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다 노클린의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Linda Nochlin(1971),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가리키는 곳을 보지 말고 그 손가락을 분질러라

「아트뉴스」 紙 1971년 1월호에 실렸던 에세이다. 미술사와 미술비평을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글이다. 그만큼 많이 인용된다. 만약 본인이 미술사를 공부했는데도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이라는 이름이 생소하다면 자신의 식견이 68혁명 이전 어딘가, 심지어 반 고흐의 노란집 어느 귀퉁이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미술에 관하여 뭔가를 쓰려고 하는 자가 페미니즘에 살짝 발가락이라도 걸칠라치면 “린다 노클린 曰”을 피해갈 도리가 없다. 본격적인 페미니즘 비평이 시작된 글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인용되는 글의 특징은 그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사람이 정작 별로 없다는 것이다. 고전의 정의 자체가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안 읽은 책’이라고 하지 않나? 그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실 나부터도 이 에세이를 읽은 적이 없었지만, 누구보다 꼼꼼히 읽은 척하면서 인용할 자신은 있었다. 그럴 수 있었지만 그래도 양심이 있기에, 이번에 출간된 50주년 기념 에디션의 번역본을 놓치지 않고 책장에 꽂아 두었다.

책은 크게 세 파트로 구성되었다. 중심이 되는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만 실으면 소책자 분량조차 나오기 어려우므로, 캐서린 그랜트의 머리글이 서두를 열고, 말미에는 2006년에 저자가 30주년 기념으로 저술한 후기 성격의 짧은 에세이도 한데 묶었다. 이 최근 글에서, 평생을 페미니즘 비평에 헌신한 저자는 기념비적 에세이를 작성한 1970년대와 오늘날을 비교해보며 얼마나 많은 진보가 있었는지를 감격적으로 상기한다. 진심인지 형식적인 안배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이제 미술계 전반에 걸쳐 페미니즘, 퀴어, 다양성의 논의가 모든 의제의 한 꼭지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고, 페미니즘이 주류 미술사에 편입된 차원을 넘어, 역으로 남성 미술가들과 주류 미술제도에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과 영감이 지대한 변화의 촉매로 작용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는 것이다. 겸손한 저자는 그러한 변화의 출발선상에서 자신의 허를 찌르는 에세이가 진지하고도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을 굳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남긴 공헌을 충분히 알고 있다. 노클린은 파묻힌, 아니 오해로 점철된 관점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 연대의 장을 마련했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만연한 어떤 질문에 그가 적절한 답을 내려서 성공을 거뒀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핵심은 답에 있지 않다. 오히려 해묵은 질문과 함께 어딘가를 가리키는 손가락 자체를 분질러 버렸기 때문에 효과가 발현되었다.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라는 질문에 ‘아냐,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왜 없어, 저 위대한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를 봐’라던지, ‘넌 지금 위대함이라는 단어를 편협하게 정의하고 있군. 진정한 위대함은 이렇고 저런 가치란 말이야’라고 답한다면, 우리는 그 답과 함께 질문이 가리키는 전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 개싸움을 펼치게 된다. 그 개싸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개털뿐이다. 논쟁의 본질에 다다라 뭔가 하나라도 생산성에 이르고자 한다면, 질문이 발을 딛고 있는 복잡한 구조와 맥락, 나아가 기초적 전제들을 파고들어 저의를 의심해야 한다. 노클린은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나올 수 없었던 부계 세습 사회의 가부장제, 교육훈련 기회의 불공정성, 명문화된 제도의 압력과 그 제도를 둘러싼 갑절의 문화적 압력을 돌이켜 봤고, 구체적 실례로서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적이 설정한 전장을 뒤집어 생산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새로운 영토를 제시한 것이다.

노클린의 성공은 판을 뒤엎는 복합적이면서 맥락적인 사고의 필요성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 누군가가 당신의 실패를 지적하며 손가락질한다면, 그러한 지적이 튀어나오게 된 배경과 저의를 낱낱이 까발리면서 그 손가락을 과감히 분질러라. 적이 깔아 놓은 멍석을 걷어찬 후 생산적인 논쟁의 장을 새로 깔아라. 적이 초대에 응하면 좋고, 응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광범위한 시공간을 망라한 복합적 인과관계의 사슬이 머릿속에 들어차 있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가질 수 있는 거라면 누구나 노클린이 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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