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혼돈에서 사후생으로: 양은영의 2022년 회화

예술가는 자신의 눈으로 본 세상을 작품의 형태로 투사한다. 그 작품은 미술계, 혹은 그 울타리 밖 더 넓은 세상의 한 가운데에 놓여 소통의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작품이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는 그 소통이 성공할지, 혹은 실패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많은 예술가가 그 성공의 여부에 관심이 없다는 듯 짐짓 초연한 표정으로 작업실을 지키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소통의 가능성이 완전히 거세된 작품을 만들고 싶은 예술가는 아무도 없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 자체에서 순수한 쾌감을 느끼는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그 쾌감의 시간은 작품을 매개로 하는 소통의 가능성을 부지부식간에 전제하고 있다. “미술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려 하고 원리상으로도 미술은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영역이다.”[1] 따라서 어느 예술가가 ‘내 작품에 관심을 꺼줘’라고 외친다면 그 말은 ‘내 작품을 내가 의도한 대로만 봐줘, 그러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닥쳐줘’라고 해석해야 한다. 소통의 가능성은 예술 창작의 모든 순간에 기저를 이룬다.

양은영 작가는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잊히고 밀려난 존재들을 수면 위로 부상시켜 재맥락화하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 아닌 프로’의 세계에 내던져진 직후 한동안은 치밀하고 섬세한 필치로 소외된 공간과 대상을 위한 작은 기념비를 세우는 노동집약적 작업에 몰두하였다. 당시 작가가 주로 시간을 할애했던 드로잉 작업에서는 연필의 가느다란 선으로 한올한올 울렁거리는 면을 쌓아 올리는 적층식 화면이 두드러졌고, 그 지난한 과정은 한편으로 장인적이기까지 했다.

반면, 대학원에 진학한 후인 최근 1년 이내의 회화 작업에서는 여전히 같은 주제의식을 다루면서도 전혀 다른 구성을 채택하였다. 작가가 인상 깊게 본 자연물, 인공물, 동물, 인물 따위가 어지럽게 배열되어 있다. 각각의 개체들을 캔버스에 직접 그리기도 하고, 다른 매체에 그리거나 프린트한 후 오려내 붙이기도 했다. 붙여진 개체와 그려진 개체들이 한 화면에서 맥락 없이 뒤섞이며 혼돈 속에서 기묘한 상호작용을 이룬다. ‘공존할 수 없는 대상의 공존’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데페이즈망(dépaysement)과도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작가가 창출한 개체들은 묘사보다 인상에 더 가깝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주관적 감수성의 거친 병합 과정에서 창출되는 예상치 못한 화학반응을 유도하는 일종의 카오스적 실험이다.

예술가가 구성적 완결성에 집착하다 보면 작품은 점차 닫힌 생태계가 되어가고 비평적 개입의 여지는 축소된다. 한편 의미론적으로 충분히 열려 있는 작품은 다양한 해석과 담론을 부추김으로써 비평을 촉진하고 사후생(死後生)으로 이어진다. 작품이 소통의 매개체이자 의미의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후자로의 이행은 가치가 있으며, 양은영 작가가 최근 선보이는 작품들도 그러한 점에서 의미 있는 변화일 수 있다. 하지만 이때 가장 중요한 대목은 누군가가 그 작품을 보면서 하나라도 의미 있는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 만한 이유, 쉽게 말해 작품을 볼만한 이유가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가 단순히 ‘최근 내 마음을 사로잡은 대상이 이런 것들이니, 이것들을 여기저기 배치하면 사람들도 그 이유를 대충이나마 알아주겠지’라는 생각은 다소 안일하다. 적어도 인터넷 없는 무인도에서 평생 혼자 작품활동을 하다 사라질 것이 아니라면, 혼란스럽게 배치된 오브제들이 알아서 의미의 화학작용을 촉진할 것이라는 ‘행복회로’에서 벗어나 한순간이라도 관객의 눈에 빙의해봄으로써 의도적이면서도 유도된 배치를 설계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손쉬운 방법은 시선을 잡아끄는 강렬하고도 지배적인 오브제를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시선의 흐름을 단박에 가져오는 구상일 것이다. 양은영 작가의 최근 작품에서 그러한 구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살아서>에서는 중앙의 돌탑과 물고기가, <장면의 조합2>에서는 반라의 여인이, <장면의 조합1>에서는 비둘기 6형제가 중심축을 형성하면서 점차 주변부로 사유의 확장을 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원형의 캔버스로 구성된 <Chaos1>와 <Chaos2>에서는 지배적 오브제가 분명하지 않다. 모든 개체는 캔버스의 윤곽을 따라 빙글빙글 돈다. 그래서 시선은 어느 한 지점에 진득하니 머무르거나 연쇄적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여러 개체들을 훑다가 이내 다음 작품을 찾아 떠난다. <살아서>의 중심축도 그렇게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하고 있다. 윤곽선을 연두색으로 강조하며 이것이 작품의 주제임을 강조하고는 있으나, 다른 개체와 확연한 이질성이 느껴질 정도의 표현적 개성은 충분히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강렬하고 지배적인 오브제를 배치하는 것이 속보이고 유치하다고 느껴진다면, 누구나 알법한 무언가를 배치함으로써 거기에서부터 소통의 물꼬를 트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현재 작가가 배치한 개체들은 나름의 세계관 속에서 고유한 의미들을 품은 채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 의미는 예술가의 심연에서 길어낸 것이므로 온전히 관객에게 전달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한 전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작품 주변부의 언어로 부연하거나, 모든 의미는 관객이 알아서 해석하라는 식의 자유방임주의를 채택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방법들은 하책이거나 무책임하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작가의 이야기와 관객의 이야기를 뒤섞는 방식, 혹은 적어도 작가의 이야기 속에 관객의 작은 이야기 하나쯤 슬쩍 끼워 놓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술가의 심연에서 길어낸 오브제들 속에 관객들이 보고 싶어 하고 즉각적으로 관심을 가질만한 무언가를 하나쯤 슬쩍 끼워 넣는다고 해서 예술의 순수성이 파괴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대상은 관객으로 하여금 예술가의 작품 세계 속으로 걸어들어오게 만드는 관문이 될 수 있고, 작품이 탄생한 시공간적 맥락을 표지해 줄 수도 있다. 역사 속의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본인이 그리고 싶은 것과 대중이 보고 싶어 하는 것 사이에서 절묘한 외줄타기를 성공적으로 견뎌낸 인물들이 아니었던가? 아, 물론 그중 일부는 당대 대중이 아닌, 후대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그리는 일에 더 소질이 있어서 살아생전에 고생깨나 했지만.


[1] 우도 쿨터만(2002), 「미술사의 역사」, 문예출판사, 김수현 역, 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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