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신앙 전통도 군사적으로 막강한 제국의 후원이 없었다면 ‘세계 종교’가 되지 못했을 것이며, 모든 전통은 어쩔 수 없이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개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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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전쟁은 자원 경쟁에서 비롯된다. 인류는 더 많은 식량, 자원, 토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을 벌여왔다. 전장의 깃발에는 온갖 숭고하고 휘황찬란한 가치가 아로새겨져 나부끼지만, 사실 자원 경쟁의 틀을 넘어서는 고도의 대의명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의 명분이란 살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참상으로부터 애써 눈을 돌리게 하려고 고안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원 경쟁이라는 명백하면서도 얄팍한 동기를 넘어서는 숭고한 정신적 차원의 명분이 정교하게 구성되어야만 사람들은 쟁기를 버리고 칼을 들 수 있다.
전쟁은 다양한 경로로 명분을 섭취하지만, 그중에서도 종교는 그야말로 가장 풍성한 명분의 보고나 다름없었다. 근대 이전에 종교는 정치 및 일상생활과 완전히 융합되어 있었다. 종교적 가치와 양식은 삶의 모든 양태를 좌우했다. 하지만 그 어떤 신이나 예언자도 특정 민족 구성원 전체에게 직접적이고 명백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전할 수는 없었기에 종교적 의사결정의 많은 부분은 늘 특권적 소수의 해석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종교가 삶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컸다는 점, 그러면서도 시공간을 초월한 일관된 교리적 해석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 전쟁의 제1명분으로서 종교의 입지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사제와 권력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신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민족이고, 우리가 가는 길을 막는 자들은 모두 타락한 이교도들이므로 신이 벌하실 것이다. 종교는 이처럼 선한 우리와 악한 타자로 구성된 이분법적 세계관을 확고히 하는데 긴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이러한 역사가 되풀이되면서 어느덧 종교 자체가 모든 폭력의 근본적 원인으로 느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이 고대부터 동시대 테러리즘까지 종교와 폭력의 역사를 가로지르며 하고 싶었던 말의 요지는 폭력의 원인으로서 종교를 지목하려는 손쉬운 접근의 유혹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은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원 경쟁이라는 본질을 교리로 희석하려는 호전적인 권력과 왜곡된 민족주의에 있다. 전쟁의 명분으로서 경전에서 끌어다 온 문장에 집착하다 보면 폭력을 추동한 진짜 주체와 의도는 가려지게 된다.
저자는 고대 수메르 문명에서부터 힌두, 이슬람, 유교, 법가,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 등 거의 모든 민족과 종교를 얕게 아우르며 종교와 폭력에 결부된 역사적 실례들을 속도감 있게 보여준다. 종교와 폭력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만 거의 700페이지를 채운 셈인데, 진정 세계사 전체를 빈틈없이 아우른 것 같은 착각을 준다. 그만큼 두 키워드는 지금까지의 거대서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지배적 변수였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저자는 특히 모든 종교가 역사적 흐름 속에서 불필요한 폭력을 억제하는 평화적 완충지대의 역할과 오히려 폭력을 부추기는 호전적 기능을 교차적으로 표출하며 긴장의 역사를 구성해 왔음을 강조한다. 우리가 아는 한 완전히 평화적인 종교도, 완전히 호전적인 종교도 없다는 것이다. 만약 완전히 평화적인 종교가 한때 존재했었다고 하더라도 아마 우리는 오늘날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완전히 평화적인 종교가 어떻게 그 교리를 누군가에게 전하며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길 수 있었겠는가?
모든 종교에는 실로 다양한 면모가 깃들어 있다. 인류는 자연이라는 무지막지한 힘에서 느껴지는 무력감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보고자 신화를 창조해 냈고, 종교적 신념은 가공할 정신적 응집력을 만들어내 단독자들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성취하게 했다. 우리는 피라미드와 고딕 양식의 중세 대성당을 바라보며, 저런 성취를 가능하게 만든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물리적 토대를 벗어난 저 너머의 세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성취다. 믿음은 암암리에 희로애락의 모든 국면에 기저 조건으로 작용한다. 철천지원수를 사랑하게 만들 수도, 가족 간에 칼을 들이대게 할 수도 있다. 인류 문명사의 최고 걸작품을 탄생케 할 수도, 반대로 그 걸작품을 한순간에 먼지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하나의 종교가 그 모든 양극단의 의사결정 과정에 근거가 될 수 있다. 이편이나 저편이나 하나같이 같은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서로의 목전에 칼끝을 겨눈다.
신이 죽었다고 선언된 오늘날에도 그러한 종교의 양면성과 아전인수는 여전히 유효하다. 신이 죽은 성좌에 인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대신 앉아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야당이나 여당이나 똑같은 ‘국민’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기 뜻을 관철하려 악다구니를 부린다. 독재국가는 배타적 민족주의를 내세워 타자를 악마화하며 정권의 당위성을 옹립한다. 분쟁지역에 군대를 파견하는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그곳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십자군 전쟁 이후로 자유의 수호는 전쟁의 가장 당면한 명분이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 집권 세력이 아닌 평범한 백성들의 자유를 최우선 과제로 고려한 전쟁은 없었다.
폭력의 시간에 광신도적 열정만을 주범으로 몰아 손가락질한다면 폭력을 선동한 권력자들은 진짜 의도를 은폐할 시간을 벌게 된다. 진짜 미치광이가 허공을 향해 휘두르는 주먹질이 아닌 이상, 모든 조직적 폭력은 자원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고, 그 폭력으로 주머니를 채운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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