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이 시대적 화두가 된 세상에서, 그것을 거스르려는 조그마한 움직임일지라도 조리돌림을 각오해야 한다. ‘민주주의=절대선’이라는 제국주의적으로 강요된 등식에 다양성이 무비판적으로 침습되면서 단순한 의견이나 취향의 표명마저도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자연스럽게 비평의 영토까지 침범한다.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비평은 편파적이고 열의에 차고 정치적이어야 한다.”[1]는 것이 기존의 패러다임이었다면, 이제는 “모든 것에 좋은 이유가 하나 이상은 있을 것이다. 고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비평의 새로운 덕목으로 자리잡고 있다. 비평으로 먹고산다는 사람들은 오늘도 대로변 스타벅스 창가에 앉아 맥북을 열고, 하찮은 존재들을 어떻게든 정당화해주려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새로운 미감이 부상하고, 다원주의가 조류가 되었다 한들, 취향이 사라진 시대란 존재할 수 없다. 누구나 자신의 취향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을 말할 수 있고,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이 다원주의의 유토피아다. 취향을 말하면 자칫 누군가 상처받을까 속으로 곪기만 하는 세상이 유토피아일 리는 없다. 지금 누군가가 취향을 이야기했는데 비난을 받고 있다면, 그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다. 첫째, 말하는 태도가 글러 먹었다. 둘째, 그 취향에 공감하는 사람이 절대다수다. 이 두 번째 이유가 사실은 매우 중요하고 첨예한 대목인데, 우리는 절대다수가 싫어하는 무언가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싫다고 말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규제한다. 그 싫다는 언급이 쌓이고 쌓여 부당한 계층화로 이어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다수가 싫어하는 그 대상이 선험적·생물학적 차원에서 정말로 싫어할 수밖에 없게 세팅된 대상인지, 혹은 후천적·사회적 학습의 결과로 부당하고 억울하게 미움을 받는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의 취향과 미감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규명된 바는 여전히 그 정도로 허접한 수준이다. 무언가를 왜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그렇게 명쾌하게 규명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비평가들이 스타벅스로 출퇴근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비평가들이 아니므로, 그저 굳게 입을 다무는 길을 택한다.
이채은은 뚱뚱한 인물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논쟁적인 작업을 하고 있다. 뚱뚱한 인물은 미술사에서 단 한 번도 주인공이 되어 본 적이 없으므로 우리에게 생경함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이 왜 내 눈앞에 서 있는지 질문을 던지게 한다. 티치아노의 비너스 앞에서는 한 번도 꺼내 본 적 없던 질문이다. 이 대목에서 루벤스의 회화를 예로 들면서 뚱뚱한 인물도 주인공이 되어 본 적이 있다고 누군가가 반문한다면, 그는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다. 명백하게도, 루벤스가 그린 인물들은 ‘충분히’ 뚱뚱하지 않다. 혹자는 페르난도 보테로를 예로 들면서 이 정도면 충분히 뚱뚱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미안하지만 또다시 명백하게도, 보테로는 미술사의 중심에 서 본 적이 없다. 그가 흥미로운 패러디의 감각과 대중성을 지닌 훌륭한 예술가라고 할지라도. 또 다른 반례를 찾기 위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까지 가는 사람이 없길 바라지만, 만약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우리는 그 조각상이 진짜 예술의 범주에 들어오는 오브제인지조차도 알지 못한다고. 다시 말해 우리가 익숙한 ‘백인-남성-서구-회화’ 중심의 미술사 내러티브에서 뚱뚱한 인물이 중심에 서 본 적이 없으므로, 의도와 무관하게 그 내러티브에 자기동일시를 해 온 우리에게 이채은의 회화는 논쟁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작가가 스스로 창조해낸 뚱뚱한 인물들을 응원하는지, 비난하는지, 동일시하는지, 경계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추론할 수 있는 바는 현대 사회가 육체에 가하는 집요하고도 정형화된 규제의 억압 속에서, 대한민국의 첨예한 도시문화의 중심에 서 있는 ‘청년-여성’으로서 작가가 느끼는 답답함과 불안감이 작품의 기저를 이루리라는 점이다. 아멜리아 존스는 “몸의 재현이 표면에 부상하는 방식이야말로 시각 이미지와 오브제를 제작하고 지켜보는 우리 욕망의 배후에 자리한 가장 기초적인 동인”[2]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작가의 내면과 외부적 세상을 연결하는 접점의 인터페이스로서 몸이 유발하는 유동적인 감정들이 뚱뚱한 인물의 일렁이는 지방층 굴곡 사이사이에 배여 있을 것이다. 특히 <유유자적>과 <멍>은 세부적인 묘사가 거세된 이상화된 풍경 속에서 오직 자연과 인간만이 존재하는 초현실적 장면으로 표현되었는데, 이것은 마치 사르트르가 그토록 닿고 싶었던 타인의 시선이 배제된 세상, 오직 자연에의 동화를 통한 충일감으로만 가득한 세상에 대한 작가의 비전을 암시한다. 회화와 연계하여 배치된 조소 소품들도 배척되기 쉬운 존재들이 어떻게서든 압력을 버티고 견뎌내면서 사회적 규범의 틀에 자신을 맞춰가려는 몸부림을 보여주며 애처로운 공감을 산다.
이채은의 인물들은 뚱뚱하다는 공통분모 외에 외형적인 개별성이 극히 미미하다. 성별, 연령대, 직업, 취향 등이 수수께끼이며, 인물의 배경과 성향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줄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이 부재하다는 점에서 익명성이 더욱 강조된다. 그래서 이 인물들은 ‘누구나’가 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처럼 작품에 몰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누군가의 내밀한 속사정을 들으며 공감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무색무취의 그저 또 하나의 기호로 전락할 우려도 있다.
무명의 존재들이라는 이채은의 접근과 반대 방향에 있는 작품으로, 루시안 프로이드의 <Benefits Supervisor Sleeping(1995)>을 떠올릴 수 있다. 이 작품이 생존작가 최고 경매가를 경신했던 사건은 뚱뚱한 인물이 미술사의 중심에 섰던 극히 예외적이면서도 짧았던 한순간이기도 했다. 이 작품도 이채은과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다소 뚱뚱하다는 것 말고는 대체로 평범한 한 인물의 적나라한 육체를 다루지만, 표현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프로이드가 평범한 사람들을 꿰뚫어 보는 시선은 매우 날카롭다.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는 수식어는 구태의연하지만 일견 과장은 아니다. 그는 상처 입기 쉬운 영혼들을 적나라하게 탐구하며 기묘한 불안감을 자극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저런 시선으로 봐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율배반적인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거친 돼지털 붓으로 촘촘히 찍어내어 살결을 쌓아 올린 터치는 화면을 뚫고 나올 듯 강렬한데, 그 난삽한 묘사로 인해 인간의 실존에 더욱 가까워진다는 느낌을 준다. 인간 본연의 불완전성과 닮았기 때문이다.
익명적 기호가 된 인물들의 배열을 통해 공감과 동일시를 불러오는 것도 좋지만, 실제 인물을 앞에 두고, 깊은 관계를 맺고,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화폭에 담아내는 방식도 소재의 스펙트럼을 확장한다는 차원에서 의미 있는 시도일 수 있다.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과 실시간으로 호흡하며 그려내는 과정은 고정된 이미지를 화폭에 옮기는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섬세한) 관객은 캔버스 너머에서 펼쳐진 작가와 모델 사이의 호흡을 부지부식 간에 느낀다. 그렇게 유토피아와 실존이 충돌할 때 벌어질 예측불허의 화학작용은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내러티브를 이끌어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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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audelaire, C.(1846), The Salon of 1846, Paris: Michel Lévy Frères.
[2] Jones, A.(2003), “Body”, in the Nelson, R. S., and Shiff, R.(eds.), Critical Terms for Art History, 2nd Editio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홍지석 역, 「꼭 읽어야 할 예술 비평용어 31선」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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