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작가상 2021 展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의 대유행에 따라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자 수는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삼청동에 자리한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이러한 위기 상황을 전혀 의식할 수 없다. 입춘을 지나 다소 주춤해진 한파에 젊은이들은 저마다 한껏 치장한 채 손에 손잡고 미술관 로비를 가득 메웠다. 저마다 생기 넘치는 표정들이 무미건조한 마스크에 가려진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작년 7월에 오픈한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은 다음 달 종료를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광클도 통하지 않을 만큼 예약이 붐빈다고 들었다. 오랜만에 직접 미술관을 찾아보니 그 열기가 넉넉히 체감된다. 미술관을 찾은 인파만 놓고 보자면 내가 서울에서 살던 시절, 코로나가 없던 그때 그 시절보다 오히려 더 미술을 향한 열기가 뜨거운 듯하다.

사람들(특히 젊은이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미술애호가가 되었나? 언론이 으레 섣불리 지레짐작하듯 코로나19로 인해 억눌린 마음을 예술의 온기로 달래려는 것인가? 누군가를 대면하고픈, 정처 없이 쏘다니고픈, 문화적 소양을 쌓고픈 욕망이 2년 동안 억눌려왔다가 이제야 봇물 터지듯 폭발하는 것인가? RM과 인스타그램과 인플루언서로 대변되는 시각예술 대중화의 촉매제들이 가시적인 변화들을 추동한 결과인가? 이유야 무엇이건 간에 미술관이 바글거리는 풍경 자체가 위안으로 다가온다. 이 바글거림은 조만간 세상이 정상궤도로 진입하리라는 것,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창작과 사유가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이 바글거림이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최정점의 제도기관에 머무르지 않고 더 많은 군소 대안공간과 갤러리, 그리고 온-오프라인의 무수한 지면으로까지 낙수효과가 나타나기 바랄 뿐이다.

「올해의 작가상」은 기본적으로 단체전이라기보다는 4개의 개인전을 묶어 놓은 큰 우산에 불과하다. 그러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고, 그런 말을 하면 아마 작가들이 몸서리칠 것이다. 그럼에도 4개의 전시를 보니 계속 한 가지 주제가 아른거린다.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다. 이 주제의식을 가장 전면에서 끌고 가는 작가는 김상진이다. 전시 제목 자체를 <비디오 게임 속 램프는 진짜 전기를 소비한다>고 직설적으로 뽑았다. 작가는 게임 속 모든 움직임이 가상세계에서 벌어지는 데이터 신호일지라도 그 메커니즘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 자체는 물리적 실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제목을 보니 얼마 전에 탄소절감을 위해 불필요한 이메일을 지우라고 요청받았던 일이 생각났다. 한낱 스팸메일 하나조차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세상에서 자기만의 공간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가상세계의 존재감이 날로 커지다 보니, 물리적 세계와 거기 발을 딛고 있는 인류마저 가상세계에 잠식되어 버릴 것이라는 위기감마저 느껴진다. 그저 밑그림으로만 존재하다가 방송이 시작되면 가상의 이미지를 덧입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크로마키의 속성에 주목한 <크로마키 그린(2021)>도 비가시적인 것이 실존을 전복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크로마키에 파묻힌 인물은 처연한 눈빛으로 관객을 응시하며 가상화와 대상화의 먹이사슬에서 누구도 진정한 의미에서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크로마키 인간의 존재감이 배경에 파묻혀 서서히 흩어져가는 것과 대조적으로, <로파이 마니페스토_클라우드 플렉스(2021)>는 몽환적인 비트의 음악과 화려한 조명으로 전시실 전체를 압도한다. 작가가 전시 관람 인증샷을 남기라고 대놓고 기획한 곳이다. 작품은 교실이라는 가장 경직적이면서도 누구에게나 익숙한 물리적 세계와 화려한 조명으로 유혹하는 가상세계의 수직적 대립으로 구성됐다. 가상세계에 몸을 반쯤 걸치고 두둥실 떠오른 군상은 현실의 문제들(예컨대, 시험 범위 같은…)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은 듯하다. 이런 상황을 두고 우리네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거이거 몸만 여기 와서 앉아 있지 정신은 순 딴 데 다 팔려 있구만?” 이때가 좋았다. 아마 조만간 몸조차도 거기 가서 앉아 있지 않을 것 같다.

오민은 <헤테로포니>라는 5채널 영상을 선보였다. 전면 3개의 화면은 무표정한 얼굴로 비밀을 간직한 듯한 여인을 담고 있으며, 좌측 1개 화면은 그 여인을 분주하게 촬영하고 있는 제작팀을 스케치한다. 전면 3개의 화면이 마주하고 있는 또 하나의 화면에는 온갖 기술적 수치로 촬영 재원에 관한 정보들이 시시각각으로 스쳐 지나간다. 3개의 화면은 하나의 대상을 담고 있는 3개의 서로 다른 시선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시차가 발생한다. 화면 간 미묘한 시차는 인물의 절제된 움직임, 그리고 미스테리한 곡조의 허밍을 통해 드러난다. 우리는 비슷하게 생긴 두 개의 눈으로 같은 대상을 바라보지만, 관점은 저마다 다르고, 시지각적으로 대상을 처리하는 경로나 속도도 제각각이다. 외관이 비슷하다는 점은 그래서 오해를 불러온다. 동질한 외관이 동질한 내면을 보장하지 않음에도 자칫 착각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곳을, 같은 시간에,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제작팀을 담는 화면은 두서없다. 카메라맨, 조명, 음향, 기술, 보조, 보조의보조, 보조의보조의보조 등이 묵묵히 각자 자신의 할 일을 해낸다. 아주 조용한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화면이므로 이들의 묵묵함은 단순한 수사에 그치지 않고 거의 숨소리조차 없는 듯하다. 어느 순간 3개의 화면을 채우던 주인공이 스태프에게 자리를 내준다. 먼저 가장 우측 화면에, 그리고 이어서 중앙 화면에도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스태프의 진중한 표정이 클로즈업된다. 이렇게 보이지 않던 존재가 어느덧 중심을 차지하면서 다중시점의 트립티크(Triptych)가 완성된다. 시간이 흘러 세 화면은 다시 주인공이 차지했지만, 관점은 이전과 사뭇 달라진 느낌이다. 이제 화면의 시차와 관점의 이질성은 더욱 벌어졌다. 드러나지 않았던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다름의 가능성은 한층 더 넓어졌다.

최찬숙은 <qbit to adam(2021)>이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 형식을 차용한 영상을 선보였다. 4개 채널에 각기 분산된 하나의 큰 영상은 바닥에 앉아서 올려 볼 수 있도록 15도 정도 기울여 졌다. 폐허가 된 광산이나 고산지대에 군집한 전파 안테나를 고해상도 드론 영상으로 촬영한 화면이 묵시록적 스펙터클을 제공한다. 땅을 특정 자본가가 소유할 수 있도록 용인한 제도적 아이러니를 시작으로, 노동력 말고는 팔 것이 없어서 땅에 귀속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거쳐, 가까운 미래에 가상세계의 유토피아가 펼쳐지더라도 온전한 주체로서의 몸을 구성할 길은 요원하다는 암울한 전망이 펼쳐진다. 여기서도 관건이 되는 것은 땅을 소유하고 개발하고 축출하고 매매할 수 있다는 우리의 알량한 믿음 저변에 가려진 진실, 즉 땅은 우리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그저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에 묵묵히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이다. 소유물이 소유주에게 되레 주인 행세를 하면 얼마나 같잖은가? 오늘도 아름답고 튼튼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세계 방방곡곡에서 광산을 파헤치는 손길은 분주하다. 우리는 제품의 매끈한 표면만 볼 뿐, 산림이 파헤쳐지고 동물이 쫓겨나고 노동자가 죽어 나가는 풍경은 보지 못한다. 보더라도 이내 외면한다. 최찬숙은 광산에서 파낸 흙더미가 벼랑 끝에서 무덤처럼 끝없이 쌓여 가는 풍경을 단색조의 강한 대비와 함께 미학적으로 담아낸다. 우리가 그 풍경을 계속 외면한다면, 그 무더기가 곧 우리의 무덤이 될 것이다.

최첨단 하이테크 설치와 영상이 판을 치고 시각예술의 장르 간 경계가 허물어져 혼종 및 교잡종이 난무하는 가운데, 회화라는 한 우물을 파는 작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일종의 ‘구색 맞추기’다. 늘 그래왔다. 그 물망에 방정아 작가가 걸려들었다. 작가는 ‘흐물흐물’이라는 키워드 아래 ‘플라스틱 생태계’와 ‘한국의 정치 풍경’이라는 두 개의 소주제로 최신 회화 작품을 걸었다. 전반적으로 키워드에 부합하게 흐물거리는 선이 두드러진 작품들이다. 선은 대상의 외형을 나타내는 윤곽선일 수도, 대상과 대상을 이어주는 네트워크일 수도, 대상을 타고 흐르는 기운일 수도 있다. 선은 대상 사이를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대상 사이를 잇는 연결이 되기도 한다. 선을 어떻게 해석하고 싶은지는 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 ‘플라스틱 생태계’에 해당하는 작품은 <플라스틱 생태계(2021)> 딱 하나다. 원자력발전소의 폐연료봉 저장 수조를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 대상을 본 적이 없는 우리로서는 그렇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여러 질감의 광목천을 덧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만든 걸개그림은 자연스럽게 민중미술의 전통과 결부되며 정치성을 내포한다. 다만 그 정치성은 명확한 지시 대상의 부재로 인해, 그리고 최찬숙의 전시를 경유하여 막다른 골목에 방정아가 자리잡음으로 인해, 심지어 그 막다른 전시실에는 바람 한 점 없고 걸개그림이 전혀 나부낄 기미를 보이지 않음으로 인해 개인적 차원에 머무른다. 다른 회화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생태적, 정치적 메시지를 내포한 작품들로 전시를 구성했지만, 소통의 가능성은 매우 낮다. 다만 <전시중입니다만(2021)> 같은 작품은 선을 쓰는 독특한 방식이나 신랄한 인물 묘사로 인해 동시대적 풍경의 신선한 사례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올해의작가상展 본 후 수상자 맞추기, 실패한 후 좌절감 맛보기’를 매년 연례행사로 해왔는데, 작년에는 전시를 보지 못해 걸렀고, 올해는 다시금 전통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김상진이 수상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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