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won Kwon(2002), One Place after Another
“장소에 묶인 정체성을 탐구하는 것은 교환, 이동, 소통의 공간적 장애가 줄어들고 있는 세계에서 덜 중요하기보다는 더 중요하게 되었다.”
데이비드 하비(254p)
작품이 의미를 갖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는 작품이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가 되는 방식이다. 작품은 하나의 독립된 완성체로서 모든 의미를 그 안에 내포한다. 한마디로 자족적이다. 스스로 살아 숨 쉰다. 두 번째 방식은 작품이 특정한 공간에 존재함으로 인하여 비로소 온전한 의미를 갖는 경우이다. 이때 작품은 공간을 참조하고, 침투하고, 경유하고, 투사하고, 흡수한다. 이처럼 작품이 공간과의 관계를 통해 의미가 작동할 때 ‘장소 특정적’이라고 말한다. ‘장소 특정적’이라는 말에서 ‘장소’는 비단 물리적 실체로서 공간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장소는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이고, 그 세상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배경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작품이 장소와 공명하며 의미를 만들어 낼 때, 작품이 가리키는 공간은 필연적으로 환경, 사람, 문화, 공동체, 제도 따위의 복잡한 맥락을 동반하고 나온다. 따라서 장소를 바라보는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장소를 둘러싼 삶의 양태들을 향해 가지를 쳐나간다.
첫 번째 방식을 모더니즘적이라고, 두 번째 방식을 포스트모더니즘적이라고 한다면 정확한 뭉뚱그림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확함보다는 섬세함이 낫다. 우리는 장소 특정적 미술이 왜 대두되었는지,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삶에 무엇을 더해 줄 수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지향해 나가야 하는지를 섬세하게 묻는 쪽을 택해야 한다. 권미원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가장 섬세하게 접근한 편에 속한다.

장소 특정적 미술의 개념은 초기의 공공미술의 흐름을 통해 구체화할 수 있다. 미국에서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활발했던 공공미술의 개념은 ‘공공장소 속의 미술’이라는 모델이었다. 광장, 관청 앞, 공원 등 공공장소에 시선을 잡아끄는 강력한 미적 오브제를 설치하고, 그것을 통해 대중을 미학적으로 계도하며, 관광 자원으로 자리매김하여 경제적 성과까지 거두고자 하는 모델이다. 이때 주로 동원된 작품은 저명한 남성 모더니스트 예술가의 남근적 거대 추상조각이었다. 화이트큐브의 좌대 위에 놓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작품을 그대로 몸집만 키워서 광장에 덩그러니 놓는 방식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추상미술의 혁명을 선도한 미국의 승리를 물리적 규모로 예증하는 것 같았고, 일부는 관광객의 유치나 경제적 효과의 창출에도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장소와 동떨어져 우뚝 선 조각은 그 지역만의 고유한 이야기와 공명하지 못했다. 자족적 오브제는 그것을 만들어 낸 조각가와 후원자를 신화화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지역성과 결부된 새로운 의미에 도달하지 못했고, 거리를 오가는 무수한 행인들은 의미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소외되었다.
이러한 1세대 모델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대안적 모델이 부상하였는데, ‘공공공간으로서의 미술’이었다. 미술이 공간과 동떨어져 홀로 우뚝 서 있기보다는 공간 자체에 융화되어 보통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쓸모있는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지점에서 미술가들은 건축가나 도시기획자와 한 팀을 이뤄 ‘작품으로서의 공간’, ‘공간으로서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러한 대안적 모델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스콧 버튼(Scott Burton)은 “공동체의 사회적 가치들이 이제 더욱 중요하다. 사무 노동자들이 점심시간에 뭘 할거냐가 내가 나의 자기표현의 한계를 밀고 나가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113p).”라며 자기 사명을 노출했는데, 이는 모더니스트로서 자족적 작품 세계를 탐험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의미 없는 일이라는 철학을 보여준다. 하지만 공공 시설물로서 벤치, 테이블, 그늘, 멘홀 뚜껑이 된 기능주의적 미술이 그저 건축의 도구나 부품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에 대한 회의도 제기되었다.
이처럼 물리적 물질로서 공공미술이 주변 공간과 실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가라는 관점의 양극단에 모더니즘과 기능주의가 있다. 한편, 장소와 공동체를 연결 짓는 방법으로는 ‘통합’과 ‘개입’으로 나눠볼 수 있다. 공동체의 긍정적인 지향점이나 가치를 하나의 물질로 승화시켜 형상화함으로써 결속을 다지고자 하는 입장이 통합이라면, 장소가 공동체에 갖는 의미의 간과된 논쟁적 측면들을 물리적으로 부상시켜 새로운 사고의 흐름을 촉발하려는 입장이 개입이다. 저자는 통합의 예시로 존 에이헌(John Ahearn)의 ‘사우스 브롱스 조각 공원 프로젝트(1991)’를, 개입의 예시로 그 유명한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기울어진 호(1981-1989)>를 꼽았다. 브롱스 조각 공원 프로젝트는 공동체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으면서도 다소 소외된 이웃을 재발견하려는 프로젝트였으나, 공동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견해 차이(정확하게는 인종적 위계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아 좌초되었다. <기울어진 호>는 작품을 통해 인위적으로 구현된 불편함이 국가 권력에 의해 용인된 보편타당한 가치들을 재고하게끔 유도하는 프로젝트였고, 작품의 설치와 해체를 둘러싼 다양한 논쟁과 법정 공방이 공공미술에 대한 논의의 차원을 한층 두텁게 만들었으나, 궁극적으로 작품 자체는 해체라는 원치 않았던 결과를 맞닥뜨리게 된 사건이었다. 세라는 “나는 현실에 순응하거나 공모하는 미술에는 흥미가 없다(120p).”라며 개입적 공공미술의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공간에 현존하는 물리적 실체로서 공공미술은 추구하는 기능 및 가치 차원의 방향성이 제아무리 이상적일지라도 결국에는 그것이 너무나 쉽게 모두의 눈에 띈다는 점에서 누군가를 분노케 하는 지점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그 지점에서 작품의 운명은 의도치 않았던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이것은 오늘날 다원주의 사회의 숙명이다. 공공미술에 관한 나의 지론을 다시 소환하자면,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어”. 오늘날 우리의 공공장소에는 모두를 애써 만족시켜보기 위한 애매하고 무미건조하고 식상하고 밋밋한 결과물만이 즐비하다.
지금까지 공공미술이 실패한 원인이 물리적 오브제에 집착했기 때문이라면 또 다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현재까지는 1980년대 말에 수잔 레이시(Suzanne Lacy)에 의해 이론화된 개념인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이 그 대안의 유력한 후보 자리에 앉아 있다(사실 미술적 경향에 대한 이 같은 명명법은 특정한 방향성을 전혀 내포하지 않고 오직 신규성만을 강조하고 있어서 적절하지는 않아 보인다).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은 물질에서 벗어나 공동체의 이익에 초점을 맞춘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공동체에 주목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작품으로 풀어낸다. 물리적 오브제의 완성보다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 그리고 그 작품이 사회적으로 작동하며 소통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이때 미술가는 작품의 창작자라기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회운동가에 더 가깝다. “일반적으로 미술가란 심미적 오브제를 만드는 사람이었지만, 이제 그들은 기획자, 교육자, 코디네이터이자 행정관료이다(81p).”
그런데 물질로부터 벗어나서 공동체와 함께 현실의 대안들을 논하면 될 줄 알았던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의 움직임도 20년쯤(권미원이 이 책을 쓴 시점인 2000년대 초 기준) 지나고 보니 예기치 못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우선, 공동체의 개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소외된 공동체를 거론하지만, 그 공동체가 진정한 의미에서 소외되었는지, 그들보다 더 소외된 하위 공동체는 없는지, 그 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다른 공동체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은 아닌지 쉽사리 판단할 수 없다. 더 중요한 문제는 한 공동체 안에서도 문제를 다루는 대안은 구성원마다 각기 다를 수 있고, ‘단일 공동체-단일 작품’의 모델에서는 해당 공동체의 우두머리가 지배적인 의견을 내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모든 이해관계의 충돌은 공동체의 이익을 명분으로 소환하기 마련인데, 여기에는 좌파와 우파의 구분이 없다. 가진 자도 없는 자도 사회의 이익을 위한다고 말한다. 여당도 야당도 국민을 위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각각의 주장에 대해 공리주의적 계산기를 두드려 각 주장의 진위를 가릴 방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체에 대한 착취와 식민화의 가능성도 열려 있다. 특정한 배경과 목적을 지닌 공동체의 맥락을 면밀하게 고려하지 않고 제도 편의주의적인 관점에서 일반화시키는 방법론으로 접근할 경우, 공동체는 무색무취하고 일반화된 하나의 모델에 수렴되어 결과적으로 미술가와 제도 기관의 명성에만 기여하고 끝날 수 있다. 이때 공동체와 미술가의 권력 차이가 문제가 된다. 저자의 예시에 따르면, 프로젝트 이전부터 견고하게 존재했던 공동체의 경우 그나마 미술가와 대등하게 협상할 수 있다. 하지만 미술가가 프로젝트를 위해 만들어낸 공동체의 경우에는 현재 상황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가 어렵고 프로젝트 과정의 전반적 의사결정이 미술가의 리더십에 크게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미술가는 공동체에 많은 권한을 위임하는 제스처를 취하지만, “처음부터 권위를 가진 사람들만이 무언가를 위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말하자면 위임이라는 행위는 그 자체가 권위의 행위인 것이다(192p).” 이때 제도 기관이나 미술가의 부적절한 동기, 기대, 투사 등이 개입되면 공동체의 이익보다는 미술 제도를 위한 프로젝트, 작가의 명성을 위한 프로젝트로 변질될 우려도 있다. 특히, 제도 기관은 가장 혁신적일 때조차도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의 한계를 분명하게 설정하는 경향이 있고, 그러한 경향이 공동체의 원초적 기대를 왜곡할 우려가 상존한다. Critical Art Ensemble이 지적하였듯, “결실을 얻기 위해서 관료주의에 의존하는 미술 작업(말하자면, 공동체 기반 미술을 포함한, 제도적으로 승인된 공공미술)은 너무 잘 길들여져 있어 어떤 논쟁적인 힘도 갖지 못한다. 결국 작업들은 오직 위계와 합리적 질서를 재확인하는 굴종의 행위가 된다(247p).” 이러한 상황들이 맞물릴 때,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중장기적인 자생력을 갖추지 못하고 일회적 푸닥거리로 끝난다.
가장 큰 문제는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이 공동체와 참여자들에게 미술을 통한 감정적 분출구로서만 기능하고 구조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실효적인 작동을 못 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물론 미적 활동을 통해 자기의 목소리를 되찾고, 억눌렸던 감정을 해소하는 것은 예술을 통해 누릴 수 있는 긍정적인 변화이며, 예술 본연의 가치가 구현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하지만 참여자가 감정적으로 나아졌다고 해서 현실의 상황들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더욱 구체적인 실천들이 필요하다.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은 감정적 분출구를 찾았다는 느낌에서 만족을 얻고 거기서 멈추는 것이다. 그러한 활동은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고 사회 구조를 향했던 시선을 오히려 잦아들게 할 우려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은 오히려 견고한 권력기관을 도와주는 반동적 작업이 될 것이다.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이 직면하는 이같은 난제들은 대부분 공동체의 불가능성에서 기인한다. 앞서 말했듯, 주변적인 존재로 평가받는 어떤 공동체도 다른 공동체나 특정한 개인에게는 ‘중심’으로 평가될 수 있다. 또한, 공동체 내에도 무수한 개인이 존재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공동체의 의견이라는 것은 결국 공동체 대표나 몇몇 소수자의 의견일 가능성이 크다. 장 뤽 낭시(Jean-Luc Nancy)는 이러한 공동체의 정체성에 대해 “진정한 공동성이란 없다. 공동의 존재도 없다. 그러나 공동 내의 존재는 있다(249p).”라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따라서 “질문해야 할 것은 공동체의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공동체여야 한다.” 공동체를 바라보는 순간에조차 우리는 이질성과 개별성을 늘 한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 데리다(Jacques Derrida)가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동체라는 이 말 자체부터 나는 구역질이 난다.”라고 일갈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권미원의 대안은 매우 간단하고 그래서 다소 허무하다. 하지만 특정한 경향에 속하는 모든 작가에게 일반론적인 방향성만을 제시할 수 있는 이론가로서 허무함이라는 낙인은 즐거이 감수할만한 것이리라. 권미원의 대안은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인정하고, 관통하고, 넘어서라는 것이다.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어.”라는 말을 가슴팍에 새기고 노골화하면서 돌진하라는 것이다. 공동체의 비일관성, 모호함,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자기 정당성을 의문시할 때 비로소 진실에 가까워지고 생산적인 대안이 나올 수 있다. 이것은 작가에게도, 공동체에도, 제도기관에도 모두 적용되는 원리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동질화시키는 모더니즘에 저항하면서 지역성과 역사성을 상기해야 한다. 여러 지역을 두루 유목하며 일관된 작업으로 작가적 명성을 쌓으려는 욕망도 좋지만, 그 와중에도 누군가의 항구적 삶의 터전으로서 특정 장소의 특수성에는 세심하게 주목해야 한다. 이는 유목과 정착 사이에서 대립과 갈등의 조건들을 폭넓게 이해하고, 균형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대목에서 작가가 저술의 제목으로 내건 문장이 ‘제안하고 싶은 바람직한 방향’이 아닌 ‘이렇게 되곤 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라는 투라는 점이 이색적이다. 우리는 통상 전자의 견지에서 제목을 정하지 않는가? 하지만 권미원은 제목이 은연중에 가리키는 방향을 역으로 틀어 한 장소, 그리고 또 다른 장소에서 연거푸 등가적인 접근이 펼쳐지는 상황들을 경계하면서 오히려 여러 상황과 맥락이 제시하는 불균형한 조건들을 세심하게 주목하라고 강조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무분별한 침범에 맞서, 개인과 공동체의 자존감을 지키고, 지역의 역사성과 특수성을 굳건히 옹립하며, 나아가 현실의 사회경제 구조까지 실효적으로 변화시키는 이른바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의 유토피아에 진입할 수 있을까? 물론 몇몇 예술가들의 애처로운 몸부림이 그러한 유토피아의 도래를 촉진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저 해 보는 것이다.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으므로.
공공미술 담론에서 권미원이 자주 인용되는 것은 알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이유를 알겠다. 공공미술의 흐름을 간명하게 꿰어 냈고, 적재적소에 정확한 사례와 인용을 배치하여 다양한 쟁점을 효과적으로 표면화했다. 또한, 단순한 정리에서 그치지 않고 야심찬 이론화의 가능성까지 열어 뒀다. 비물질적 공공미술 따위는 팬시한 사회복지 프로그램과 무엇이 다르냐는 식으로 같잖게 보는 인식이 팽배한 나 같은 유미주의자마저도 설득했으니 상당히 좋은 저술임이 분명하다. 이제는 미국의 사례를 넘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다소 이질적인 공공미술의 흐름이 궁금하다. 특히 한국에서 애증의 공공미술을 둘러싼 웃지 못할 해프닝들, 랜드마크와 따로 노는 기이한 형체의 조각들, 예술가-제도-대중 사이의 갈등과 좌절, 그리고 허망한 타협과 안주의 결과물 등에 대해서도 누군가 날카롭게 분석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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