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n Bailey, Starry Night: Van Gogh at the Asylum
제목만 보면 발에 채는 ‘반 고흐로 눈물 짜내기’, ‘반 고흐 신화 부추기기’, ‘반 고흐 앞세워 미술 입문자 지갑 털기’ 중 하나로 느껴진다. 출판사 아트북스는 이런 일에 워낙 전문가인지라 심증이 더 커진다. 하지만 실제로는 나름 진지하게 고흐(Vincent van Gogh)의 행적을 조사한 연구서가 맞다. 문제는 이와 같은 ‘반 고흐 스토킹 연구서’도 시장에는 널려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3년 전에 읽었던 버나뎃 머피(Bernadette Murphy)의 「반 고흐의 귀」도 그런 책 중 하나였고, 그런 책 중 가장 우수한 사례였다. 그러므로 차별성이 중요하다.
마틴 베일리(Martin Bailey)는 고흐가 생폴에서 정신병원 신세를 진 1년에 집중한다. 그곳의 환자명부가 뒤늦게 발견되어 이 연구의 실마리가 되었다. 저자는 2017년 초에 생레미 시립기록보관소에서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생폴 입원명부를 열람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1889년 당시 18명의 출신지와 나이 등 기본적인 인적사항과 함께 간단한 질병 관련 기록도 있었다. 고독한 화가와 함께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밝힐 수만 있어도 고흐연구에서 한 걸음의 진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책의 성과가 그러한 결실을 제대로 엮어냈는지는 회의적이다.
저자는 고흐의 편지 속에 등장하는 몇몇 환자의 증세 묘사를 바탕으로 그 환자의 이름, 직업, 나이, 생애 등을 대략 밝혀냈다. 사소한 단서를 통해 환자를 특정하는 추론은 합리적이기에 반박할 수 없지만, 고흐와 함께 입원한 환자가 누구인지 밝히는 일이 고흐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줄 수 있는 도움은 너무나 제한적이다. 고흐는 스스로 동료 환우들과 무척 다른 입장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았다. 고흐는 간질, 순환성 정신질환, 경계성 인격 장애, 양극성 장애 등으로 추정되는 정신병리적 문제로 시시각각 발작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멀쩡했다. 그림을 그리고, 편지를 쓰고, 책을 읽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1년만 그곳에 머물렀던 고흐와 달리 동료환자들은 대부분 중증이거나 만성 질환을 앓았고, 상당수는 여생을 정신병원에서만 보냈다. 고흐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동료환자들과 교류할 가치를 전혀 느끼지 못했고, 그들이 자신의 작품이나 작업에 대하여 때때로 표출하는 관심에 대하여 거부감을 표했다. 동료환자 중 두 명의 초상화를 그리긴 했으나, 그들과 정서적으로 교류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니 동료환자들이 직접적 교류를 통해 고흐의 작품에 영향을 미친 바도 없다. 환자명부로 새롭게 밝혀진 바는 없되, 다만 이미 잘 알려진 하나의 사실, 즉 고흐가 너무나 열악한 사회적 환경에서 철저하게 고독한 1년을 보냈다는 사실만이 다시 한번 강조된다.
어떠한 연유이건 고흐와 1년 동안 같은 공간에서 생활한 사람들이니, 그들에 대해서 시시콜콜한 정보들을 최대한 많이 캐내면 미술사적으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런 막연한 스토킹이 부당한 신화화만 부추기고 작품을 오히려 베일에 가리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저자는 서문에서부터 미공개 환자명부의 발견이 고흐연구의 대단한 전기라도 될 듯 호들갑을 떨었지만, 사실 이 명부를 기반으로 하는 본격적인 서술은 16챕터 중 단 한 개 챕터(‘함께 여행하는 이들’)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동료환자가 고흐에게 미친 영향이 제한적임을 애초부터 알았음이 틀림없다. 환자명부에 대한 강조는 무수한 고흐연구 중에서 어떻게든 차별화해야 한다는 강박에 지나지 않는다.
차별화 강박의 또 다른 사례는 고흐의 연표에서 ‘생래미 시기’를 ‘생폴 시기’로 변경했다는 것이다. 고흐는 평생에 걸쳐 프로방스에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어 아름다운 창작의 낙원으로 가꾸어 가고 싶다는 꿈을 놓지 않았으나, 현실은 그 꿈과 달리 평생 떠돌이로 살다가 결국 떠돌이인 채로 세상을 떠나야 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보리나주, 파리, 아를, 오베르쉬르우아즈 등 고흐가 머문 지명을 기준으로 시기를 구분하는 데 익숙하다. 나도 생래미 시기라는 명칭이 익숙했고, 한 번도 그 구분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저자는 고흐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1년 동안 생래미드프로방스(Saint-Rémy-de-Provence) 시내에 나간 적이 거의 없고, 대부분 시간은 생폴(Saint-Paul) 정신병원과 인근 시골마을에서 보냈으므로 생래미 시기라는 합의된 명칭을 생폴 시기로 정확히 고쳐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19p).
그런데 생래미를 구글 지도에서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이 지명은 에스트린 미술관(Musée Estrine – Présence Van Gogh) 등이 자리 잡은 중심 시가지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남으로 알필 산맥까지 이르는 울릉도보다 조금 큰 지역을 포괄한다. 정신병원이 속한 생폴은 생래미의 남쪽마을에 불과하다. 생래미는 그 자체로 코뮌(commune), 즉 프랑스 최하위 행정구역이므로, 그 안에 속한 모든 것은 생래미 출신, 생래미 소속 등으로 부를 수 있고, 그것이 자연스럽다. 심지어 생래미 중심 시가지에서 생폴 정신병원까지는 걸어서 23분 거리다. 그러니 고흐의 생폴 정신병원 시절은 생래미 시기로 통칭함이 어색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 저자가 굳이 1889년에서 1890년 중반까지를 생폴 시기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차별화 강박 탓이다. 이 주장은 고흐가 생래미 시가지를 한가로이 쏘다니지 않았음을 강조함으로써 정신병원 인근이라는 제한적 틀에만 격리되어 살았던 고독한 예술가에 대한 연민을 북돋음과 동시에 고흐 연구자 사이에서 독창적인 주장 하나로 기억되고 싶은 저자의 욕망을 투영한다.
이상은 건전한 출판문화를 위한 사소한 트집이고, 고흐가 생폴에 머문 1년에만 오롯이 집중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는 미덕이 많다. 「반 고흐의 귀」에 끼워 넣어 함께 공부한다면 예술가의 마지막 시간을 재구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고흐가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얼마나 치열하게 많은 작품을 남겼는지는 수치적으로 단박에 알 수 있지만, 대표작이 아니고서는 그 작품의 면면을 하나하나 곱씹기 어려운 것이 사실인데, 이 책에 실린 작품들만 하더라도 생소한 것 태반이다. 예를 들어 고향 브라반트(Brabant) 시골마을을 생각하며 그린 「해질 무렵 오두막(1890)」은 유난히 일렁거리는 선을 통해 실제 눈으로 보면서 그린 풍경과 확연히 대비되는 몽상적 세계를 보여주는 독특한 작품인데, 곧 등장할 샤갈(Marc Chagall)의 세계관을 예견하는 듯하다. 「마리 지누의 초상(아를의 여인)(1890)」은 고갱(Paul Gauguin)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완성된 회화로 발전시킨 작품인데, 화가의 공동체가 비록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여전히 공동 작업의 가능성이 남아 있음을,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연대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담고 있다. 그런 의미를 떠나서도, 이렇게 화가 간 공동 작업이 이루어진 작품의 사례는 미술사에서 매우 드물다. 그밖에도 그간 다소 간과되었던 이 시기 작품들에 대한 다양한 재해석의 가능성은 여전히 널려 있다.


도대체 그는 그 많은 작품을 어떻게 그리도 빨리 그려낼 수 있었을까? 무엇이 그를 창작에 목멜 수밖에 없도록 내몰았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오늘도 연구자들은 불철주야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과 아를과 오베르쉬르우아즈를 떠돈다. 미술사를 통틀어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다작에도 불구하고, 고흐는 처음 붓을 잡은 이후 늘 갈급함에 시달렸다. “아, 이 망할 병을 앓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것을 해낼 수 있었을까(217p).” 하지만 그의 절규와 달리 실상은 그놈의 병 덕분에 더 치열하게 일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고흐가 건강한 부잣집 자재로 태어났다면 그렇게 다작을 할 만한 동인이 있었을까? 너무나 늦게 예술의 길에 들어섰다는 조급함, 언제나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은 동생에 대한 미안함, 지원이 조만간 끊길 것이라는 불안감,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다는 고립감, 그리고 건강과 위해에 대한 맹목적인 불안까지… 그 모든 압력으로부터 하루하루 버티기 위해, 살아 있음을 깨닫기 위해, 자신이 본 것이 틀림없음을 인정받기 위해 고흐의 붓은 끈적한 물감 덩어리를 계속 찍어 올렸다. 캔버스가 없으면 이미 그림을 그린 캔버스 위에 덧그렸다. 모델이 없으면 자신을 그리거나 판화를 모사했다. 어떤 형태로든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 집착에는 삶을 이대로 놓아버리지 않으려는, 아주 강력하고도 숭고한 생(生)의 의지가 있다. 우리는 고흐의 비극에 눈물 흘림과 동시에 그 비극이 없었다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작품에 찬사를 보낸다. 그래서 고흐의 작품이 이 세상에서 보존되고 전시되는 한, 우리는 늘 죄인일 수밖에 없고, 또 늘 기꺼이 죄인의 멍에를 짊어지고 전시장에 들어선다.
한 마디 덧붙여, 이 책의 제목이 된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1889)」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내가 예전에 공부했던 책에서는 하버드 대학 천체물리학과 교수 찰스 휘트니(Charles Whitney)를 인용하며, 이 그림 속에 묘사된 별자리가 1889년 5월 25일 새벽 4시경의 초승달 및 금성의 모양과 유사하다고 설명했다(이소영(2012), 「실험실의 명화」). 그러면서 고흐가 완벽한 상상 속의 아름다운 하늘을 창조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보이는 것과 책에서 배운 것을 토대로 약간의 과장을 섞었을 뿐이라고 했다. 나는 그 내용이 마음에 들어서 미술사 세미나에서 두세 차례 소개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드러나는 사실은 조금 다르다. 일단 고흐가 「별이 빛나는 밤」에 착수한 시기는 6월 15일에서 16일 사이이고, 18일쯤에 거의 마무리되었다. 그림을 착상한 시점에서 달은 보름달이었으나, 고흐는 그것을 그믐달로 변형했다. 전형적이고 낭만적인 형태의 달을 넣고 싶었던 욕망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작품은 천문학적으로 관찰된 결과와 일치하는 어느 한순간이 아니다. 이 그림의 영감은 독서, 문학, 운명론, 종교 등 다른 원천에서 찾아야 한다. 물론 5월 25일에 관찰한 천체의 이미지가 20일 쯤 후에 실제로 그리는 과정에서 창조적으로 변형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보고 그대로 그렸다는 설명도 맞고, 새롭게 재창조한 결과라는 설명도 맞다. 이처럼 지식은 계속 쌓이고 정설은 조정된다. 아퀴나스의 말대로,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을 조심하자.
※ 고흐 작품의 천문학적 해석에 관한 자세한 연구는 링크의 논문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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