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ah Charney, The Museum of Lost Art
모든 작품은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가장 영구적으로 보이는 것조차도.
작품의 의미는 고정불변의 조건이 아니다. 작가를 떠난 작품은 유동하는 의미의 세계에 내던져진다. 작품의 의미는 물리적 실재 여부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듯, 작품이 세상에 내던져진 순간부터 소멸의 운명이 작품의 어깨에 달라붙는다. 그 운명을 따라 작품의 의미는 여러 인물과 상황과 공간에 부딪혀 복제, 융기, 쪼개짐, 전이, 희석 등과 같은 온갖 화학작용을 거친 끝에 대기 중에 부유한다. 우리가 작품과 마주한 모든 순간에 부유하는 의미의 입자가 사방을 메운다.
작품은 일차적으로 그 형태와 내용에서 꿈, 욕망, 공포, 좌절과 같은 인류의 보편적 정서나 가치를 담고 있고, 그것이 손에서 손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무수한 사회적 의미들이 더해진다. 따라서 우리가 작품을 보고, 생각하고, 그것에 관하여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까닭은, 그것을 만든 인물과 시대를 알기 위함이오, 나아가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예술 작품은 오늘도 인간의 조건에 관하여 쉼 없이 말을 건넨다.
그런데 그 작품에 결원이 있다면 우리의 이해에도 구멍이 생기지 않겠는가? 노아 차니(Noah Charney)의 방대한 연구는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했다.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 온 작품 중에서 잃어버린 것은 보존되고 있는 것보다 몇 배나 많을 텐데, 잃어버린 작품에 대한 관심이나 연구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무슨 수로 연구하겠는가? 오직 잃어버린 작품만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단편적인 일부에 불과한지를 일깨운다.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의 가장 보배로운 성좌에 앉아 있는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명작들이 실상은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의 광풍 속에서 그저 우연히 살아남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빈약한 포장지만을 핥아댔던 것일까? 현존하는 작품도 다 볼 수 없는 마당에 부재하는 작품까지 포함한 전체 맥락을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앎의 불가능성이라는 불가항력적 장벽 앞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미술사의 고전이라고 널리 알려진 작품들 다수는 가장 뛰어나서 그 성좌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모진 역사의 질곡을 거치며 누군가의 헌신 덕에, 혹은 그저 우연과 행운이 겹쳐 살아남았고,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이기에 신화가 덧입혀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눈앞에 놓인 것이 전부라고, 그리고 그것이 성좌에 앉아 있는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위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가 너무나도 잦다. 원인과 결과는 자주 서로의 자리를 탐한다. 그렇기에 하나의 작품을 마주할 때, 살아남지 못한 무수한 존재를 포함한 더 큰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전쟁에서 무사히 귀환한 전사들을 위하여 손을 흔들 때, 흔적조차 없이 파묻힌 전사자를 생각해야 한다.
작품을 잃어버린 이유는 다양하다. 도난, 전쟁, 사고, 성상파괴, 반달리즘, 자연재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반면, 원래 잠깐만 존재하고 사라지도록 설계된 작품이나, 작가 자신이 직접 파괴한 작품은 일종의 의도된 부재다. 의도된 부재는 진정한 의미에서 ‘로스트 아트’는 아니다.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하지 않음이 의도되었다면, 부재하기까지의 과정이 하나의 작품이고, 그 과정은 분명 존재하기(했었기) 때문이다. ‘(an) artwork designed to disappear’쯤 되려나. 이 경우, 우리는 부재의 상실감이 아니라 부재가 빚어낸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
저자는 부재의 유형 중에서 그나마 다행인 경우로 도난을 꼽는다. 위험을 무릅쓰고 작품을 훔치는 자는 그 물건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 물건과 등가로 교환될 재화나 가치의 수준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범인은 훔친 작품을 당장 제값 받고 팔 수 없을지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언젠가 작품을 팔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나름대로 보존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 노력 속에서 언젠가 우연과 필연이 절묘하게 교차하게 된다면, 우리는 도난된 작품을 다시 마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마주함은 잃어버렸던 이야기들의 빈틈을 메울 것이다. 하지만 도난당한 작품이 제 발로 걸어 돌아오더라도, 도난의 저변에 자리한 근본적 원인, 즉 아름다움이 지닌 강력한 힘에 대해서는 성찰해야 한다.
불의의 천재지변에 의한 이별을 제외하면, 작품을 잃어버린 모든 이야기는 아름다운 작품의 위험하고도 두려운 힘을 증명한다. 한때 최고의 권력을 움켜쥐었던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왜 그렇게 많은 작품을 강탈하는데 열을 올렸을까? 빈첸초 페루자(Vincenzo Perrugia)는 왜 모나리자를 고국으로 돌려보내야겠다는 강박에 사로잡혔을까? 사보나롤라는 왜 자신이 퇴폐로 규정한 작품들을 모조리 태워버리라고 명령했을까? 소유를 향한 갈망이든, 파괴를 향한 광기든 그 내적 동기의 심연에는 아름다운 무언가를 향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뛰어난 예술 작품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아름답거나 충격적인 것을 뛰어넘어, 일종의 두려움과 경외감을 자아낸다. 유미주의자인 데이브 히키(Dave Hickey)는 아름다운 것이 언제나 영혼을 뒤흔드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고, 그 힘이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성상파괴나 검열의 원인이 되었음을 정확히 지적했다. 지독히 아름다운 무언가를 곁에 두려면, 그것이 언제든 우리의 영혼을 잠식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돈과 권력과 예술은 서로를 강하게 잡아끈다. 예술의 의미가 계속 변하면서 이 삼각관계의 중심축도 유동했지만, 근본적으로 이 삼각관계 자체가 무력화되었던 적은 없다. 이 삼각의 역학관계 속에서 아름다운 작품은 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좌와 단두대 사이를 오가야 했다. 프랑스혁명 이후로 자리 잡은 오늘날의 근대적 미술관 제도 안에서 미술사 속 위대한 명작들은 비교적 안전하게 보존되고 있는 듯 보인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보존 및 디지털아카이빙 기술은 이러한 안정감을 든든히 뒷받침한다. 하지만 거시적 안목으로 보면, 오늘날 작품들이 평온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수장고는 사실상 성좌와 단두대라는 양극단의 점이지대일 뿐이다. 그곳은 유구한 역사의 궤적에서 잠시 머무르는 휴게소이지, 항구적인 안식처가 아니다. 만약 그곳이 영원한 안식처로 보인다면 이는 우리가 평온한 시절을 살고 있다는 증거다.
저자는 로스트 아트의 다양한 유형을 모두 알려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듯, 너무나 다양한 주제들을 그저 빠르게 훑고 지나간다. 작품의 분실이나 망실과 얽힌 사연과 함의들이 무궁무진함에도, 저자는 분량의 압박 속에서 그저 유형별 사례 모음집 수준 이상으로 깊게 들어가지 못한다. 그 점이 가장 아쉽다. 남은 숙제는 역시나 오롯이 우리 독자의 몫이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