에 서 있던 철학자였으나, 그럼에도 ‘그 사건’이 없었다면 그의 이름값이 지금과 같지는 않았으리라.

사건 직후 알튀세르는 즉각 정신병원에 수감 되었고, 법정에서 면소(免訴) 판결을 받았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으며, 모든 공적 책무는 후견인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그 사건은 사상계, 좌파, 그리고 제도권 공산당에 적의를 가지고 있던 자들과 선정적 사건사고에 목마른 대중에게 최적의 씹을 거리를 제공하였다. 어쩌면 알튀세르로부터 가장 신랄한 비난을 듣던 공산당 내부의 기득권층이 역설적으로 이 사건을 가장 반겼을지도 모른다. 마르크스를 앞세워 당의 앞길에 소금이나 뿌리던 변절자가 살인자라니! 그렇게 고매한 척하던 고등사범의 교수가!

알튀세르에게 교도소의 차가운 독방이 아닌 면소판결이 내려진 것을 두고 대중은 철학자에 대한 특혜라고 비난했으나, 당사자의 입장은 달랐다. 면소의 판결은 이 사건에 대하여 논할 가치와 의미가 상실되었으므로 기소하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이 결정은 모든 사실관계와 입장들을 침묵으로 봉인한다. 그것이 어디에 있건 세상에 나올 수는 없다. 철학이 세상에 하나의 원리를 세우고자 하는 작업이라고 전제할 때, 철학자는 가장 야심찬 직업인일텐데, 제도적 수단을 통해 그러한 야심을 봉인해 놓는 일이 특혜일 수는 없다. 이것은 오히려 사형보다 더 큰 형벌이다. 평생을 논리와 글로 먹고 살아온 알튀세르에게 면소의 장막 아래에서 침묵하는 것은 흑암의 지옥을 의미했다. 그는 차라리 당당하게 법정에 서서 변론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의 변론은 법정의 메아리가 아닌 미공개 원고로 남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2년이 흘러서야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가 발간되었다.

알튀세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에게 재앙이었던 면소 판결은 우리에게 선물이 되었다. 그가 마음속에 묻어둔 말들이 독보적인 읽을거리로 영구히 남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누군가의 진실한 속내로 깊숙이 들어가는 경험을 늘상 갈구한다. 나는 요즘 케이블 채널에서 주야장천으로 5회 연속 방영하는 ‘인간극장 스페셜’을 보면서 그것을 다시금 느낀다. 하물며 그 누군가가 사상계에서 꽤 성공한 철학자라면? 그 철학자가 현대사의 정치 격변기에 막후에서 긴밀하게 관여했던 인물이라면? 그런데 그 인물이 정신병력이 있는 데다가 끝내 살인까지 저질렀다면?

그러나 누군가의 비극을 한낱 흥밋거리로 취급하는 것은 대단히 비윤리적인 태도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을 앞에 두고 ‘되게 유명한 아무개가 있었는데 말이야, 그 사람이 결국 이러저러한 이유로 살인을 했다지 뭐니’라는 식으로 단편적인 흥미위주의 진술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저자가 원했던 대로, 그를 진정성 있게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한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형성되었던 과정, 그리고 그를 있게 한 다층적인 맥락, 그 토대 위에 비극적인 하나의 사건이 있을 뿐이다.

비극의 첫 번째 실마리는 어머니가 사랑했던 루이의 죽음이었다. 알튀세르에게 ‘루이’라는 이름을 준 그는 아버지의 동생, 그러니까 작은아버지다. 어머니는 지적이고 다정했던 루이와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약속했으나 전쟁에 징집되었던 그는 베르덩의 하늘에서 전사했다. 마초적 난봉꾼 기질이 다분한 아버지는 전쟁에서 돌아와 동생을 대신해 어머니에게 청혼했고,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아버지의 청혼에는 동생의 죽음 앞에서 느끼는 모종의 부채의식 내지는 책임감이 자리 잡고 있었고, 두 가족 간에 맺었던 암묵적인 혼인의 계약, 그리고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연정도 더해졌다. 어머니는 루이를 절대 잊을 수 없었고 아버지를 혐오했으나, 두 집안의 약속 아래 결혼을 향해 치닫는 과정을 적극적으로 막아서지 못했다. 그렇게 얻게 된 아들은 서구적 전통을 따라 자연스럽게 ‘루이’로 불렸다. 그 이름과 함께, 알튀세르의 자아는 첫 번째 분열의 길에 들어선다.

가장 큰 문제는 루이에게 투영된 어머니의 욕망이 베르덩의 하늘에서 전사한 루이를 끊임없이 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루이는 한 번도 자기 자신으로서 사랑받지 못했다. 권위적인 아버지로부터 소중한 꿈과 직업, 그리고 순결을 박탈당한 어머니는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투영한 아들이 온전한 무균실에 거함으로써 모든 상실로부터 대리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그 무균실은 성(性)이 거세된 곳, 폭력과 위해가 없는 곳, 만약을 대비해 충분한 잉여를 갖춘 곳, 최상의 안전이 보장되는 곳이다. 루이는 과보호 속에서 성적 가능성이 억압되었고,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지도 못했으며, 자연 속에서 뛰어놀지도 못했다. 충분히 검증된 친구와만 교제할 수 있었고, 학교와 집만 오가는 시계추 같은 삶을 강요당했다. 자아가 거세당한 비극이 시작되었다.

이럴 때 의지할 수 있거나 일체감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그리고 그 대상이 아버지라면 그나마 보완이 되었겠지만, 루이가 처한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아버지는 대단히 목적지향적인 인물로서, 모든 주변인을 자기 욕망을 위한 수단으로 부리는 부도덕한 존재였다. 남들은 습관적으로 힐난하고 조롱하면서 자신에게 적용하는 윤리적 잣대는 느슨하기 짝이 없었다. 가정과 사회의 철저한 역할 분리를 통해 아내와 자식의 도리를 강요하고 자기 자신은 멋대로 살았다. 그리고 폭력적이었다.

집안에서 루이가 기댈 곳은 없었다. 자연을 벗 삼아 소탈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던 외할아버지가 그나마 존경할만한 친인척이었고, 그와 함께 지낼 수 있었던 유년기의 몇몇 순간들은 가장 아름다운 추억들로 기억되나, 그 시간은 턱없이 짧았다. 외할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로부터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역으로 깨닫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에게 가족이라는 것, 즉 “국가 조직이 존재하는 한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중 가장 끔찍하고 가장 지독하며 가장 고통스러운 그 가족이라는 세계(145p)”는 모든 비극의 근원이었다.

루이가 털어놓은 인생의 궤적에서 그가 동경하는 집단, 진정으로 속하고 싶었던 집단에 대한 모티브는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자연 속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순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매료되었고, 그들과 동화되기를 원했다. 외할아버지 집에 맡겨졌을 때 잠시 다녔던 시골학교에서 사귄 순박한 친구들, 그리고 그 동네의 농부와 노동자들, 나치의 포로수용소에 갇혀서 만났던 각양각색의 군상들과 함께할 때, 육체는 비록 고단했어도 마음은 더없이 평온했다. 그 평온함은 가족으로부터 해방되어 참 ‘나’로서 말하고, 행동하고, 기억될 수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루이는 “나는 사변적인 눈의 형태로 사고하는 신학자 성 토마스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며, 믿기 위해 손으로 만져보기를 원했던 복음서에 나오는 성 토마스와 훨씬 더 가까웠다(284p).”고 스스로 정의했는데, 그가 천성적으로 복음서 속 토마스였는지 알 길은 없으나, 그에게 조여진 속박이 그러한 기질을 부추긴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자서전, 철학연구 요약서, 자가정신분석연구서 등 여러 정체성이 복잡하게 얽힌 이 책은 1인칭 범죄소설 마냥 살해 장면에 대한 세세한 묘사로 시작하여 2~9장까지는 성장과정을, 10~13장까지는 성인이 된 후의 경험과 공적인 삶에 관하여, 14~19장은 철학과 정치에 관하여, 20~22장은 ‘그 사건’의 전후 맥락을 다룬다. 마지막 23장은 특이하게도 자신을 담당했던 정신분석가의 의견서를 가치중립적인 척 첨부하고 있는데, 이 의견을 통해 루이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간단하다. 그러므로 나는 무죄라는 것. 이 의견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것은 독자들 각자의 마음속 목소리를 따르면 그만이지만, 우리가 어떤 결론을 내리든 바뀌는 것은 없다. ‘그 사건’이 진정 중증 우울증 환자가 정신착란 속에서 아내의 자살을 도운 것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목격자가 없는, 피해 및 가해 당사자의 진술 외에 아무런 증거가 없는 전형적인 밀실살인이다. 루이는 면소 판결을 받은 살인자가 되어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내는 어려서 부모의 사랑을 못 받고, 젊어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투신하느라, 공산당 동지들에게 배신당하느라, 그리고 남편의 여성편력을 참아주느라 줄곧 고통받다가 결국 남편의 손에 죽었다.

이 밀실살인 현장에서 우리는 단 하나의 진술만을 최종적으로 확보했다. 여기에는 한 철학자의 성장과정, 연구와 정치, 사적인 삶,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복잡한 정황들이 담겨 있다. 철학, 정치, 그리고 살인이라는 키워드의 교집합에서 건질 수 있는 가장 치밀하면서도 내밀한 분석이다. ‘그 사건’ 하나만을 풀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문헌일지 모른다. 하지만 범주를 조금 넓혀, 한 인간이 성장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억압과 고통, 그리고 그 압력이 빚어낸 예측불가능한 결과물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더 없이 유용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살인자와 살해당한 피해자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 책을 읽어야 할 대상은 잠재적 살인자의 부모들이다. 충격요법을 쓴다면, 잠재적 살인자란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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