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Emily Brontë, Wuthering Heights

집요함과 복수에 관하여,

여러 권위 있는 기관으로부터 ‘꼭 읽어야 할 고전’의 위상을 부여받고 있는 이 작품에서 오늘날 우리가 되새겨야 할 진리는 무엇일까?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다’라는 선조들의 가르침을 되새기면 되는 것일까? 사실 이 작품에서 머리 검은 짐승을 거두는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이왕 거두었다면, 그 후에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가에 대한 적절한 답을 찾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어떨까? 자연스럽게 피어난 두 사람의 사랑을 거스르면 어떤 형식으로든 부작용을 피할 수 없다는 것. 드라마의 단골 소재이지 않은가?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을 제삼자가 가로막으면 마치 기름을 부은 듯 되려 더 뜨겁게 타오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어떤 연인이 헤어지기를 바란다면 그냥 내버려 두자. 확률상 그편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수다쟁이 아주머니의 목소리로 두 연인의 비극적인 사랑과 두 가문의 흥망성쇠를 듣는 것은 분명 흥미로웠으나, 중심인물인 히스클리프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으므로 독서의 근본적 이유 자체를 계속 되묻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복수의 동기는 이해할 수 있다. 이해가 불가능한 지점은 평생에 걸쳐 치밀하게 실천하는 그 집요함이다.

오늘날 우리는 집요함과 거리가 먼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집요하려면 세계가 좁아야 한다. 시야를 가린 경주마처럼, 오직 결승선만을 바라보고 달려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세계 가운데 놓여야 한다. 당장 작품의 배경을 보더라도 영국 북부의 작은 시골 마을이다. 딱 두 집에서 살아가는 딱 두 가문만 등장한다. 의사, 변호사, 성직자 등 필수 전문직 외에는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단절되어 있다. 그들끼리 계속 겹사돈 관계를 맺으며 세대를 이어간다. 에드거는 캐서린을, 이사벨라는 히스클리프를, 헤어튼은 작은 캐서린을 보자마자 즉각 사랑에 빠진다. 그만큼 그들은 좁은 세상에 살고 있다.

좁은 세상은 집요함의 필요조건은 아닐지언정 중요한 충분조건은 된다. 목표 외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별로 없어야 집요함이 탄력을 받는다는 말이다. 히스클리프가 평생을 바쳐, 세대를 이어가며 복수의 대상을 찾고, 연적들의 모든 재산과 생애까지 독차지하려는 그 집요함에 오늘날의 많은 독자가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특히나 상대방에게 적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공식화한 상태에서 복수를 이어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인간은 본능적으로 남에게 미움을 사는 상황을 힘겨워하고,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우리는 병적인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고서야 하나의 대상에 대한 장기적인 복수에 집요하게 매달리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복수의 가시밭길로부터 눈길을 돌릴만한 대상이 너무나도 많다.

나도 복수심을 품고 살아봤고, 지금도 완벽하게 복수의 망령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복수에 관해 확실하게 깨달은 것 한가지는, 복수심은 그 자체로 자신의 영혼을 좀먹는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통쾌한 복수를 상상하더라도, 그 순간은 우울과 불안의 시간으로 기억된다. 놀랍게도 복수심을 품고 있을 때, 즉 복수를 실천하기 전, 야심찬 복수를 계획하거나 허무맹랑하게 망상하고 있는 단계에서, 상대방은 나의 복수심으로부터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 심지어 그런 프로세스가 어디선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를 수 있다(올드보이가 감금에서 풀려났을 때 “누구냐 넌”이라는 질문에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를 생각해보자). 당연한 이야기지만, 상대방이 나의 복수로부터 실질적인 영향을 받을 때는 머릿속의 복수심이 실천으로 이어졌을 때다. 복수심을 품어봤거나 모종의 복수를 실천에 옮겨본 사람은 알겠지만, 복수란 본질적으로 9할이 망상과 분노와 어설픈 계획의 복합체이고, 1할이 실천이다. 그 1할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유효타)를 초래할지는 모르겠으나, 사전적 단계에서 가장 확실하고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는 주체가 복수심을 품은 당사자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복수는 부질없으니 악을 용서하세요, 혹은 그대로 두세요, 라는 식의 얼치기 교훈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다. 타자를 지향하는 복수가 얼마나 ‘high risk, low return’인지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를 지향하는 복수다. 상대에게서 10을 빼앗는 것이 아닌, 나에게 1을 얹는 복수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내 의도대로 움직여주는 존재는 나밖에 없지 않은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대한 답글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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