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다듬을 때가 아니다.
미술 글쓰기(art writing)에 관한 책이 출간되면 일단 무조건 장바구니에 담는다. 지금까지 국내 시장에는 세 권이 나와 있었는데, 모두 해외 저자의 번역서였다. 길다 윌리엄스의 책은 평론, 논문, 보도자료 등 미술에 관한 다양한 형태의 글들을 포섭하는 짤막한 가이드였고, 실반 바넷의 책은 좀 더 진중한 학술적 분석과 에세이에 초점을 맞췄다. 비키 크론 애머로즈의 책은 예술가가 자기 작품에 관하여 쓸 때 참고할만한 방법론에 집중했다. 이 중에서 길다 윌리엄스의 책은 특히 유용하고 재미있었다. 주변에 두루 추천했고 선물도 했다. 그렇다면 이번 책은?
이번 책은 미술 글쓰기의 여러 장르 중에서도 전문가 집단에서 다소 벗어난, 완전히 대중적인 글에 초점을 맞추었다. 20여 년 간 미술 출판사에서 대중서 발간으로 먹고 살아온 발행인의 노하우가 담겼다. 저자 정민영이 출판사 대표로서 발간하는 미술책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특정 전문 분야에서 지적 역량을 인정받는 명사가 있다. 그 명사가 전문 미술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최근에는 후자인 경우가 많다. 그는 대체로 유럽 유학파 출신이거나 업무상 해외 출장과 연수가 잦다. 자기가 속한 전문 분야에서 꽤 젊은 나이에 뛰어난 성과를 거둔 것도 모자라, 예술에 대한 지식과 교양 수준도 상당하다. 도대체 언제 틈이 나서 그렇게 미술관을 다니고 미술 분야의 전문서적들을 탐독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오랜 시간 남몰래 갈고 닦은 자기만의 독자적인 심미안을 바탕으로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글을 써서 블로그에 게시하거나 유튜브로 팔로워들과 소통하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들의 주제는 대체로 자신의 인생을 바꾼 작가와 작품, 그리고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숭고한 미적 순간들로 요약된다. 그렇게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 삶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들이 층층이 쌓여 자의반 타의반으로 한 권의 책이 된다. 책 표지와 띠지에 굵게 강조된 SNS 팔로워 수는 저자가 비록 비전문인일지라도 미술에 관하여 이야기할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췄음을 공증한다.
정민영은 「미술 글쓰기 레시피」에서, 그리고 인터뷰로 참여한 다른 책에서도 비전문인의 대중지향적 글쓰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해왔다. 비전문인이 자신만의 스토리를 담은 감상을 보통 사람들의 언어로 전한다면 전문 학술서에 비하여 대중에게 소구할 수 있는 지점이 더 많다는 것이다. 실로 그렇다.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의 개인적이고도 내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그리고 내 눈 앞에 있는 이 작품을 남들은 어떻게 보았는지 궁금해 한다. 이러한 본능은 우리가 서로 살을 맞대기 원하는 본능만큼이나 자연스럽다. 내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욕망은 예술 창작의 동기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가는 소통의 매개체로서 작품을 내놓는다. 예술 작품에 관한 내밀한 감상을 담은 이야기는 작품과 관객 사이를 중개하고, 작가와 관객 사이를 재중개한다.
문제는 내가 이러한 부류의 감상기를 별로 안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과 지적 지향점의 문제다. 나는 남의 감상에 대해서 별로 알고 싶지 않다. 내 감상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감상보다는 합리적 근거에 바탕을 둔 날카로운 주장, 그리고 냉철한 이론화 가능성에 더 관심이 있다. 내가 내 돈 주고 ‘나의 감상기’ 부류의 책을 사 읽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렇다 보니 일반인 독자를 주로 상정하면서 지적 함의보다는 감상과 에피소드가 중심이 되는 글을 잘 쓰는 법을 알려주는 이 책이 내게는 거의 울림을 주지 않았다. 저자의 성향과 배경은 대략 알고 있었지만, 책의 무게 중심이 이토록 완전히 ‘대중적 감상기 쓰는 법’으로 쏠려 있을 줄은 몰랐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글쓰기 레시피는 교과서적인 3단 구성의 균형 잡힌 감상기를 지향한다. ‘서론-본론-결론’으로 구성되며, 지식과 감상이 적절한 균형을 이룬다. 본론 안의 단락들도 분량의 균형이 잡힌다. 묘사와 해석의 균형도 놓칠 수 없다. 제목은 전체 주제를 암시하면서 독자의 관심을 끌어당긴다. 구체적인 에피소드와 작가의 전기로 흥미와 감동을 자아낸다. 이러한 레시피에서 모범사례로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은 저자 자신의 글이다. 저자는 이 책이 전작인 「원 포인트 그림감상」의 실전편이라며, 해당 저술에서 썼던 글들을 계속 사례로 퍼 나른다. 이러한 자기 인용은 저자의 일관된 저술론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 저자가 아트북스의 발행인으로서 미술 대중서 출판 업계의 실질적인 권력 한 귀퉁이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레시피라는 완곡한 어휘로 포장된 글쓰기 노하우가 발행인인 자신의 글을 모범사례로 자기 인용할 때, 이 책은 단순한 ‘미술 글쓰기’에서 벗어나, 아트북스에서 출간을 희망하는 예비 저자를 위한 투고 가이드북이라는 비공식적 지위를 얻는다. ‘아트북스를 통해 미술 대중서를 출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 대열에 이름을 올리고 싶으신 비전문인 명사분들은 원고 제출에 앞서 이 책을 먼저 꼼꼼히 읽어보시고 작업을 가다듬으시기 바랍니다.’는 말을 그 누구도 대놓고 하지 않았지만, 이제 이 책이 세상에 나온 이상, 아트북스에 투고될 원고들은 무시할 수 없는 기준점 하나를 손에 쥔 셈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아주 미미하게나마 획일화와 정제의 조짐을 감지하며 불안감을 느낀다. 내 불안감이 기우라고 느껴진다면 묘사, 정보, 인용문이 더해져 완성도 있는 글의 모범사례로 제시된 179~181쪽의 예시문을 읽어보라! 솔직히 식상하고 재미없지 않은가?
내가 쓰고 싶은 글은 미술을 다루되, 작품 그 자체가 아닌 거기에 투영된 나 자신이나 세상에 관한 이야기다. 늘 그 자리에 있었으나 작품이 비로소 발화를 촉발한 이야기, 작품이 아니었으면 담론의 장 바깥에서 여전히 심연을 맴돌기만 했을 그런 이야기다. 완벽한 짜임새와 마감 공사로 작은 나사못 하나도 더 끼워 넣을 자리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고의 흐름이 이끄는 대로 가다 보니 어느새 진리가 촉촉이 옷자락에 스며드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다. 나는 “지옥으로 가는 길은 부사로 포장되어 있다.”는 스티븐 킹의 조언보다 “진실은 종종 잘 다듬어진 문장을 위해서 희생된다.”는 케네스 클라크의 가르침에 더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잘 차려입은 짜임새를 위해 사고의 흐름을 낱낱이 까발리는 재미와 만연체의 위태로운 긴장감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가독성(可讀性)보다는 가소성(可塑性)에 베팅하고 싶다. 횡설수설하다 삼천포로 빠졌는데 거기서 의외로 재미와 의미라는 두 마리 대물을 낚고 싶다. 허나 나 혼자서는 역부족이다. 그런 이야기들이 세상에 더 많이 나와 활자 문화가 다채로워졌으면 좋겠다.
세상은 날로 정제되고 있다.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 아름다웠던 군더더기들이 매일같이 깎이고 뜯겨 사방에 흩날린다. 언젠가부터 공공기관이 발간하는 정책연구 보고서는 죄다 개조식으로 바뀌고 있다. 나는 짐짓 뒷짐 지고 초연한 척, 객관적인 척하는 그런 글에 감동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런 글에서 왜 감동을 찾냐는 반문은 능력이 부족한 자들이 내세우는 알량한 핑계에 불과하다.) 불필요한 것은 다 쳐내라고만 하니 앙상한 가지만 바람에 흩날리며 창문을 두들긴다. 과거 긴 글의 기준이 A4용지 50장 정도였다면, 이제는 스마트폰 화면상 한 바닥 수준의 글도 긴 축에 속한다. 심지어 카드뉴스 하나로도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듯 오만방자함이 만연하다. 이런 세상에서, 정민영의 「미술 글쓰기 레시피」는 엇비슷하고 무미건조한 또 하나의 미술 감상기를 양산하는 촉매가 되지나 않을까 우려가 크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는 고만고만하게 정제된 100개의 글이 아니라 생기가 팔딱팔딱 넘쳐 흐르는 글 하나다. 지금은 이야기의 완성도를 높일 시기가 아니라 멋대로 떠들어 대는 입의 총량을 늘려야 할 때다.
공감하는 대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대중의 미술 경험을 망치고 있다는 데는 진정 공감했다. 이 말은 암기, 주입, 단일 정답 위주의 공교육이 낳은 대표적인 폐해다. 사전에 적절한 지식을 갖춰야만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이 풍요로운 예술 경험의 가능성을 일상적 삶의 궤적 밖으로 밀어내는 경우가 너무나도 잦다. 내가 아마추어 미술사 연구회를 운영하던 시절에 가장 자주 부딪혔던 회원들의 편견도 이러한 대목이었다. 무지는 미술과 더 가까워져야 할 이유일진대, 무지로 인해 도리어 미술과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웠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그 무언가를 볼 수 있게 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아는 것 외에는 보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미술이 단일한 정답으로부터 멀어져 폭넓은 해석의 장으로 점점 더 깊게 걸어 들어가고 있는 오늘날, 대중이 뿌리 깊은 정답 강박을 떨쳐버리고 해석의 유희를 온전히 즐길 수 있도록 미술제도 전반을 손봐야 한다.
※ 이 글은 YES24 주간 우수 리뷰에 선정되었다(2021.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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