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ovanna Borradori, Philosophy in a Time of Terror: Dialogues with Jurgen Habermas and Jacques Derrida
테러리즘의 시대, 우리가 해야 할 일
그 시기를 살아간 모두에게 그날의 기억이 있다. 가장 현실적인 상이 맺히던 뉴스 화면 너머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장면이 끝없이 되풀이되던 그 순간의 기억이.
거대한 빌딩이 화염에 휩싸이고 연기 너머로 사람들이 무기력하게 손을 휘젓다가 추락하던 장면은 한 사람의 생애에서 다시 보기 힘든, 다시 보아서는 안 될 장면이다. 그 후로도 그만한 살육의 현장은 더러 있었지만, 그렇게 큰 규모의 사고가 그렇게 생생하게 실시간으로 전세계에 생중계된 현장은 없었다.
나에게도 기억이 있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시차가 있어 생방송으로 보지는 못했다. 등교하고 나서 보도 영상을 보게 되었다. 학교 축제 준비로 요들송부 연습이 한창이었고, 나는 당시 테너 파트의 핵심멤버로서 연습실에 앉아 있었다. 음악 선생님이 연습실 천장에 매달린 작은 브라운관 TV로 뉴스 특보를 틀어 주었다. 아직 어릴 때였지만 세계사적인 순간을 목격했다는 느낌만큼은 분명했고, 불경스럽게도 그 느낌은 영광이라는 왜곡된 자의식까지 불러일으켰다. 쌍둥이 빌딩에 육중한 항공기가 내다 꽂히는 비현실적인 장면이 여러 각도에서 반복되었다. 새롭게 들어온 소식이 딱히 없을 때조차 가장 충격적인 장면을 되풀이하며 시선을 묶어두는 보도전략은 TV 뉴스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듯하다.
우리는 가까운 시간과 장소에서 벌어진 사건일수록 더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한 사건을 온당하게 평가하려면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과잉된 열기와 분노, 화약 냄새와 폭발음이 잦아들고, 완전한 종결을 상징하는 기념비마저 우뚝 서 관광 코스가 된 지금은 확실히 적당한 거리를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9.11의 의미와 반향에 대하여 충분히 이성적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와 데리다(Jacques Derrida)가 9.11에 대하여 각자의 생각을 진술한 이 책을 읽어보면, 그들은 그때 당시에도 이미 그 세계사적 대사건의 의미에 과도하게 매몰되지 않고 균형 잡힌 견해를 지니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심지어 대담이 이루어진 시기는 사건이 벌어진 그해를 넘기지 않은 시점이었다(하버마스는 12월, 데리다는 10월). 그때는 사건의 진상도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을 때였고, 막연한 두려움만이 고조되던, 그리고 복수의 광기만이 그 두려움에 상응하여 몸집을 불려가던 시기였다. 사실 미국의 국경 안에 거하던 대다수 국민, 그리고 나아가 국경 밖에서 미국적 자본주의의 자장 아래 거하던 대다수는 부시 행정부가 부추겼던 복수의 혈기에 손쉽게 편승했다. 전세계에 생중계된 비극 앞에서 그러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기서 ‘그러지 않기’란 복수하지 않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안을 ‘복잡하게 보기’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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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가 복잡하게 보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먼저, 계몽주의, 합리주의, 유물론이 보편적 담론을 지배하는 가운데서도 맹목적인 종교적 신념이 여전히 살아서 각 사람의 마음속이나 민족성의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은 근대성의 본질을 정확히 보여준다. 우리는 종교적 근본주의가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엄연히 존재하며, 보편적 담론과 갈등의 소지도 상존한다. 9.11은 그 잠재적 갈등이 가장 극렬한 파국으로서 표출된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세상은 이처럼 인식론적 불일치로 가득하다. 우리는 근대성의 다양한 국면 중 일부만을 보면서 그것이 전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는데, 사실 전쟁은 개념상 국가와 국가 간의 격돌이다. 빈 라덴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그를 국가수반으로 인정해 주는 대관식이나 다름없다. 테러와의 전쟁은 그 자체로 테러범을 격상시켜주며, 이는 테러행위가 진정으로 의도했던 바다. 그런 의미에서, 가해자의 입장에서 9.11은 성공한 테러리즘이다.
세계는 의사소통이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대화의 장에서 맞물려 합리적인 논증을 거쳐 최고의 의견 하나가 관철되고 실행에 옮겨진다. 물론 의사소통으로 세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이론은 하나의 이상일뿐이고, 현실에서 대다수 문제는 대체로 자본과 군사력이라는 힘의 논리를 따른다. 하지만 의사소통과 합리적 논증이라는 칸트 이래 근대 최고의 발명품 자체를 무위로 돌려서는 안 된다. 이상을 향해 현실을 끌어 올려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미국이 우방 국가들, 특히 유럽을 향해 테러와의 전쟁에 있어서 무조건적으로 지지해달라고 요청(사실상 협박)하는 것은 합리주의적 전통에 반한다. 아무리 시급하고, 아무리 분명해 보이는 현안이라도, 온당한 평가를 내릴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상당한 논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워낙 큰 사건이라서 시급하다면, 오히려 더더욱 그래야 한다.
의사소통은 공통의 체계와 구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언어라는 최소한의 체계가 없이 어떻게 의사를 나눌 수 있겠는가? 손짓발짓이라도 뜻이 통한다면, 그 주체는 같은 구조 안에 있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의사소통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공통의 규칙을 따른다는 의미이고, 어떤 문제에 대하여 더 나은 설명이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사소통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최선의 답을 찾는 과정이다. 최선의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화의 장으로 나올 이유도 없다. 그냥 혼자 알아서 해결하면 된다.
의사소통의 맥락에서 보면, 테러리즘은 하나의 병리현상이다. 정상적인 의사소통의 방식으로는 뜻이 통하지 않거나, 뜻이 통했음에도 아무런 피드백이 없으니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테러리즘은 의사소통의 기본 전제와 구조를 넘어선 발화다. 의사소통의 병리현상은 결국 의사소통의 구조와 방법론 안에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발화자나 메시지를 무시하고 곡해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병리현상은 재발한다. 합리적 논증에 기반한 의사소통으로 되돌아가는 것만으로도 세계의 산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근대의 혁명 이래로 인간은 탈주술화에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마천루와 우주여행의 기적을 바라보면서 주술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는 확신이 더욱 견고해진다. 하지만 DNA 속에 깊숙이 각인된 주술적 믿음은 크든 작든 모두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뿌리가 울창한 열매를 맺은 나라와 민족들이 여전히 우리와 같은 생태계를 공유하고 있다. 근대성이 도구적 합리성에 매몰되어 탈주술화를 맹목적으로 부추길수록 인간 주체는 기술과 시장의 외부적 대상이 된다. 최근 잠시 주춤한 듯 보이긴 하지만, 자본주의적 세계화의 파급이 맹위를 떨치는 현시점에서, 특정 종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있는 국가의 국민이나, 자본주의 대제국의 국민이나, 도구화의 정도가 조금 다를 뿐 본질적으로 처한 상황은 비슷하다.
근대성이 탈주술화를 부추겨 우리를 도구적 합리성의 외부적 대상으로 이끈 것이 사실이지만, 이 문제를 극복할 힘도 근대성 안에 배태되어 있다. 근대성의 유산으로서 합리주의적 논증의 정신은 우리가 가장 신봉해 마지않는 전통마저도 비판적으로 재검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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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는 하버마스보다 한층 더 복잡하게 본다. 개념의 근원부터 해체한다. 그는 끊임없이 말하고, 또 시적으로 말한다. 그에게 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9.11에 강한 충격을 받은 당사자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대체로 앵글로 아메리카 고유어의 지배를 받고 있을수록 이 사건에서 더 강한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자신과 가까운 시간과 장소의 사건일수록 더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누가 미국인지, 혹은 누가 미국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외부의 죽음에 애도하고 지나가지만, 그것이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면 장래를 생각하게 된다. 9.11 당시 세계의 많은 이들, 심지어 미국과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이들도 잠시나마 장래를 생각했었다.
죽음에는 경중이 없다. 그 사실에는 누구나 이성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더 마음이 쓰이는 죽음, 그리고 삶이 있다. 9.11보다 더 많은 사람이 한 번에 목숨을 잃은 사건도 많은데, 유독 그 사건만 전지구적 대사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미국은 세계질서 그 자체를 상징한다. 미국의 화폐는 기축통화로서 세계 모든 화폐의 비교 기준점이 된다. 미국은 강력한 시장지배력과 군사력으로 세계 곳곳에 군대를 보내 치안을 유지한다.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미국이 지구를 구하는 장면들을 영상에 담아 전세계의 스크린으로 송출한다(데리다는 영화와 게임이 사실상 인류에게 벌어질 모든 일을 예측한다고 말한다. 268p).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미국 중심의 질서가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실마리 하나가 처음으로 노출되었다. 미국이 세계질서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테러 장면은 미국 중심의 질서에 의존하는 모든 이들을 동시에 위협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9.11은 냉전시대의 (거의 마지막) 반사체고, 냉전을 벗어나서 생각할 수 없다. 미국은 과거 냉전의 우위를 점하기 위하여 아프가니스탄뿐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의 적들을 훈련시키고 무장시켰다. 테러의 주범은 물론 거기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상당수가 냉전의 시스템 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훈련받았다. 만약 우리가 테러의 역사라고 하는 것을 쓸 수 있다면, 거기 기록된 대다수가 피해자의 내부에서 키워진 자일 것이다. 완전히 외부에만 존재하는 테러리스트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자살적인 자가-면역, 이중의 자살이다. “억압이란 결국 자신이 무장 해제시키려고 하는 바로 그것을 생산하고 재생산하고 재발시킨다는 것, 우리는 이제 이 점을 알게 된 셈입니다(184p).”
테러와 투쟁이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다. 당하는 자가 테러라고 말하는 것이, 가하는 자에게는 투쟁이 된다. 한때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칭해서 우리의 피를 끓게 했던 인물이 현재 일본 총리로 앉아 있는데, 테러와 투쟁 개념이 얼마나 상대적인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하지만 9.11 당시 이러한 테러 개념의 상대성이 진지하게 논의된 바는 거의 없다. 권력은 개념을 독점한다. 당한 입장에서 적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데는 너나 할 것 없이 적극적인데, 이러한 맥락에서 테러 개념의 엄밀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9.11을 “9.11”이라고 명명하는 일은 하나의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다. 기념비란 영속적으로 견고하므로, 그것을 해체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테러 개념은 유동적이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누구를 찾아가서 총칼로 죽이는 행위만을 테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죽게 내버려 두는 것도 테러의 일종이다. 이러한 광의적 정의 아래에서, 우리는 아주 일상적으로 테러에 가담하거나 방조한다. 하지만 자신의 소극적 테러를 돌이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든 새로운 국가의 창설은 폭력에 의존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테러의 씨앗은 이미 그 순간에 심어진다. 현재 우리가 신봉해 마지않는 헌법과 헌장과 그에 수반되는 모든 법률의 체계는 테러의 조건으로서 원죄를 잉태하고 있다. 단순한 범죄는 법의 표면에서 금지한 것들을 공격하는 데 그치지만, 테러는 법이 정초된 순간, 즉 국가의 합법성 자체를 공격한다. 그래서 범죄를 기소할 수는 있지만, 테러를 기소할 수는 없다.
다양한 욕망과 배경이 뒤범벅된 세상에서, 테러의 종식이란 앞으로도 요원하다. 하지만 철학과 정치가 제 역할을 해준다면, 몇 가지 방향은 제시해 줄 수 있다. 우선, 무분별한 동질화를 피해야 한다. 동질화는 쉽지만 위험하다. 사안을 복잡하고 세세하게 해체해 보아야 한다. 이슬람 일부 세력의 테러리즘은 다수 이슬람에도 적대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국제기구는 일부 국가의 편익에 좌우되고 실행력도 지지부진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필요하다. 국제기구의 불완전성이 협의의 필요성 자체를 무력화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자기비판적-자아성찰적 민주정은 현재로서 인류가 채택할 수 있는 유일한 체제이다. 유럽이 계몽주의를 거쳐 종교적 맹신의 한계를 극복했던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관용은 기독교적 전통에서 조건부로 타자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개념으로, 최강자의 논거다. 우리가 ‘용서’에 대해서 말할 때 대부분은 관용의 전통에 머무르며, 그 연장선상에서 조건부 용서에 그치는데, 진정한 용서는 아무런 조건 없는 용서다. 조건 없는 용서만이 악을 악으로 갚는 복수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테러의 종식을 위해서는 관용이 아닌 환대로 나아가야 한다. 관용이 조건부 용서라면, 환대는 초대됐든 그렇지 않든, 일단 찾아오는 모든 이에게 마실 물과 음식과 잠자리를 내주는 것이다. 모든 주권 국가는 명확한 경계로부터 출발하므로, 환대는 주권 국가의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 이상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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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와 데리다는 서로 다른 전제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테러리즘의 시대에 계몽주의적 전통이자 근대성의 가장 위대한 유산인 합리적 논증으로 되돌아가, 이성적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데 뜻을 모았다. 그러면서 브레이크 없는 자본주의의 화신인 미국과 제정일치적 근본주의 세력들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서 유럽에 주목한다. 유럽에는 자아비판적 전통과 지적 합의의 문화가 있고, 물리적 힘과 시장도 있고, 다양성과 포용력도 있으므로, 양극으로 치닫는 갈등의 시대에 훌륭한 조정자가 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대와 당부는 유럽 지성계를 대표하던 두 철학자의 지적 책임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 문제를 제기해보자. 우리가 속한 공동체, 즉 우리나라는 무슨 역할을 감당해야 하겠는가(이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우리에 대한 기대치 자체가 전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짐작해 본다)? 우리는 이미 동시대 지구상 최고의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묘사되고 있는 공동체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심지어 핏줄과 언어를 나누고 있으며, 심지어 휴전 중이다(동시대 최고의 테러리스트 집단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동시대 헐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악당이 어느 나라 여권을 들고 다니는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90년대까지 악당들은 대부분 소련 출신이었고, 2000년대 들어서 이슬람 계열 악당들이 득세하였다. 2010년대를 넘어가면서 북한 국적의 악당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우리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는 북한을 잘 감시하고 억제하는 것만으로도 제 역할을 다 하는 것이 아닐까(그것조차 제대로 못 해내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그 점에서는 미국이나 중국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통일 이후에 북한 주민 모두를 일종의 난민으로서 동화시켜야 하는 막대한 과제를 우리의 미래 세대가 짊어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정도 기대치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우리는 남북관계나 국제관계를 떠나 우리 내부의 테러리즘도 제대로 감당해 내지 못하고 있다. 젠더, 지역, 세대, 계층 간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고,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뻔히 드러나는 갈등도 묵살하거나, 되려 부추긴다. 언론은 별것도 아닌 갈등에 소금을 뿌리고, 기껏 봉합되어가던 상처를 다시 후벼 파서 조회 수를 올린다. 갈등사회의 병폐는 연일 들려오는 강력사건 소식들로 충분히 확인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화가 나 있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
화가 나서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을 손가락질하기는 쉽지만, 왜 화가 나 있는지 물어보고 끝까지 경청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내야 한다. 원인을 치료하지 못한 상처는 안에서 곪기 때문이다. 모든 사안에 하나의 꼬리표를 달지 않고 개별적으로 보는 것, 상황을 단순화하지 않고 복잡하게 보는 것, 의사소통의 룰에 따라 합리적이고 비판적 논증으로 답을 구하는 것. 이처럼 테러리즘의 시대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는 사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던 기본 원칙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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