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탈의 상대성
바닷가에 다다르면 그제야 답답한 도시를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또렷이 밀려온다. 비릿한 물 내음, 생경한 새소리, 시시각각으로 역동하는 자연의 정경은 회색조의 도시와 대조된다. 이러한 해방감을 더욱 극대화하는 것은 그곳을 자유롭게 누비는 청춘들이다. 그들은 파도에 맞서 물장구를 치고, 셀카를 찍고, 짝 찾기에 여념이 없다. 탁 트인 수평선과 청량한 바람이 주는 해방감은 청년들의 자유분방함과 닮았다.
권여현은 일상적 풍경에서 벗어난 자유분방한 청년들을 일탈자로 묘사하고 있다. 작가의 세계관 속에서 일탈자는 공고한 사회적 규범을 비웃고, 조롱하고, 비트는 자들이다. 그들은 일탈적 행위를 통해 견고한 구조에 균열을 내고 창조적인 전환을 가져온다. 일탈자들은 익살스러운 표정과 제스처, 그리고 화면 너머 관객을 향한 육감적인 도발을 통해 우리가 애써 감춰왔던 디오니소스적 진실에 한 걸음 다가선다.
작가는 패션 잡지에서 본 듯한 정경을 빠르고 거칠게 회화적으로 재구성한다. 하지만 청춘의 빛나는 살결을 묘사할 때는 유난히 신중을 기한다. 건강한 육체가 뿜어내는 본연의 생생한 색조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명암을 만나 신체의 표면에서 화려하게 일렁인다. 작가는 살결을 뚫고 나오는 빛의 흐름을 포착하여 사회 구석구석에 숨겨진 일탈자들의 빛나는 가치를 은유하고 있다.
그런데 일탈자를 향한 작가의 시선은 세대를 초월하는가? 다시 말해 1961년생 작가가 일탈자라고 정의한 존재들은 보편성을 획득하는가? 작가는 자신이 그려낸 존재들이 “나체로 물속에 뛰어들거나, 성인이 되어도 어린이처럼 유치한 행동을 하거나, 껌을 뱉거나, 팬티를 반쯤 내리거나, 무표정한 얼굴로, 성난 얼굴로 돌아보거나, 풍선껌을 불면서 불량함을 표출하거나, 개의치않음을 주장하거나, 사소하게 낄낄거리거나 남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그 시선에 대한 역공을 가하거나” 하는 등등의 행위를 통해 일탈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작가의 (일찍 낳은) 아들뻘쯤 되는 내가 볼 때 이 그림 속 인물들은 ‘충분히’ 일탈적이지 않다. 그냥 좀 패셔너블하고, 자유분방하고, 생기가 넘칠 뿐이다. 사회의 금기를 과감하게 깨뜨리며 파문을 일으키는 일탈자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작가가 일탈자를 바라보는 관점은 아마 68혁명, 히피, 사이키델릭, 베트남전쟁 등 포스트모더니즘의 광풍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당시의 상상력이 규정했던 일탈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는 일탈이 얼마든지 더 존재함을 충분히 봐왔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제시한 일탈자라는 포장지는 그림의 표면을 겉돈다. 세상을 뒤흔드는 진정한 일탈을 꿈꿔왔지만, 결국에는 일정 수준에서 현실의 안락함에 안주한 어느 ‘교수-작가’의 철 지난 청춘예찬은 아닌지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다. 일탈이란 얼마나 상대적인 개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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