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화된 이야기가 없는 세상은 오지 않겠지만
❚ 망각과 미화
손원평의 첫 번째 소설집에는 온통 가슴이 답답해지는 이야기뿐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은 나의 아픔을 이해해 주지 못하거나(「4월의 눈」), 애초부터 평생 나를 무시만 해온 인간이거나(「zip」), 아예 상상을 뛰어넘는 괴물이다(「괴물들」).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더라도 타인을 향한 순수한 선의는 천추의 한으로 돌아오고(「상자 속의 남자」), 세대와 민족 간 혐오는 극에 달해 일대 전쟁을 목전에 두고 있으며(「아리아드네 정원」), 한 분야에서 경지에 이른 대가는 자라나는 새싹을 키우지 못할망정 도리어 그 새싹을 잘라 자기 배를 불린다(「문학이란 무엇인가」).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응원했던 인물이 종국에 행복해졌는지, 혹은 앞으로 행복해질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괴물들」의 ‘여자’는 괴물들에 잠식된 여생을 살아갈 것 같다. 「zip」의 ‘영화’는 ‘기한’에게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손주를 돌보며 ‘zip’에 갇힌 삶을 이어간다. 「아리아드네 정원」의 ‘민아’는 거대한 전쟁을 목전에 두고 있고, 아마도 지금까지 그녀가 겪어본 모든 고통을 뛰어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타인의 집」의 ‘나’에게 내집마련의 꿈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다. 그나마 「상자 속의 남자」의 ‘나’는 형이 구해줬던 소녀를 통해 일말의 희망이라도 봤다. 그러나 그의 삶이 상하차와 간병 사이의 고된 외줄타기에서 벗어나리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작품 속 보통사람들이 보여주듯, 누구든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문제는 대처의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자기 능력의 범위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상황을 직시하고 적극적으로 극복해 나가겠지만, 도저히 손 쓸 수 없는 수준의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면 망각이나 합리화 같은 소극적인 회피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거를 미화하거나 아예 망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얼핏 보면 비겁해 보이지만, 실상 우리네 삶을 지탱해주는 독특한 정신적 생존기술에 가깝다. 그 능력이 없었다면 무수한 밤이 회한의 눈물로 가득 찼을지 모른다. 과거를 윤색함으로써 진실로부터 다소 멀어지더라도 결국에는 어떻게든 버티고 꿋꿋이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매 순간 최선을 다하더라도 의도치 않게 비극은 찾아오고, 선택의 갈림길에서 무언가를 택해야 하고, 정신을 차려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수렁 한가운데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 순간에 망각과 미화는 의도치 않은 수렁으로부터 오늘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
❚ 세 단편
손원평의 몇몇 작품들은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망각과 미화가 작동하는 현실적인 맥락들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4월의 눈」에서 부부는 먼 나라에서 온 낯선 손님에게까지 현실의 지리멸렬한 갈등을 보일 필요는 없다며 손님맞이에 최선을 다한다. 손님을 들이고, 먹이고, 재우는 일상적 수고로움 속에서 부부가 직면한 갈등은 잠시나마 잊힌다. 아니, 후 순위로 밀려난다. 그리고 오늘의 비극을 낳은 시발점인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세기의 러브스토리로 미화된다. 매일 수많은 연인을 직업적으로 대면한 까닭에 진실한 사랑의 감별사를 자처했던 손님까지도 속아 넘어갈 정도로 그 미화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부부의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표면화된 한순간, 망각과 미화로 점철되어 위태롭게 유지되던 부부 관계는 마지막 끈을 놓아 버린다. 때아닌 4월의 눈이 녹아내린 자리에 그간 은폐되었던 세상의 온갖 지저분함이 추한 몰골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처럼, 그렇게 미화되고 은폐됐던 관계의 끝은 결국 파국이라는 예정된 결론에 다다랐다.
「zip」의 ‘영화’는 질곡의 세월 끝에 마지막 도피처로 망각과 미화를 선택한 인물이다. 그녀는 영특하고 다정했던 ‘기한’을 만나 불꽃 같은 열애 끝에 가정을 꾸리지만, 황혼에 접어들어 돌이켜보니 그 결혼생활은 노골적인 무시와 정서적 학대 속에서 하루하루 버텨온 삶에 불과했다. ‘기한’은 첫 만남부터 풍요롭고 화목한 가정, 그리고 그 가정을 품는 물리적 조건으로서 우주(宇宙)로 상징되는 집이라는 이상향을 제시했다. ‘정상가정’이라는 유토피아는 ‘영화’의 오랜 꿈이었지만, 그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너무나 컸다. 그 괴리감이 임계 수준을 벗어나는 순간, 그녀는 ‘기한’과 함께할 미래를 자기 손으로 파괴할 수밖에 없었다.
괴물의 예상치 못한 부재는 그 괴물에 대한 기억을 미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마치 집권 당시 온갖 부정부패 시비에 시달렸던 전직 대통령의 묘비 앞에 민주주의의 거성이라는 찬사만 남듯이.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기한’은 어느덧 썩 괜찮았던 사람으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기억과 감정이 용해되고 닳아”갔다(93p). 그와 완전히 척을 지고 살았던 아들은 심지어 “아버진 정말 좋은 분이셨어”라고 회상했다. 아들의 미화된 기억을 이해할 수 없었고 오히려 두려움마저 느꼈던 ‘영화’도 결국에는 미화된 이야기를 통해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존재가 된다. 너무나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예쁜 집을 꾸미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의 아이를 돌보고……. ‘영화’는 손녀의 눈동자에서 작은 희망을 봤지만, 여전히 ‘기한’이 설정한 울타리인 집(zip)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미화된 이야기는 표면상 손녀의 요청으로 촉발되었지만, 결국 자기 삶을 지탱해야만 하는 이유를 자기 손에 직접 쥐여 주기 위한 투쟁에 가까웠다. ‘영화’가 집(zip)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 이야기는 계속 재생산되면서 언젠가 진실의 자리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
미화된 이야기는 「아리아드네 정원」에서도 중요한 축을 차지한다. 한때 잘 나갔던 ‘민아’는 의도와 달리 변해 가는 세상에서 서서히 도태되었고, 노인들을 위한 격리 시설에서 무료하고도 불안한 나날을 견디는 처지가 되었다. 유닛A에서 유닛D까지 순차적으로 밀려난 현시점에서 그녀는 언젠가 유닛F로 밀려나 무기력하게 죽음만을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그녀는 유일한 친구인 ‘지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말동무 파트너인 ‘유리’와 ‘아인’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들은 저출산과 노동력 부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수혈된 이민자들의 후손으로, 세대갈등과 인종갈등의 사다리에서도 가장 하층부에 자리 잡은 존재들이다. 그런 그들과 서류상 가족을 맺고 유닛F로 밀려나기 전에 존엄한 안락사를 직접 선택하는 것이 ‘민아’의 마지막 소망이다.
‘민아’는 그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준다. 격리 시설이 없던 세상, 환경문제가 그리 심각하지 않던 세상, 세대와 인종 간 갈등이 그리 첨예하지 않던 세상, 어디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고 누구든 만나서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세상을 들려준다. 그런 이야기가 세 사람을 가족으로 엮어 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민자의 후손들은 ‘민아’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유닛을 파괴하고 청년들의 세상을 이룩하는 혁명에 가담할 생각이었다. 그 계획은 과거의 ‘민아’를 소환한다. 이민자 추방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청년기의 자신을 다시금 마주한 ‘민아’가 이민자의 후손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제 전혀 달라졌다. 이민자의 후손들은 잠재적 가족이 아니라 혐오스러운 이방인으로 보인다. 하지만 ‘민아’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본심과 달리 여전히 “아름다운 노을, 어디선가 들은 신비로운 이야기”에 머물러 있다(133p). 그 이야기는 현재 무너져 내린 꿈이 영혼마저 산산조각내버리는 것을 조금이나마 지연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끝내 파국을 막을 수 없다. 이 지점에서 미화된 이야기는 무기력한 도피처에 불과하다.
❚ 미화된 이야기가 없는 세상은 오지 않겠지만
세 단편에서 비극에 대한 의도된 망각, 그리고 미화된 이야기가 담당하는 기능은 조금씩 다르다. 「4월의 눈」에서 미화된 이야기는 잠시나마 부부의 갈등을 덮었고, 거기서 희망도 읽어낼 수 있었지만, 결국 눈이 녹아 진실이 드러나듯 갈등의 원인이 해결되지 않은 서툰 봉합은 예정된 파국을 불러왔다. 「zip」에서 ‘영화’가 ‘기한’과의 추억을 미화하며 손녀딸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속박에서 스스로 무너지지 않으려는 일종의 자기최면에 가까웠다. 「아리아드네 정원」에서 ‘민아’가 들려준 지나간 시절의 사랑 이야기는 목전에 도래할 비극을 유예하려는 몸부림이다.
작가는 우리네 일상과 맞닿은 현실적인 비극 속에서 미화된 이야기들이 잠시나마 고통으로부터 버틸 힘을 줄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현실을 개선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망각과 미화가 작동하는 시점에는 이미 늦었다. 문제는 그 이전에 해결되었어야 한다. 누군가의 고통을 진득하게 들여다보고 진심으로 공감했다면(「4월의 눈」),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면(「zip」), 망각과 미화로 애써 문제를 덮기에 급급한 불상사는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망각으로의 도피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파국이 개인 차원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라고 할지라도, 결국 그 구조가 형성되는 과정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협조하거나 방조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도 있다(「아리아드네 정원」).
미화된 이야기가 주제의 중심을 이루는 세 개의 단편 중에서 그나마 「4월의 눈」만이 작은 희망을 기약하며 끝을 맺는다. ‘나’가 눈 녹은 풍경을 바라보며 그리 “추하지만은 않다(40p)”라고 생각한 까닭은 깊이 공감해주는 누군가, 비슷한 상처를 나눠 줄 누군가가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미화된 이야기가 아예 필요 없는 세상은 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깊은 공감과 진실한 위로는 끊임없이 일상과 관계의 중심에 굳건히 놓여야 한다. 작가의 표현을 따르자면, ‘나와 남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자(269p).’
(이 글은 한국소설가협회가 주관하고, 한국문학예술저작권협회가 후원한 '제3회 대한민국 소설독서대전'에 제출되었으나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하였다. 내가 애초에 이 책을 통해 감동을 받은 바가 별로 없는 데 좋은 결과가 나올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왜 이 책으로 독후감을 썼는가?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대상 도서 목록 중에 집에 있는 책이 이것 뿐이었다... 물론 내가 산 것도 아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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