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 키이우, 이태원 : 타인의 고통

“부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Susan Sontag(2003),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무더위 속에서 이 책을 읽고 이제야 글로 정리한다. 진작 썼어야 하는 데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덧 낙엽이 쌓인다. 먹고 살기 위한 글에 쫓기다 보면 사적으로 쓰는 글도 일처럼 느껴진다. 미뤄뒀던 글감이 어떤 사건을 만나 구체적 형상을 입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일이 오늘 벌어졌다.

수잔 손택(Susan Sontag)은 타인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에, 그것을 어떻게 생산하고, 보고, 유통해야 하는지에 관한 자기 생각을 이 책에 눌러 담았다. 그의 주장은 늘 구체적인 사례들, 실재하는 이미지들과 결부되어 있다. 독자로서 우리는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며 자기가 경험한 최근의 사례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이 책을 읽던 여름에 내 마음속에서 종종 소환되었던 비근한 사례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던 사건이었다. 2022년 2월에 시작된 그 비극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이제는 해를 넘길 것으로 보인다.

비극이 시작되었던 그때, 세계 유수의 매체들은 여느 때처럼 현장의 모습을 실어 나르기에 바빴다. 황량한 우크라이나 국토를 휘젓는 Z표식의 장갑차, 반파되어 철근-콘크리트 골조를 드러낸 건물들, 피로와 슬픔이 뒤엉킨 눈빛으로 폴란드 국경을 넘는 난민들… 모든 비극의 장면들은 최신의 통신기술과 구석구석 보급된 고화소의 렌즈들을 힘입어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전세계의 안방으로, 또 각자의 손바닥 위로 전송되었다.

다양한 보도 이미지 중에서도 내가 가장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던 콘텐츠는 MBC가 유튜브에 실시간 스트리밍 방식으로 올렸던 <끝까지LIVE>라는 코너였다. 이 화면에서, 전면에는 키이우 광장의 현재 전경을 담은 CCTV 화면이 송출된다. 좌하단에는 MBC가 러시아 침공을 특보 형태로 보도한 화면이 ‘화면 속 화면’으로 담겼다. 이 뉴스는 TV 보도를 실시간으로 띄워주는 것이 아닌, 이미 방영된 특보를 일정 구간 잘라 반복재생하는 형태로 보인다. 보도 화면에는 온갖 섬광과 포격음이 반복되고, 앵커와 리포터와 안보전문가 들은 긴박한 상황임을 강조하는 리포트를 쉴새 없이 쏟아낸다. 그러나 이 보도는 어디까지나 ‘화면 속 화면’일 뿐이다. 진짜 중요한 것, MBC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화면 전체를 채우고 있는 키이우 광장의 현재 모습이다. 광장의 지평선 너머로 안개 혹은 연기가 뿌옇고 차량의 왕래는 드물어 스산한 느낌이다. 저 먼 곳 어딘가에서 쿵쾅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하지만 평상시와 무엇이 다른지, 침공으로 인해 이 장면의 무엇이 특별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그것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평시의 키이우’에 대한 충분한 사전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우크라이나의 수도를 이해하는 평균적인 수준은 딱 그 정도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콘텐츠가 노골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전시의 키이우가 평소와 달리 이렇게 바뀌었으니 눈 여겨 보시오’가 아니다. <끝까지LIVE> 제작진은 분명 자신들이 생중계하는 키이우 광장에 당장이라도 무언가 어마어마한 큰일이 벌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당장 벌어지지 않더라도, 조만간 벌어질 것이니 이 콘텐츠에서 눈을 떼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참을성 없는 누군가가 눈을 뗄 수도 있으니, 그동안 심심하지 말라고 애써 만들어둔 격양된 특보를 ‘화면 속 화면’으로 끼워파는 섬세함도 잊지 않았다. 이제 <끝까지LIVE>를 틀어 놓고 밥을 먹고 있는 우리는 당장이라도 키이우에 대량 폭격이 쏟아지기를 끝까지 기다리는 공모자가 되었다.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 실은 에세이들을 통해 주장하고자 했던 바는 간단하다.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 싶은 우리의 본원적 욕망, 자본과 정치권력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즐기는 미디어 산업의 구조, 객관적으로 존재했던(혹은 존재했을 것으로 강력히 추정되는) 무언가를 쏘아(shoot) 영구적인 이미지로 확증하며 객관성이라는 과분한 아우라를 덧입는 사진의 메카니즘, 날로 발전하는 이미지 생산 및 전송의 기술력 등을 고려할 때, 타인의 고통을 다룬 이미지들에 더 자주, 더 깊게 노출되는 경향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런 이미지들을 다루는 방법과 윤리학에 대하여 충분한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며, 가능하다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대중의 문해력을 높일 방안도 필요하다.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되며, 그 경중을 멋대로 평가해서도 안 된다. 그런 이미지를 생산하고 전송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그 이미지의 대상이 되는 존재를 향한 최소한의 맥락적 예의를 갖춰야 한다. 실존하는 고통의 이미지를 그저 하나의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에서 벗어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을 둘러싼 사회구조적 문제들까지 등한시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고통을 당한 사람을 향한 따뜻한 마음을 갖는 동시에, 그 고통을 구조적 혹은 영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찾고, 올바른 정치적 의사결정에 어떤 방법으로든 적극 참여해야 한다. 이 모든 주장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부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223p).”

어젯밤에 이태원에서 또 하나의 큰 비극이 벌어졌다. 지난밤에 거기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고, 상투적인 뉴스거리라고만 생각했다. 그 정도야 매년 있었던 일이니 그러려니 하고 손흥민 경기를 본 후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깨서야 비보를 구체적으로 접했다. 아침 식사를 하며 여느 때처럼 유튜브에 “뉴스”라는 검색어를 쳐보니 아니나 다를까 <끝까지LIVE>가 다시 시작됐다. 메인 화면에는 녹사평역 CCTV를 통해 바라본 이태원 대로가 펼쳐져 있고, 화면의 중앙 위쪽으로 구급차와 경찰차 몇 대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사상자 후송은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는지 거리는 고요하다. 고요한 거리와 달리 좌하단의 ‘화면 속 화면’은 거리로, 병원으로, 대통령실로 분주하게 움직인다. 후송이 완료된 거리를 비추는 <끝까지LIVE> 제작진은 어떤 새로운 시각적 스펙타클을 기대하고 있나? 지하에 봉인된 거대괴수가 아스팔트를 뚫고 솟구치기라도 바라고 있는 것일까? 이 화면을 보고 있는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나? 아니, 무엇을 기대하기를 요구받고 있나?

이처럼 ‘화면’과 ‘화면 속 화면’은 서로 그 지위를 바꾸기도 한다.

자극적 이미지의 파노라마에 매몰되어 있을 시간이 없다.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서서,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고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요구해야 한다.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한 지역의 좁은 골목길에 몰리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런 충분히 예측가능한 상황에 대해 누군가는 사전에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현실적 대응책을 내놓았어야 한다. 핼러윈에 젊은이들이 이태원에 모여든 상황 자체가 특정한 ‘주최측’이 없는 시민들의 자발적 유동의 결과라는 사실 정도는 누구나 안다. 주최측이라는 명확한 책임소재가 부재하므로, 행정 관서에 공문을 보내 의료진이나 교통통제 인력의 파견을 요구할 주체가 없다는 것, 그리고 재난안전 주무 부처와 산하 조직이 그러한 파견을 지시할 의무가 없다는 것도 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요청하지 않아도 예측하고 준비하는 것은 행정의 당연한 의무라기보다 적극행정의 영역에 속한다. 적극행정은 그 원리상 잘하면 칭찬받고, 안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민의식은 고양되었고, 행정력도 고도화되었으며, 최근 몇 년간 정부의 적극적 역할에 대한 기대치도 어느 때보다 커진 상황이다. 적극행정을 선택하지 않은 결과가 행정적 비효율 정도라면 우리는 적극행정을 선택하지 않은 자를 크게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적극행정을 선택하지 않은 결과가 청년 153명의 목숨이라면, 이제 적극행정이라는 선택은 단순한 옵션의 범위를 초과하여 권력을 위임한 시민사회의 강력한 명령이 된다. 인파가 몰릴 것이 뻔한 곳에 미리 통제인력을 보낼 생각을 왜 아무도 못 한 것일까? 10~20미터 간격으로 경찰이 한 명씩만 배치되어 서로 무전하면서 유동 인구의 방향만 통제해 줬더라도 우리는 153명의 청년을 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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