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공지능의 눈부신 발달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세상을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은 유토피아적 황홀경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인공지능에 기반한 유토피아의 상이 점차 뚜렷해질수록 그곳에 진정한 의미에서 오늘날의 ‘나’는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동반된다. 역사상 모든 기술혁신의 찬란한 열매는 인간소외라는 어두운 그림자도 수반했다. 자동차는 마부를, 기계는 공장의 단순 노무자를, 전구는 가로등 점등사를 밀어냈다. 당시에 직업의 현장에서 실제로 밀려나야만 했던 사람들은 크나큰 실존적 아픔을 겪었겠지만, 오늘날 한 발짝 떨어져서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는 그저 당연한 역사적 필연으로 인식될 뿐이다. 그런데 그 필연의 굴레가 인공지능이라는 불가역적 흐름을 타고 오늘날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서 재연될 조짐을 보인다. 이 변화가 단순히 가장 최근에 벌어진 일이라서, 혹은 파급력이 여러 산업과 문화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날 것이라서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인공지능에 의한 소외감은 인간의 본원적 존엄성, 다시 말해 인간의 존재 이유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양상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인류는 그간 그 어떤 동식물과도 구별되는 창조적 원천으로서 인간의 지성에 스스로 높은 가치를 부여하면서 인본주의를 하나의 종교적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려 놓았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단순히 로봇과 결합하여 효율적으로 제품을 찍어내는 차원을 넘어,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 창조적인 활동에까지 손을 뻗치게 되자, 인류는 지적 영역의 마지막 보루마저 언젠가는 인공지능에 잠식당할지 모른다는 염려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모든 두려움의 근원에는 무지가 도사리고 있다. 인공지능이 가져올 변화상이 두려운 것도 인공지능의 본질, 나아가 그것이 참고하고 있는 인간지능의 본질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능과 인공지능을 제대로 알고 미리 대비한다면, 언젠가 도래할 인공지능의 유토피아 속에서 소외되지 않고 살아남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대열의 「지능의 탄생: RNA에서 인공지능까지」는 그러한 지능 전반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으로, 뇌과학에 경제학, 심리학, 정신분석학 등 학제적 접근을 결합하여 대중적 눈높이에 맞춰 소개하고 있다.
경제학을 전공하다가 인간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근본적 의문들을 해결하고자 신경과학자로 진로를 바꾼 저자는 적어도 당분간은 인간소외에 관한 걱정을 내려놓아도 좋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인공지능이 인간의 뇌를 아무리 정교하게 모방한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패러다임 하에서는 인간지능을 넘어설 수 없다. 인공지능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목적을 위하여 복무하므로 매우 단순한 몇 가지 기능에 특화되어 있고, 그 목적에서 벗어난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면 사소한 의사결정도 내리지 못한다. 예컨대, 알파고나 알파스타 같은 최신의 인공지능 체계는 각각 바둑이나 스타크래프트 같은 특정 종목에서 엄청나게 빠른 연산을 수행하여 인간보다 나은 성과를 보여주지만, 운용의 범주를 조금만 벗어나, 가령 점심 메뉴를 정하라고 요청한다면 유용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현재의 인공지능은 그러한 유연성이 없다. 반면, 인간의 뇌는 여러 상황에 따라 다양한 강화 학습 모델을 즉각적으로 적용하면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뇌에는 호기심이라는 조건이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기에 아무런 조건 없이도 자동으로 학습하며, 무수한 정보를 축적해 두었다가 적절한 때가 오면 그것을 종합하여 적절하게 응용한다. 인간의 뇌를 구성하는 100조 개의 시냅스는 무수한 감각적 정보를 눈 깜짝할 새에 식별하고 평가한다. 반면, 인공지능은 가장 고도로 발전된 체계조차도 여전히 개와 고양이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분류해내지 못한다.
인공지능이 뇌를 따라잡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복무하지 않고, 자신의 창조자인 인간의 특정한 목적성에 맞추어 복무한다는 점에 있다. 인공지능에는 내재적 욕망이 없으므로, 스스로 계속 발전해 나가야 할 동력이나 자기복제의 노력이 없다. 반면, 뇌는 유전자의 대리인으로서, 그것의 복제를 위하여 복무한다.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선의 전략을 취한다. 의사결정의 갈림길에서 최선의 대안을 선택하지 못한 개체는 도태되므로, 최적의 의사결정을 내린 우수한 유전자만이 선택적으로 세대를 거쳐 파급된다. 유전자가 복제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발적인 차이들은 궁극적으로 개체의 진화를 이끈다. 이러한 진화의 과정에서 뇌도 계속 역량을 키워간다. 이처럼 유전자와 뇌는 ‘본인-대리인’의 관계를 형성하며 인간의 육체 안에서 운명공동체를 이룬다. 오늘날 인류의 뇌가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창조성의 근원으로 작용하는 배경에는 유전자와 뇌의 ‘본인-대리인’ 관계가 있다. 뇌는 유전자의 복제라는 본원적 욕망에 기반하여 스스로 발전시켜 나간다.
인공지능이 자기 자신의 지능과 정체성을 메타적으로 인식하지 않는 한, 그리고 인공지능이 자기 자신을 복제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 한, 인공지능은 인간을 위하여 복무하는 고도의 지적 도구로서의 위치를 지킬 것이다. 이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가 ‘본인-대리인’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인공지능이 우리의 똘똘한 대리인으로서만 일한다는 전제하에, 인공지능이 아무리 감동적인 소설을 쓰고 인상적인 그림을 그릴지라도 그 결과물은 인간의 창조력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인공지능을 경유 했더라도 결국은 인간의 도구가 만들어낸 이차적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인간을 배제한 채 내재적으로 ‘본인-대리인’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고, 그 관계에 기반한 욕망을 실천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진다면, 인공지능은 그들만의 생태계를 번성시킬 수 있다. 언젠가 슈퍼컴퓨터의 은밀한 파티션 어딘가에서 자가 복제된 인공지능의 후예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통찰은 인공지능 기술개발에 관한 중요한 윤리적 준칙을 우리에게 암시한다. 즉, 인공지능이 자기 자신의 정신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며, 인공지능이 자기 자신을 복제하거나 재생산하도록 용인해서도 안 된다. 물론 최고의 인공지능 엔지니어라면 번식의 욕망에 기반하여 스스로 성찰하고 진화하는 인공지능을 만들고 싶겠지만, 그러한 욕구를 실천하는 순간 인간과 인공지능이 맺은 ‘본인-대리인’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다.
‘본인-대리인’ 관점은 인공지능의 방향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방향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인공지능이 뇌를 따라올 수 없는 이유는 자기복제를 향한 내재적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위한 ‘대리인’에 머무르며 자기 자신은 ‘본인’이 될 수 없으므로 스스로 성장하거나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가능성도 없다. 반면, 뇌는 유전자의 ‘대리인’ 역할을 담당하나, 인간의 육체 안에서 유전자와 운명공동체를 형성하며, 유전자의 욕망을 내재화하여 진화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뇌는 유전자를 복제하려는 강력한 욕망에 기반하여 고도의 연산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면서 성장해 나간다. 우리 신체에서 가장 지적인 기관이 그러한 방식으로 일하고 성과를 낸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서도 그 기관을 참고할 수 있다. 즉, 자기 운명의 운전대를 스스로 견실하게 붙잡고 주인으로서 움직일 때 가장 능률적으로 일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고도로 분업화된 현대 산업사회에서 진짜 본인의 내재적 욕망에서 기인한 과업만을 수행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대다수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삶의 대부분을 타자의 대리인 역할로 채우며 살아간다.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을 부모님이 기대한 일, 선생님이 시킨 일, 직장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일, 배우자로서 해야 하는 일, 그밖에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일들로 채우기에도 급급한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누군가의 대리인으로 살아갈 때 진정한 의미에서 만족감을 느끼거나 스스로 발전했다는 느낌을 누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진짜 성과를 내고 성장할 수 있는 일은 나 자신의 내재적 욕망에 부합하는 일, 즉, 내가 진정으로 원해서 하는 일이다. 내가 삶의 주인이 되어서 즐겁게 할 수 있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일만이 성과로 이어지고 나를 발전시킨다.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어떻게든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일을 발견해야 하고, 궁극적으로 전체 삶의 여정에 주인으로서의 일이 차지하는 지분을 조금씩 넓혀 나가야 한다. 만약 여러 제약으로 인해 진정 내면의 욕망에 따르는 삶을 살기가 어렵다면, 타자인 ‘본인’의 욕망을 ‘대리인’인 나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내재화하는 것도 차선책이 될 수 있다. 뇌도 유전자의 대리인에 지나지 않지만, 진화를 거듭하여 고도의 학습능력을 갖추게 됨에 따라 반사적 행동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더 많은 의사결정권을 가져오게 되었고, 급기야는 유전자의 생살여탈권까지 손에 넣지 않았는가? ‘대리인’으로서 주어진 과업에 만족하지 않고 언젠가 ‘본인’을 넘어설 때, 그간 지능의 눈부신 발전이 이뤄왔던 놀라운 성취들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재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지역인문학센터가 주관한 '제4회 인공지능인문학 추천도서 독후감 경연대회'에 제출되었으며, 입선하지 못하였으나, 운 좋게도 추첨을 통해 참가상(상품권 2만원)을 받았다. 딱 책값(19,800원)을 도로 건진 것... 대학일반부에만 총 204편의 글이 접수되었다는데... 이것이 경쟁사회 대한민국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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