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영 개인전, 「행복이가득한집」 展 (아트로직스페이스)

비평가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에는 무엇이 있을까? 탁월한 지성과 빛나는 감각, 그리고 예술을 향한 끝없는 열정… 그 밖에도 무수한 덕목이 있겠지만,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전제조건은 그 모든 덕목에 앞선다. 비평가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긴밀히 얽혀 있는 누군가의 작품을 비평할 때, 비평가의 가치판단은 절대로 작품 외적인 이해관계와 무관할 수 없다. 우리는 그러한 비평을 제대로 된 비평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든 비평가는 자신이 비평하는 예술가와 잔적이 있는지를 밝혀야 한다.”는 말은 그러한 의미에서 회자된다.

나는 애초에 비평가도 아니고, 이 글도 주류 비평의 형식을 따르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공정성을 기하기 위하여 비평가의 덕목으로 장황하게 이 글을 시작한다. 이 글은 양은영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에 관한 것이고, 나는 그 개인전의 첫 번째 관객이자, 작가의 남편이자, 전시의 설치 보조 알바(무급)라는 다층적 정체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 「행복이가득한집」은 양은영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이다. 작가가 2012년에 대학을 졸업했으니 개인전이 열리기까지 대략 10년이 걸린 셈이다. 그간 여러 단체전이나 공공예술 프로젝트에 종종 이름을 올렸으나 개인전 데뷔는 늦은 편이다.

한 예술가의 첫 번째 개인전은 작가의 이름으로 예술계라는 무대에 당당하게 홀로 서는 의례다. 양은영 작가에게 10년이라는 시간은 ‘전업’ 예술가로서 살아갈 길을 모색하며 분투하는 시간이었다. 예술가이기 전에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서, 작가는 미술잡지사와 미술학원에서 생업전선을 누비며 작업을 이어가는 이중생활을 10년 동안 지속했다. 그렇게 진득하게 내면에 농축된 이야기는,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들과 무관하지 않다.

아트로직스페이스는 조그만 갤러리가 밀집한 건물의 1층에 있다. 사이아트스페이스, 사이아트도큐먼트, 사이아트큐브 등 “사이아트”라는 브랜드가 대다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건물인데, 아트로직스페이스는 1층 전면부 유리를 보도와 인접한 외부 갤러리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다. 고즈넉한 윤보선길을 오가는 행인은 미술에 관심이 있든 없든 대체로 여기에 눈길을 한 번쯤 주게 되어 있다. 작가는 여기에 <여기 말고 어디든 다른 데로 1(2020)>를 걸었다. 이번 전시 브로셔의 메인 소개 작품이기도 하다. 작가가 정착한 충북혁신도시의 공터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제멋대로 쓰러진 고목과 갈대가 마구 뒤엉킨 화면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여기 말고 어디든 다른 데로 2(2020)>도 소개되었으며, 마지막 작품으로 내걸려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다.

여기 말고 어디든 다른 데로 2(2020)

이들 작품은 방치된, 버려진, 관심 밖의 땅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반영한다. 작가는 오랫동안 도시 문명의 브레이크 없는 성장 속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풍경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현대사회에서, 체계적으로 정돈되고 각양각색의 기호를 덧입은 땅은 태초의 자연에서 떨어져 나와 인위적인 자본체계로 편입된다. 인류는 모태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도시 문명에 철저하게 기대어 대부분의 삶을 영위한다. 현대인에게 생산재로서 땅과 거기에 얹은 구조물은 너무도 지배적인 삶의 조건인지라, 사실상 우리가 접하는 자연은 그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땅과 바다는 오직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만 볼 수 있는데, 거기서도 자본의 논리와 전혀 연을 맺지 않은 공간은 별로 없다.

중심과 주변부, 관리와 방치, 점유와 이탈, 가치와 무가치의 이분법적 논리로 공간을 평가하는 습성은 우리가 속한 자본의 논리 속에서 매우 당연한 사고의 흐름이다. 이 흐름은 부지불식간에 부추겨져 왔다. 삶의 공간을 잠식한 이분법 속에서, 양은영은 단순히 주변부에 관심을 가지라는 차원을 넘어, 거기에 삶이 있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주변부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뒤덮인 자리(2021)>, 그리고 <호시탐탐>은 인간이 (강제) 점거를 잠시 유보한 공간에서 생태계가 다시금 진용을 갖추는 과정을 암시한다. 개발이 멈춘 공간에서 순식간에 온갖 식물이 솟아나고, 파랗던 풀잎은 어느새 억센 나무줄기와 덤불이 된다. 그 덤불 사이로 메뚜기가 뛰어다니고, 그것을 잡으려 온갖 잡새가 날아들고, 또 그것을 잡으려 길고양이가 매복에 들어간다. 우리가 버린 땅이라고 생각하는 그 땅을, 자연은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땅을 소유한 적이 없으므로 땅을 버릴 자격도 없고, 버려진 땅이라는 개념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반짝이는 두 개의 선명한 눈은 그곳에 누군가 있음을, 진정한 의미에서 무가치한 존재나 공간은 없음을 증명한다.

호시탐탐(2021), 뒤덮인 자리(2021)

오늘날 대한민국은 부동산 광풍이 모든 이슈를 잡아 삼키는 형국이다. 5.972×10^24kg에 달하는 지구에서 한 점 표면을 차지하겠다고 난리를 치는 모양새가 퍽 가관이다. 역세권 신축 아파트를 가지면 정말 행복할까? (사실은 나도 그렇지 않다는 대답은 차마 못 한다) 욕망은 거기서 끝날까? (이건 그렇지 않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이오니아식 주두를 받치고 우뚝 선 <행복이가득한집(2020)>의 현판은 물리적 공간으로서 집이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이러한 의문은 행복을 전면에 내건 무언가가 오히려 행복과 거리가 있다는 합리적 의심에서 기인한다. ‘해피콜’이라는 용어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텐데, 전화를 거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전혀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 놓이는 것이 바로 해피콜이다.

‘행복이가득한집’에 사는 사람이나, 지하철역 5분 거리에 사는 사람이나, 부동산 규제완화지역에 사는 사람이나, 랜드마크에 사는 사람이나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집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행복의 조건을 만들어 갈 수 있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행복이가득한집(2020), 레이어 드로잉 시리즈(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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