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유미주의자의 승리

살면서 한때나마 예술가를 꿈꾸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만약 사회적 조건이나 제약을 고려하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무엇이라도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이 존재한다면, 대다수는 락앤롤 스타가 될 것이고, 그들을 위해 음반을 사주기만 하는 사람은 소수에 그칠 것이다. 정말 고리타분해 보이는 아무개라도 예술가로서의 정체성 한 조각쯤은 마음속에 품고 산다. 재능이 남들에 못미처서, 먹고 살아야 하니까, 훈련과정을 견디기 힘들어서 등등의 이유로 좌절된 예술가의 길을 택할 뿐이다. 비약하자면,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존재한다. 예술가가 된 예술가와 차마(아직) 예술가가 되지 못한 예술가.

나도 철없던 시절에는 만화가가 되고 싶었고, 그보다 철이 조금 들고난 후에는 공연예술인을 꿈꿨다. 이제 철이 완전히 들었다고 믿게 된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극소수만이 찾아볼 법한 연구보고서를 쓰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내게도 핑계는 있었다. 타고난 재능의 괴수들이 넘쳐났고, 용모는 비루했으며, 그 어떤 조기교육도 받지 못했다. 여기저기 산발적인 재능은 분명 있었으나, 한 분야에 몰빵된 천재성과 영감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경제적인 독립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그래서 ‘예술은 취미일 때 가장 아름답다’는 시답지 않은 말을 공공연히 떠벌이며 예술 소비자로서 지위에 애써 만족했다.

‘마침내 꿈을 이룬 예술가’라는 플롯은 시대를 초월해 잘 팔린다. 최근 영화계의 예를 들자면, 「위대한 쇼맨」, 「스타 이즈 본」, 「라라랜드」가 생각난다. 이러한 플롯의 주요 소비자는 나를 비롯해 지천에 깔린 좌절된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초라한 한 영혼이 고난과 역경을 거쳐 예술가로서 우뚝 서는 과정을 대리 체험하며 희열을 느낀다. 좌절된 예술가들이 멸종되지 않는 한, 꿈을 이룬 예술가의 이야기도 계속 재생산될 것이다.

“예술가의 비밀을 캐다 보면 우리는 탐정 소설에 빠지듯 그 일에 빠지고 만다. 그 비밀은 불가해한 우주처럼, 해답을 주지 않는 수수께끼 같다.”

8p

서머싯 몸은 「달과 6펜스」에서 낭만적 천재 예술가의 전형을 그려냈다. 스트릭랜드는 실로 사회적 기준과 속박을 원천적으로 거부하고 온전히 내면의 창조적 열망에 영혼을 저당 잡힌 천재, 동시대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하고 죽어서야 비로소 신화가 된 천재, 강렬한 파토스로 이성과 논리를 뛰어넘어 새로운 시대의 기준을 제시한 천재, 강렬한 페로몬을 발산하는 남근적 화신으로서 천재, 오로지 작품으로만 증언하는 천재다. 그는 비록 살아서 성공의 단맛을 누리는 예술가의 모습은 아니지만, 평생의 열망을 담은 걸작을 완성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성취를 언젠가는 온 세상이 알아준다는 점에서 분명 성공한 예술가임은 틀림없다.

우리는 소설 속 화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의 인생에 동반하면서 그의 일탈, 기행, 위기, 성공, 그리고 비극적인 죽음과 마주한다. 그 모든 여정 가운데 천재의 파토스가 흘러넘친다. 이 소설은 출간된 지 100여 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젊은이들의 독서 모임에 오르내리는 단골 주제가 되고 있는데, 이러한 매력은 천재를 향한 인류의 변치 않는 갈망을 시사한다. 오늘날 미술작품은 신탁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의 개념, 또는 교환 가능한 상품이 되었음에도 천재를 향한 낭만주의적 갈망만큼은 좀처럼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인류가 위기에 직면했다고 느낄수록, 평범함이 미덕이라는 관념이 널리 퍼져나갈수록, 변화를 억누르려는 압박이 강해질수록 천재에 대한 갈망도 커져갈 것이다.

스트릭랜드의 삶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미학적 질문들로 가득 차 있다. 천재의 창조물을 보기 위해 우리는 어느 정도 수준의 희생을 감내할 수 있을까?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모 영화감독이 기차와 터널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인체의 특정 부위에 매우 직설적으로 비유했다가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다. 창작자가 창조적 영감 자체는 내면에서 자유롭게 형성될 수 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 설명하는 상황에서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강요받게 된다. 누군가의 입 밖으로 나온 언사에 대해, 청자는 해석과 비평의 권한을 가진다. 만약 어떤 창작자가 자신의 영감을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그 관념이 더욱 고도화되고 풍부해진다고 하자. 하지만 그 언어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해서 지적의 대상이 된다면 그 창작자는 어느 순간 입을 닫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 반복된다면 인류는 중요한 작품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천재의 기행으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를 받게 된다면 작품의 훌륭함으로 그 상처를 상쇄할 수 있겠는가? 스트릭랜드는 사회적 통념이나 이성중심적 가치관을 철저히 저버리고 완전한 자유가 됨으로써 작품의 완성에 한 걸음 다가섰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내, 연인, 후원자 등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된다. 예술가가 완전한 자유를 선택함으로써 인류는 훌륭한 작품을 얻게 되었고, 그 작품은 세계 곳곳의 박물관과 미술관에 걸려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존중받아 마땅한 실존적 주체이며, 그들이 받은 고통은 보상받을 길이 없다. 뛰어난 예술작품은 사회적 합의 위에 서는가? 감동의 총량이 상처의 총량을 넘어선다면, 작품의 과정을 문제 삼지 않아도 되는가?

“고통을 겪으면 인품이 고결해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행복이 때로 사람을 고결하게 만드는 수는 있으나 고통은 대체로 사람을 좀스럽게 만들고 앙심을 품게 만들 뿐이다.”

90p

소설은 전반에 걸쳐 한 예술가의 기행에 대한 온갖 비난을 세세히 묘사하면서도, 결국 끝에 가서는 최후의 걸작이라는 대관식을 통해 그 모든 과정을 합리화한다. 화자는 스트릭랜드 생전에 그를 윤리적으로 책망하는 위치였지만, 그 책망은 예술의 최종 승리를 보여주기 위한 반대급부로서, 설계된 통념의 재생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분명 유미주의자다. 사회적 책무보다 위대한 창조의 순간에 손을 들어주려는 저자의 태도에는 나도 공감한다. 문제는 그것을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가다. 서구의 모든 통념과 이성중심주의를 벗어 던지고, 야성과 낭만과 순수와 자유의 땅인 타히티에 몸을 던져야만 예술의 승리가 가능하다면, 그 승리는 반쪽짜리다.

우리는 공중파 방송국에서 개그 프로그램이 사라질 정도로 검열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공인된 담론과 개인의 욕망 사이의 간극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게 벌어졌다. 유미주의자의 승리는 저 멀리 타히티에서 들려온 비극적 승전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매일 같이 벌어지는 소소한 전투 가운데 쟁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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