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보다 무서운 정신적 노숙
“‘집’은 결국 물리적 또는 경제적 의미와는 별개로 정서적 함축성을 지닌 단어이다.”
토머스 소얼(225p)
집은 집이로되, 집이 아닌 시대다. 집은 단순히 사람이 들어가 사는 구조물도 아니고, 움직일 수 없는 고가의 재산도 아니고, 행복하고 단란한 보금자리도 아니다. 집은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집은 모든 재산의 층위를 압도하는 가장 강력한 권위를 지닌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집은 부당하게 신화화되고 있고, 본연의 가치라고 우리가 은연중에 믿고 있었던 어떤 영역으로부터 점점 떨어져 나가고 있다. 집은 모든 욕망과 가치와 꿈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고 있다. 이게 모든 문제의 원인인지, 혹은 온갖 문제가 이러한 결과를 야기한 것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오늘날 우리 삶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뉘는데, 첫째는 요람에서 나와 집을 얻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시기이고, 둘째는 집값을 갚기 위해 아등바등하다 무덤에 들어가는 시기다.
신경인류학자인 존 S. 앨런(John S. Allen)은 진화와 뇌과학의 이론을 총동원하여 집의 의미와 기원, 그리고 동시대적 가치를 규명하였다. 그의 연구를 요약하자면, 인류는 일개 유인원 수준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인지적 혁명의 태동기로부터 여타의 동물들과 달리 집의 특별한 가치에 주목하면서 그것을 발전시켜 나갔다. 인류 초기의 집은 오늘날 유인원이 나뭇가지를 엮거나 큰 잎사귀들을 바닥에 겹쳐 깔아 하루 혹은 며칠간의 임시 잠자리를 마련하는 수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호모속의 주거지에는 화로를 중심으로 취사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며, 눈과 비를 피할 수 있었고, 작업과 휴식을 병행할 수 있었다. 하나의 주거지는 가족이나 이웃의 주거지와 연결되어 집단의 생활권을 형성하였고, 소집단을 하나로 이어주는 의례, 예컨대 장례나 제의 같은 절차도 주거지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정신의 발달이 이러한 집을 가능하게 한 것인지, 안정적인 주거지의 형성이 정신의 발달을 촉발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안정적 주거지의 발전과 종으로서 호모속의 지배력 확대는 상호보완적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인다. 즉, 인류는 안정적인 주거지의 발전을 통해 생존력과 번식력을 확충할 수 있었고, 호모속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진화하는 과정은 집의 발전을 이끌었다.
이처럼 집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틀이다. 우리가 집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 소중함을 잊는 순간에도 집의 가치는 퇴색되지 않는다. 집은 온갖 자극으로 충만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거의 유일하게 멍한 시간을 허락한다(그 한 줌 정도 되는 시간으로부터도 벗어나려 애를 쓴다는 게 문제지만). 긴장을 풀어주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항상성을 유지하게 도와준다. 우리는 삶을 위한 분투 속에서 흩어지고 부서져 버린 정신의 파편들을 집으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다시 꿰맨다. 저자는 이러한 집의 기능, 그리고 집에서 느끼는 정신과 감각의 상태를 집느낌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집느낌은 여행지의 특급호텔에서는 채울 수 없는, 오직 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정신적 상태이다.
우리는 집이 마치 공기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탓에 그것의 소중함을 종종 잊는다. 집의 소중함은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문제들을 접할 때 비로소 체감된다. 저자는 현대적 의미에서 집이 없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사례로 노숙인, 위탁아동, 조현병, 저장장애 등 네 가지 유형을 든다. 노숙인은 스스로 집을 거부했거나, 주택제도라는 울타리에서 거부되어 집 없이 길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위탁 아동은 친부모라는 우산에서 의도치 않게 벗어나 공적 시설이나 임시보호 가정에 맡겨진 아이들이다. 조현병 환자는 번듯한 집이 있더라도 정신이 그곳을 종종 탈주하여 집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태가 되곤 한다. 치매 환자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는다. 저장장애는 집을 과도하게 물건으로 가득 채우면서 정작 자신은 집이 주는 안락함에서 밀려나는 현상인데, 주로 정서적 상실감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고령층을 대상으로 발현되곤 한다. 최근 고령화와 핵가족화가 저장장애를 급격하게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처럼 집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 노력에 대한 기대치도 높아지고 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신자유주의의 열매를 탐스럽게 맺은 부자나라일수록 집이 없는 사람들에 관한 병리적 문제가 심화하는 양상이다. 미국 주택도시개발부에 따르면, 2020년의 미국 노숙자 수는 58만 명으로, 전년 대비 2.2% 증가하였으며, 4년 연속으로 증가세가 유지되고 있다(출처). 나도 시차를 두고 워싱턴, 뉴욕, 샌프란시스코를 짧게 둘러봤지만, 미국의 노숙자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집이 주거 본연의 기능이 아닌, 경제적 욕망의 종착역 역할을 떠맡는 경향이 심화될수록 정상궤도의 집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증가할 것이다. 집을 소유해야만 안정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며, 사회적 관계에서 밀려나지 않을 수 있고, 부동산 가격은 언젠가 반드시 올라가기 마련이라는 믿음이 기형적인 부동산 시장을 형성하고 있지만, 이러한 현실은 하루아침에 짠하고 도래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스멀스멀 똬리를 틀고 앉은 현실을 묵도하며 이게 정상이겠거니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간다. 부동산 문제는 나라님이 아니라 그 할애비라도 해결 못 한다는 것이 이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충분히 입증되었다. 집은 무조건 소유해야 하고, 그 집은 가능한 한 번듯해야 하고, 내 돈으로 소유할 수 없다면 최대한의 금융상품을 끌어들여 미래의 소득과 꿈과 희망과 건강까지 저당 잡힐만한 가치가 있다는 신화는 금융업과 건설업과 정치지도자들의 카르텔이 만들어낸 밈(meme)에 불과하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지 말자. 부추겨진 불안감을 실존적 불안감과 구분하자. 이제 불세출의 영웅이 등장해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자. 누가 듣건 말건 ‘이건 정상이 아니다,’라고 미친 듯이 되뇌는 보통사람들이 늘어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나도 여기 미약한 먼지 한 톨을 쌓는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이 책은 학술적 객관성에 대한 지나친 강박으로 논점이 흐리멍텅해지는 지점이 많아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내 삶을 돌아보게 만든 지점은 있었으니, ‘정신적 노숙’ 상태에 대한 언급이었다. 정신적 노숙은 분명 집이 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집에서 안락감, 애착, 휴식 등 본연의 기능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예컨대 학대받는 아이는 외형적으로는 멀쩡한 가정에서 잘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속내는 가정에 돌아가더라도 의지할 곳이 없이 불안하고 겉도는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에 장기간 놓여 있는 “아이들은 적극적으로 반사회적(예를 들어 너무 과민하거나 이중적이거나 불필요하게 반박하는)이 되거나 무분별한 애착을 형성하기 쉽다.”(269p) 이 말이 내 심장을 푹 찌르고 들어왔다. 나도 나 자신이 왜 어쭙잖게 반사회적 태도를 취했는지, 왜 무분별한 애착에 과도하게 집착했는지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그 배경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학술적 개념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정신적 노숙’. 이 개념 하나만으로도 내가 줄곧 자책했던 내면의 문제들에 대한 원인의 큰 줄기가 규명되는 기분이다. 집에 머무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그토록 스스로 다그치며 밖으로 돌기만 했던 시간들이 사실은 정신적 노숙의 일종이었다니. 지난날의 나를 조금은 가여워 해줘도 될는지.
너무 늦었지만,
내게 아무런 선택권 없이 그저 주어졌던,
정신적 노숙은 끝났으니,
이제는 그저 지금 여기를,
머물고 싶은 가정으로 꾸려나가는 일에만 신경쓰련다.
조현병 환자의 집 문제는 제도개선도 필요한 것 중 하나에요. 조현병 환자는 법적으로 의사무능력자라 많은 것에 제약이 있거나 금지되어 있는데, 주택거래도 그 중 하나거든요. 조현병인데 가족이 없거나 등등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십중팔구 노숙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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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적 안전망이 필요해 보이네요. 의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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