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최우람 「작은 방주」 展

1층 로비의 물품 보관함이 꽉 찼을 정도로 붐볐다. 황금 같은 주말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젊은이가 미술관을 찾았을까?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 속에 갈만한 선택지가 별로 없어서였을까? 날씨만을 이유로 꼽기에는 궁색하다. 작품을 보는 것 외에도 강추위 속에서 선택할만한 즐거움은 얼마든지 있다.

진정 볼만한 것들이 있었다. 그저 미술에 대해 아는 척하고 싶은 몇몇, 혹은 인스타에 올릴만한 소재를 찾아다니는 몇몇을 위한 콘텐츠가 아닌, 누구나 일부러 찾아가서 볼만한 시각적 스펙터클이 있었다는 말이다. 오늘날 다변화를 넘어 파편화된 취향의 세계에서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소구할만한 볼거리란 드물고, 그곳이 다양성과 불친절의 최전선을 달리는 동시대 미술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한 점에서 최우람이 현대자동차로부터 후원받아 구축한 이 야심찬 기획은 이례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는 듯 보인다.

5전시실 앞 ‘서울박스’라는 지하 로비 공간에서 15분 간격으로 휴식하고 5분 간격으로 작동하는 ‘기계-작품’인 <원탁(2022)>은 본격적인 전시실로 들어가기도 전에 이 전시의 대중적 성공을 예증한다. 관람객들은 원탁 주변을 둘러서고 기괴한 움직임이 펼쳐질 때마다 영상으로 담기에 여념이 없다. 18명의 지푸라기 인간이 인류의 죄악을 짊어진 시지프스 마냥 4.5미터 지름의 원판을 힘겹게 떠받치고 있는 형국이다. 그 위에는 지푸라기 공이 하나 올라가 있고, 기계장치가 작동을 시작하면 원판이 만들어내는 각도에 따라 공이 한쪽으로 쏠리지만, 이내 정교한 시각 센서에 의해 균형을 잡는다. 공은 떨어질 듯 위태롭지만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센싱과 움직임을 담당하는 기계장치는 원판의 중앙부에 자리 잡고 있지만, 우리의 시지각에서 주역을 담당하는 것은 원판 가장자리에 매달린 지푸라기 인간들이다. 우리는 언제나 본능적으로 인간의 형상을 먼저 알아 본다. 그리고 그 대상에 공감할지, 이입할지, 혹은 배척할지를 정한다. 지푸라기라는 재료가 육중한 철판과 동작부로 구성된 기계장치와 이질적으로 공명한다는 점에서도 그들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작가의 말, 그리고 이 전시의 큐레이팅이 채택하고 있는 공식적인 설명에 의하면 이 작품은 18명의 지푸라기 인간이 벌이는 머리 쟁탈전을 은유하고 있다고 한다. 즉, 머리가 없는 18명의 군상이 기계장치에 깔린 채 서로 머리를 차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모양새를 통해 시대상을 은유하려 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 의도라면, 그리고 그 의도를 기준으로만 평가한다면, 이 작품은 실패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지푸라기 인간의 머리 부분이 작가가 의도한 ‘머리의 부재’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푸라기 인간의 어깨 위쪽을 보면, 분명 동그랗게 마감 처리된 전형적인 두상은 없지만, 목 부분에서 질끈 묶어 머리 위쪽으로 빗자루처럼 퍼져나간 부위는 확연하게 식별할 수 있다. 나는 그 부분이 그냥 거칠게 마감한 머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판 위에 있는 공이 머리이고, 그걸 두고 지푸라기 인간들이 투쟁한다는 사실도 전혀 와닿지 않았다. 애초에 지푸라기 인간의 신체 각부는 단정하게 마감처리 되어있지 않다. 발만 봐도 그냥 발목을 묶어 놨을 뿐 발은 제멋대로 뻗친 지푸라기 더미 그 자체이지 않은가? 발이나 머리나 똑같이 제멋대로 뻗친 지푸라기 더미인데, 발은 있고 머리는 없다고 받아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우리는 어떤 형상의 전체적인 외형적 일관성 속에서 각 부의 존재 여부를 판단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 옆에 서 있던 한 커플, 그러니까 하나의 작품을 앞에 두고 아는 척하고 싶은 남자와 귀담아듣는 척하는 여자라는 전형적인 젠더 롤을 수행하던 그 커플도 똑같은 관점의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남: (브로셔를 읽더니) “아, 저 공이 머리고, 저 머리를 서로 가지려고 지푸라기 인간들이 싸우는 거래”

여: (놀라는척하며) “아 진짜? 나는 머리가 없는 건 줄은 몰랐어. (지푸라기 인형의 머리를 가리키며) 저게 머리인 줄 알았는데?”

그렇다. 나와 저 여인의 관점에 따르면, 최우람은 거액의 후원금을 받아 기계공학 전문가들과 협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 머리가 없는 자들의 머리 소유권 투쟁이라는 주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어깨 위에 뻗치는 부분조차 없이 아예 깔끔한 무의 상태로 마감처리 해야만 했다.

물론 이런 사소한 트집이나 잡자고 구태여 영하 10도를 무릅쓰고 미술관을 찾은 것도, 지금 이 순간 애꿎은 열량을 소모하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사소한 표현상의 불만족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엄청난 관심을 끌고 있으며, 그에 수반되는 연쇄적인 미적 대화들을 촉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지푸라기 인간의 머리가 있냐, 없냐 따위로 글을 써재껴 대체로 아무도 관심 없는 이 홈페이지에 애먼 글을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작품에 대한 얼마나 큰 관심도를 반영하는가? “이 작품은 이게 문제야”라는 말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작품은 미술계에서 대략 0.00001%에 불과하다. 99.99999%의 작품은 영양가 0에 수렴하는 영혼 없는 평가만 받아본 적이 있거나, 그도 아니면 소리소문없이 창고에 처박힌다.

사실 <원탁>보다 재미있는 것은 그 원탁을 둘러싼 사람들이다. 그들은 작품이 쉬는 15분 동안 어떤 신기한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하며 설렘을 감추지 못한다. 작품이 움직이는 5분 동안은 동영상으로 남기느라 여념이 없고, 어떤 원리로 지푸라기 공이 떨어지지 않고 원판 위에 머무르는지 열띤 토론을 나눈다. 지푸라기 인간들의 애처로운 몸짓에 웃거나 안쓰러워하고, 작품 위를 천천히 맴도는 <검은 새(2022)>와 연관지어 자기들만의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입에서 귀로 전해진 이야기들, 인스타그램을 통해 확산된 이야기들은 증폭되고 굴절되어 새로운 영토로 이어진다.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 격인 <작은 방주(2022)>에서 기계 숭배자들의 예식은 절정에 이른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12미터의 방주가 35쌍의 노를 팔딱거리고 <등대>는 관객을 향해 눈알을 희번덕거린다. 이 순간들은 모든 각도에서 영상으로 기록된다. 그 영상들이 어떻게 활용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단 봐야 의미가 생긴다. 18세기 살롱전에서야 유화 한 점만 걸어 놔도 볼만한 이유가 자동으로 생겼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볼거리가 너무 많다. 10분짜리 영상 한편 진득하게 보는 것도 시간 낭비로 느껴질 정도다. 영화 한 편조차도 2배속으로 보거나 어느 친절한 유튜버가 요약해준 액기스 영상으로 감상 자체를 갈음하는 시대다. (여담으로,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영상을 2배속으로 보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이게 현시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은연 중에 해왔는데, 최근 관련 현상을 본격적으로 고찰한 책이 출간된 것을 알게 되었다. ‘아, 내가 또 늦었구나’) 이런 시대에 미술가는 어떤 작품을 제작해야 하는가? 기획자는 어떤 전시를 기획해야 하는가? 어떻게 볼만한 이유를 만들 것인가? 이 전시가 이러한 질문에 대응하는 방식은 스펙터클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크고, 화려하고,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공상과학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던 아름다운 기계장치가 현실의 눈앞에서 생생한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거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스펙터클의 구현을 위하여 미학적 기획력과 기술적 지식이 필수적이지만 무엇보다 빵빵한 자본이 필요하다.

아홉 번째 ‘MMCA 현대차 시리즈’로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누구보다도 빵빵한 스폰서를 두고 있으며, 올해 그 스폰서는 이례적으로 자금만 대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로보틱스 기술팀까지 동원해주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현대자동차의 공조는 그 어느 때 보다 공고한 모습이다. 현대자동차는 최우람의 기획 전시에 공식 후원사로 참여할뿐 아니라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2> 展과 1층의 미술책방도 후원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 간다면, 두 개의 주요 전시와 미술책방을 동시에 후원하고 있는 스폰서를 보게 되는 것이다. 현대자동차 외의 스폰서로는 <올해의 작가상 10년의 기록> 展의 영상 설치를 돕고 있는 LG전자만이 보일 뿐이다. 이쯤되면 현대자동차는 동시대 미술의 최고 권력기관 중심부를 장악한 새로운 메디치가처럼 보이게 되는데, 후원자의 동질화가 이데올로기의 동질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국립현대미술관은 스폰서 다각화에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동시대 미술의 최고 권력기관이 모빌리티 및 로보틱스 부문의 최대 기업을 만나 미학적 ‘기계-작품’의 스펙터클을 양산하는 과정을 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산업 사회에서 기계란 실용적인 목적성에 기반하여 제작 및 운용된다. 고도의 기술적 아이디어와 고가의 재료가 결합된 기계는 오직 경제적 효율성의 창출이라는 목적하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최우람의 ‘기계-작품’들은 그러한 기계 본연의 존재 목적에 반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주목받는다. 보통의 예술가들은 꿈도 못 꿀 만한 비용, 시간, 인재를 투입하여 제작된 ‘기계-작품’은 경제적 측면에서 아무런 실용성이 없다. 공장에 있는 기계와 달리 재료를 가공하거나 조립하지도 못하고 물류의 흐름을 통제해 주지도 않는다. 그저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미학적 사고를 유발할 목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우리는 4.5미터의 원탁이 지푸라기 공을 얹고 까딱거리는 것을 보며, 그리고 12미터의 방주가 35쌍의 날개를 퍼덕거리는 것을 보며 실용성이 결여된 기계적 오브제가 왜 세상에 존재해야만 하는지를 숙고한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 저 움직임은 요즘 우리네 삶을 비유하는 것 같네, 저거 만드느라 고생 좀 했겠네, 돈깨나 들였겠어, 조만간 미술관에서 건담이 돌아다니겠는걸’ 같은 식으로 파생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최우람의 작품과 반대편에 있는 작품들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즉, 시각적 스펙터클로 넘쳐나는 바쁜 세상에서 전통적 매체 기반의 작고, 소소하고, 사색적인 작품들은 볼만한 이유를 만들어내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관객들이 애초에 보고 싶었던 무언가를 현실 속에 구현해내는 기획도 가치가 있겠지만, 관객들이 애초에 볼만한 이유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을 제대로 조명해 무대에 올리는 것도 중요하다. 지금 MMCA에는 스펙터클의 반대편에 있는 작품들에도 볼만한 이유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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