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브라이언 윌슨의 「미술노동자: 급진적 실천과 딜레마」

“마티스를 보느라 한 시간 동안 현실로부터 분리된 관조의 시간을 갖느니 플랫폼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지는 게 낫습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보기만 하느라 눈이 멀어 있습니다.”

로버트 모리스(167p)

미술인도 노동자다. 작품을 창작하는 노동의 과정을 통해 예술가로서 자아를 실현함과 동시에 사회의 일원으로서 경제활동에 참여한다. 하지만 예술가를 노동자로 보는 관점은 일반 대중에게 생각보다 낯설고 환영받지도 못한다. 대중은 예술가가 지리멸렬한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초월한 영감과 창조의 주체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 캔버스 앞에서 몇 시간이고 골똘하며 인고의 시간을 보내는 구도자가 되어 주기를, 혹은 자기가 방금 완성한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갈갈이 찢어 버리는 폭군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재료의 원가와 자신의 향후 브랜드가치를 고려하면서 작품에 신중히 가격표를 붙이거나, 아트페어 마감 현장에서 장부를 뒤적거리는 모습 따위는 절대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존 발데사리(John Baldessari)는 “작가가 아트페어에 참관하는 것은 십대 자녀가 섹스에 한창인 부모님 침실에 불쑥 들어가는 것과 같다.”라고 했을까?

인정하기 싫더라도 미술인은 노동자다. 작품을 만들려면 쌀과 물감을 사야 한다. 어떻게든 경제활동에 참여하여 밥값을 해야 하고, 밥 사고 남은 돈으로는 재료를 사야 한다. 재료를 사고도 운 좋게 돈이 남았다면 악착같이 모아 두었다가 대관료나 작업실 임대료나 포트폴리오 인쇄비를 치러야 한다. 돈 들어갈 데가 천지다. 밀린 공과금 고지서와 학자금 대출 상환 독촉문을 펼쳐보면, 미대 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뜯어말렸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무인도에서 농사지으며 자급자족할 것이 아니라면, 선험적으로 주어진 경제 구조에 어떠한 형태로든 편입하여 당당한 일원으로서 기대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작품을 팔아서 작품의 재료를 사고, 그 재료로 또 다른 작품을 만드는 선순환 구조를 누구나 꿈꾸지만, 진정 그렇게 할 수 있는 예술가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도 이 땅의 수많은 예술가는 작품활동 틈틈이 정부 지원사업 목록을 뒤적거리고, 미술학원에서 초딩들 비위를 맞추고, 배달의민족에 접속해 콜을 대기하고, 가마솥삼겹살집에서 가마솥을 박박 닦는다. 작품을 팔지도, 알바를 뛰지도 않는 동료 예술가가 있길래 무슨 비결이 있나 좀 알아볼라치면,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가 조그마한 상가 건물 한 채를 가지고 있다나 뭐라나…

예술가가 노동자라는 사실을 왜 인정하지 못하나? 먼저 수요자의 입장을 보자. 대중에게 예술이 예술일 수 있음은 그것이 비예술과 다른 무언가일 것이라는 기대로부터 시작한다.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말이 된다. 대중은 예술이 일상의 소소한 현실과 다른 어떤 특이점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앤디 워홀(Andy Warhol)이 브릴로 상자를 예술이라고 포장했던 작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것이 실제 브릴로 상자와 똑같이 생겼더라도 예술적 맥락 안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적 오브제로 재맥락화된 브릴로 상자는 관람객에게 동시대 자본주의 시장 구조와 예술적 재현의 패러다임 전환에 대해 의미 있는 말을 건넨다. 이처럼 예술은 일상 속에서 지각하기 힘든 감각적 전율을 선사하거나, 의미 있는 사유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위대한 오브제를 창조해내는 사람들이 자신과 똑같은 노동자일 뿐이라면 예술을 예술답게 만드는 아우라가 사라지는 셈이다. 그런 일은 참을 수 없다.

공급자로서 예술가 본인은 좀 더 복잡한 입장에 선다. 예술가인 자신은 작품활동을 통해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일개 노동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대중 앞에서 ‘나는 노동자일 뿐입니다.’라는 말을 하기에는 주저한다. 그렇게 했다가는 ‘순수’ 예술가로서 제시하는 유토피아가 금세 퇴색해 버릴 것만 같다. 내 작품이 미술시장의 한갓 거래품목일 뿐이라도 작품이 지닌 상품가치 너머의 깊은 의미를 언젠가 세상이 알아줄 것이라 믿는다. 아트페어에서 몇백, 몇천만 원에 작품을 팔았다는 동료의 소식이 들려오지만, 나만은 꿋꿋이 작업실을 지키며 ‘타락천사’가 되지 말자고 다짐한다. 이 세상에 장식가와 선각자만이 존재한다면, 나는 당연히 후자여야 한다. 동시에, 노동자를 보호하는 사회적 안전망이 지속적으로 확충되는 기조 속에서 예술가를 위한 자리도 충분히 넓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내 예술 노동은 분명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이다. 다만, 그 가치를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방법을 모를 뿐…

계산기로부터 초탈한 예술가가 존재한다는 믿음, 심지어 그런 예술가가 과반수는 될 것이라는 허황된 믿음은 일종의 낭만주의적 예술가 모델을 따른다. 우리가 이름을 알만한 전근대의 예술가는 특권층의 후원을 받아 맞춤형 주문생산 방식으로 작품활동을 영위하였다. 후원이라는 단어가 은연중에 내포하는 ‘선의, 호의, 자발성’의 가치와 달리, 예술가의 손에 돈을 쥐여 주는 배경에는 특권적 사치품을 보유하려는 욕망, 나아가 하나의 작품이 담고 있는 고색창연한 주제의식을 문화적으로 전유하거나 독점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한편, 우리가 이름을 모르는 예술가들은 후원이라는 허울 좋은 계약에도 미치지 못했고, 국가적·종교적 대형 프로젝트를 위하여 한시적으로 고용된 무명의 장인으로서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았다. 교황과 절대군주가 차례로 옥좌에서 내려오는 동안 모든 권력 구조는 돈의 흐름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예술가는 가장 비실용적인 상품의 생산자가 되었다. 이 비실용적인 상품은 대다수 경제 주체가 먹고사는 문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실용적 가치도 전혀 없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잉여다. 그럼에도 특권과 아우라를 덧입고 인류 문명의 고귀한 유산으로 칭송받으며 최고가의 사치품으로 거래된다. 이 대목에서 예술 작품의 특권과 아우라를 정당화해줄 낭만주의적 예술가 모델이 득세하였다. 작품 거래의 이해당사자들은 현실의 지리멸렬한 문제로부터 초연한 채 오직 예술혼에만 사로잡힌 낭만적 단독자로서 천재를 기대하게 되었고, 학계 및 제도기관과 결탁하여 그 신화를 대중 저변 깊숙이 확산하였다. 예술가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기대에 나름의 방식으로 응했다.

예술가가 낭만적 천재의 모델에 가까워질수록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경제 주체로서 정체성은 한층 더 복잡해진다. 노동자의 권리가 전반적으로 신장하는 변화상 속에서, 예술가는 작품 생산의 노동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그 변화상의 중심에 뛰어들어야 하는지, 아니면 낭만주의적 천재라는 대중의 기대에 계속 부응하기 위하여 노동자라는 정체성과는 계속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 혼란을 겪기 시작하였다. 혹자는 예술가도 노동자일 뿐이므로 노동자 일반의 급여 및 사회보장 체계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피켓을 들었다. 혹자는 그러한 정치적 참여가 낭만주의적 천재의 모델을 파괴한다고 생각하며 짐짓 초연한 척 거리를 두고 스튜디오를 지켰다. 미국에서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이 가장 첨예하게 수면 위로 부상했던 시기는 베트남 전쟁기였다. 줄리아 브라이언 윌슨(Julia Bryan-Wilson)의 책은 바로 그때, 미술노동자라는 화두의 선봉장이었던 예술가 네 사람에 주목하였다.

칼 안드레(Carl Andre), 루시 리파드(Lucy Lippard), 한스 하케(Hans Haacke)는 1969년에 뉴욕에서 결성된 미술노동자연합(Art Wokers’ Coalition)이라는 단체의 핵심 인물이었다.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는 미술노동자연합이 주도했던 뉴욕미술파업의 아이콘이었다. 당시 미술노동자연합에 모인 예술가들은 실제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뿐만 아니라 비평가, 기획자, 큐레이터, 박제사, 복원가, 미술관 사무직 종사자 등 미술과 관계된 노동에 종사하는 모든 주체가 뜻을 합하여 노동 현실을 개선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메시지를 관철하기 바랐다. 그들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미술관을 규탄하고, 집회를 개최하고, 파업에 돌입했다. 그렇게 미술가는 낭만주의의 신비화를 벗어 던지고 블루칼라와 나란히 서서 노동의 권리를 외쳤다. 68혁명과 베트남전쟁은 예술가가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는데 더없이 좋은 기폭제가 되어 주었다.

미술노동자들의 여정은 그때야 진심이었겠지만,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모순투성이였다. 미술인은 제도 전반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하기 위하여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덧입었지만, 그들은 분명 보편적인 노동자 계층과 달라도 너무 달랐고, 여러 의제에 걸쳐 블루칼라와 동화되지 못했다. 칼 안드레와 로버트 모리스는 대형 작업을 위해 블루칼라를 고용했고, 작품 설치의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진두지휘하는 ‘백인-마초-관리자’의 모습을 수차례 보여줬지만, 정작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고용된 존재일 뿐이라는 점, 작품의 개념적 속성에 지적으로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익명의 일손 중 하나로 잊혀질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칼 안드레의 오브제는 일견 산업 현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대중적 물질로 보이지만, 실상은 고도로 기획된 산물로, 하나의 작품을 위해 특별 주문된 것이며, 당대 예술가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던 반전의 메시지와 달리 전쟁물자로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던 대기업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 건축적 산물의 생생한 스펙터클을 경험하도록 의도되었던 로버트 모리스의 설치는 안전과 물리적 설비의 제약으로 인하여 또 다른 관조와 소외를 낳았다(167p). 얼기설기 뒤엉킨 재료를 통해 우연성과 과정을 강조하려는 시도도 치밀한 계획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168p). 무엇보다도 미술파업의 전면에 섰던 예술가들은 반전과 파업의 기치를 내걸고 노동자들과 연대함으로써 공감대를 확장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정작 노동자들이 1970년에 ‘안전모 폭동’을 일으키며 반전세력을 적대시한 순간, 그러한 믿음이 얼마나 순진했던 것인지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소외된 자들이라면 어느 정도 동질한 유토피아를 품고 있으리라는 기대는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가? 세상은, 욕망은, 그리고 유토피아를 향해 걸어가는 과정은 동질할 수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동질성에 대한 헛된 기대와 착각은 소외된 자들을 분열시켜 무력화하려는 자들의 먹잇감이 된다.

“나는 미술 자체가 정치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거나 미술을 정치적 맥락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술인들이 미술을 다루는 방식, 그들이 작품을 제작하는 장소, 성공할 확률을 비롯해 어떻게 작품을 선보이며 누구에게 선보이는지 하는 모두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의 일부분이자 정치적 상황이다.”

루시 리파드(260p)

그렇다. 모든 미술인이 정치적일 필요는 없지만 모든 미술인은 정치적 상황에 놓여 있다. 아무리 세상을 초월한 관조적 예술가라 할지라도 현 상황이 어떠한 정치적 알력관계의 결과물인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자기 아버지 소유의 건물 한 귀퉁이에 스튜디오를 차린 게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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