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m Meecham & Julie Sheldon, Modern Art: A Critical Introduction
우리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다원주의가 충분히 보장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다원주의의 본질은 여러 생각과 파편화된 개인이 그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내가 옳은 만큼 남도 옳다. 18세기에 살롱전을 드나들던 디드로(Denis Diderot)는 계몽주의적 가치를 바탕으로 이 작품 저 작품의 우열을 가릴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각자 공통으로 품고 있는 단일한 가치가 없으며, 여러 가치를 줄 세울 기준도 없다. 모두가 옳다. 모두가 저마다 독특한 가치를 지닌다. 이제 비평은 작품을 줄 세우지 않고 그저 각자의 의미를 되새겨줄 뿐이다.
이런 다원주의 시대의 확립이 반가운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엄밀히 따져 생명의 본질에는 어긋나는 면이 있다고 본다. 모든 생명체는 어떻게든 자신의 짝짓기 역량을 입증해야 하고, 입증에 성공한 자만이 유전자를 퍼뜨릴 자격을 얻는다. 우리는 이러한 생명의 본질에 따라 매순간 타자를 줄 세우고, 동시에 누군가로부터 줄 세움 당하는 대상이 된다. 생명의 본질이 줄 세우기를 강요하는 동안 다원주의의 철학은 모두를 동등하게 대우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한 점에서 다원주의 시대는 생명의 본질과 세상의 요구 간의 내적 갈등, 그 위태로운 외줄타기가 최고조의 긴장감에 다다른 시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시대의 초상을 하나 그려보자: 테이트 모던(Tate Modern)에서 ‘음.. 이 작품도 좋고, 이 작품도 좋네..’라고 고루한 평을 친구와 주고받던 한 인물이 맨체스터 더비가 시작할 시간이 되자 성급히 미술관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펍에 들러 맥주를 한 병 시키고 축구 중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상대팀에 저주 섞인 망발을 퍼붓는다. 쌓였던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는 것을 느낀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작품을 논해야 할까? 누구도 정답을 얘기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우리는 그저 각자 자신의 사상이나 가치관을 작품에 투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담론 중 어떤 것은 많은 공감을 얻고, 어떤 것은 그저 하나의 공허한 외침으로 사라진다. 성공한 담론을 만든 것이 발화자의 권위인지, 논리적 완벽함인지, 표현의 아름다움인지, 발화 시점이나 방법의 적절함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누군가 성공하고 다른 누군가는 실패한다는 사실이다. 이 얘기는 담론뿐 아니라 작품 자체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어떤 작품은 성공하고, 어떤 작품은 실패한다. 디드로의 시대와 비교하면 고려해야 할 변수와 기준이 엄청나게 다양하고 복잡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함부로 성패의 원인을 결론짓지 못하고, 끝없는 주장만 되풀이한다. 주장하려면 공부해야 한다. 어쩌면 동시대 다원주의는 출판업계와 대학이 우리에게 계속 공부하라며 부추기기 위한 공모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
미첨(Pam Meecham)과 셸던(Julie Sheldon)의 책도 그러한 공모의 흔한 산물 중 하나다. 하지만 현대미술의 복잡함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상당하며 논의의 수준은 높은 편이다. 현대미술을 특정한 사조에 따라 연대기적으로 풀어나가면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서는 작품의 주제별로 묶고 있다. 기념비, 은둔자, 누드, 기계미학, 퍼포먼스, 전시질서 등 동시대성을 정의할 수 있는 핵심적인 주제들을 중심으로 동시대가 모더니즘 시대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 준다. 그러면서 새로운 가치가 절대적 진리나 최종적 유토피아가 아닐 수 있음을 계속 일깨운다. 단순히 특정한 이론이나 주장들의 되풀이에 그치지 않고 논쟁이 불거질 수 있는 지점들을 표면화시키면서 대립하는 양측을 균형감 있게 서술하고 있다. ‘Critical Introduction’이라는 원제를 밋밋하게 ‘현대미술의 이해’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이 책의 진정한 매력은 ‘Critical’에서 온다.
모더니스트는 보편적 진리가 존재할 것이라고 상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표면을 보여 주고 강조한다. 그것이 전부라고 말한다. 하나의 ‘-주의’를 내세우고, 이내 그것을 새로운 ‘-주의’로 대체한다. 하지만 “여러 ‘-주의’의 역사로 미술사를 서술할 경우에 작가의 삶 중 가장 흥미로운 지점, 특히 외설적이거나 비극적인 사건이 부각되며, 이를 통해 한 개인이 실제로 행한 사회적 정치적 참여를 향한 투쟁은 그저 낭만적인 시각으로 기록될 뿐이다(35p).” 이처럼 모든 예술가는 훌륭한 개인이지만 동시에 특정한 사회 구조의 산물이기도 하다. 완전한 자율적 존재, 낭만적 천재, 단독자로서 예술가는 환상에 불과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일깨운 교훈을 하나만 꼽자면, 그것은 미술이 작품 표면상의 혁신을 넘어선 무언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고, 미술관 밖의 일상적 삶에 관해 의미 있는 화두를 던질 수 있다는 점이다.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는 “나는 미술이 미술관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무언가가 되기를 원한다(305p).”고 말했다는데, 그의 바람은 그 자신에 의해서라기보다 그의 동료와 후배들에 의해서 어느 정도 분명한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미술이 사회적 목소리와 사치재로 양극화되어 가고 있는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성취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토대이자 전복 대상이 된 모더니즘을 균형감 있게 평가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한 점에서 현재 품절된 이 책은 썩 괜찮은 길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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