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를 걷다가 우연히 현수막 하나를 보았다. 군에서 음악회를 개최하는데, 거기에 노래로 참여할 군민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오래전부터 여러 뮤지컬 갈라 공연이나 팝페라 무대를 보면서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노래할 기회를 막연히 동경해 왔다. 반드시 지원해야겠다 싶었다.
선곡이 쉽지 않았다. 군민들의 평균적인 음악적 소양을 고려할 때, 대중성을 우선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음역대도 고려해야 했다. 큰 무대에 서는데 꾸역꾸역 고음 처리한다고 무리수를 던지고 싶지는 않았다. 오케스트라에 맞춰야 하니 편곡 결과물이 잘 나올 수 있을지도 염두해야 했다. 생각보다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트로트, 팝페라, 뮤지컬 등 여러 대안을 검토한 끝에 “이룰 수 없는 꿈(The Impassible Dream)”을 낙점했다. 대중성은 다소 떨어질 수 있지만, 내 목소리와 톤이 잘 맞는 곡이고, 예전에 뮤지컬 동호회에서 활동할 때 많이 불러본 곡이라 별도의 연습시간을 크게 할애할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바리톤 음역대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남성 솔로곡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별도의 오디션은 없었고, 대신 노래를 영상으로 찍어서 지원서와 함께 제출해야 했다. 드럼 연습하러 종종 찾던 노아실용음악학원에 가서 동영상을 촬영했다. 배우자님께서 구도를 잘 맞춰서 녹화해줬다. 피아노가 있는 보컬 연습실을 한 시간 대여해서 녹화했는데, 한 테이크만에 끝났다. 10분 남짓 걸렸다. 목을 제대로 안 풀고 불러서 그런지 좀 칼칼한 느낌이었지만 이 정도면 됐다 싶었다. 나오면서 1시간 비용 2만 원이라도 내려고 했는데, 원장님은 너무 짧게 사용했다고 웃으며 그냥 가라고 했다. 후한 인심에 감사드린다.
제출하고 며칠 후 음악회 참가가 확정되었다고 문자가 왔다. 처음에는 문자를 보내시는 분이 오케스트라 측 실무자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지휘자님이셨다. 아무래도 작은 규모의 지역 단체다 보니 총괄과 실무를 동시에 담당하시는 듯했다. 나중에는 전화도 주셨는데, 나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며 선곡과 관련한 약간의 의견을 주셨다. 지역 행사다 보니 내가 선곡한 “이룰 수 없는 꿈” 보다는 더 대중적인 곡을 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Il Mondo”, “나를 태워라”, “지금 이 순간”을 예로 드셨다. 내가 봐서는 “Il Mondo”나 “나를 태워라”도 그다지 대중적이지는 않은데…. 아마도 오케스트라가 기존에 연습한 곡 중에서 추천해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 후로도 한 차례 더 통화하면서 선곡에 관한 의견을 나눴지만 결국 내 선택을 밀어붙였다. 그러길 잘했다.
오리엔테이션을 겸한 첫 번째 미팅은 가지 못했다. 회식과 겹쳤다. 두 번째 미팅도 가지 못했다. 그날 갑자기 몸살이 찾아왔다. 세 번째 연습 때야 비로소 참석할 수 있었다. 연습은 공연장인 진천군민회관에서 열렸고, 오케스트라는 일부 단원만 참석했다. 함께 노래하는 7명의 참가자 중에서 절반 정도밖에 보지 못했다. 순서에 맞추지 않고 먼저 온 순서대로 자기 노래만 부르고 복귀하는 식이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에 맞춰 불러 봤는데, 전주 부분 도돌이표를 살릴지 말지 약간의 혼선만 있었고, 무난하게 불렀다. 전체 구성이 아니었는데도 느낌이 좋았다. 선율에 노래가 착 감긴 느낌이었다. 휴대전화로 녹음해서 들어봤는데, 내 목소리도 평소보다 더 좋게 들렸다.
공연 전날 리허설이 한 번 더 있었고, 당일에는 사전 리허설 후 바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컨디션 관리를 위해 조금 일찍 출발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유심히 관찰했다. 공연의 전체적인 구성은 생각보다 좋았다. 박종구 님은 “잠시만 안녕”을 불렀는데, 원래 그룹사운드에서 보컬을 하시는 분이라고 들었다. 원곡 자체가 오케스트라를 염두해서 편곡된 터라 실용음악 밴드와 오케스트라의 협연이 찰떡이었다. 보컬도 리허설 때보다 훨씬 깔끔했다. “잊혀진 계절”을 연주한 김선민 연주자는 아마추어와 완전히 구별되는 프로의 품격을 제대로 보여줬다. 풍성한 호흡과 간드러진 완급조절이 일품이었다. 정대균 님은 김광석의 대표곡 두 곡을 이어서 들려줬는데, 감정의 흐름이 연주와 잘 어우러졌고, 전체 공연 분위기도 환기시켰다.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을 부른 우모심 님은 노익장을 제대로 보여줬고, 프로 수준의 무대 매너로 갈채를 이끌었다.
나는 참가자 중 마지막 무대였다. 피날레라는 점이 다소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생각 보다 떨리지는 않았다. 역시 많이 불러보고 자신 있는 노래를 선곡하길 잘했다. 노래를 부르는 과정에서도 실시간으로 반주가 다 들렸고, 객석도 온전히 보였다. 심지어 언뜻언뜻 딴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오케스트라 단원이 연주하는 가운데 내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라이브 연주에 맞추니 확실히 노래가 편했다. MR 음원에 맞춰 부르는 노래가 아무리 익숙하더라도 결국은 음원을 따라가기 급급하다면, 라이브 연주에 맞춘 노래는 반주를 리드할 수 있다. 반주를 눈치 보지 않고 내 감정과 호흡으로 곡을 이끌고 갈 수 있다. 연주와 노래가 화학적으로 잘 융합한다는 느낌이었다. 목소리 자체는 리허설 때보다 못했던 것 같지만, 상상만 했던 순간을 현실로 만든 무대였기에 노래하는 짧은 시간이 행복했다.



또 이런 좋은 기회가 찾아온다면 기꺼이 보타이를 꺼낼 것이다.
나는 54분에 나온다.
언론도 탔다. 보도자료 받아쓰기지만.. (국제뉴스, 진천타임즈, 파이낸셜뉴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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