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展: 빈미술사박물관 특별전 (국립중앙박물관)

존경을 표하는 두 개의 행렬

서울에 살 때야 제아무리 인기 있는 블록버스터 전시라도 평일에 휴가 내고 보면 되니 딱히 부담이 없었다. 지방에 오고 나니 서울에 모든 문화 시설이 몰려 있다는 사실이 제대로 실감이 난다. 이 전시도 하마터면 못 볼 뻔했다. 예매 사이트에 내가 서울로 올라가는 날 운 좋게도 딱 한 자리 공석이 있어서 냉큼 예약했다. 전시장에 가보니 현장 예매는 진즉에 닫아놓은 상태였다.

미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늘기는 했나 보다. 한 3년 전만 하더라도 최고로 붐빈 전시마저 이렇게까지 시간대별로 끊어서 예약을 받지는 않았었다. 코로나 사태 전에 가장 흥행했던 전시가 아마 호크니 展이었을텐데, 줄지어 들어갔던 기억은 있지만 그래도 이번 합스부르크展 수준의 인파는 아니었다.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쳤을 것이다. RM 등 셀럽의 영향으로 젊은 층에서 미술에 대한 관심이 전반적으로 높아졌고, SNS에 인증할 뭔가를 찾는 이들도 많아졌고, 겨울방학을 맞은 학생들의 현장학습 수요도 있을 것이다. 코로나 사태를 전후로 수익성 문제 때문에 블록버스터 전시들이 취소되거나 연기됐으니 자연히 그동안 미적 갈증도 쌓였을 것이다. 그 유명한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의 <마르게리타 공주(1656)>를 데려왔다는 점도 주효했으리라.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전시가 펼쳐진 장소 탓인지, 입장하려고 빙글빙글 줄을 선 와중에 내내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현재 이곳의 왕가에 쌓인 불만이 많아서 과거 신성로마제국의 왕가를 동경하는 건 아닐까?” 물론 이는 지나친 비약이다.

전시 자체는 전형적인 국립 기관의 전시 그 자체다. 신성로마제국을 다스렸던 그 왕가는 단순히 유럽 대륙의 지배자였을 뿐만 아니라 예술의 후원자로서도 놀라운 심미안을 가지고 찬란한 문화유산을 축적해 미천한 우리에게도 그것들을 볼 기회를 선사해 줬으니 그들을 영원히 찬양하고 기리자는 내용이다. 이러한 내러티브에는 왕가가 외세로부터 지켜준다는 명분으로 어떻게 농민들을 수탈했는지, 어떻게 생때같은 청년들을 징집해 명분 없는 전쟁터로 내몰았는지, 어떻게 동방과 아프리카에 미개하다는 낙인을 찍어 자원을 착취하고 노예로 삼았는지 등은 드러나지 않는다. 왕가는 여기 온 96점의 금빛 찬란한 회화, 조각, 갑옷, 공예품들의 관대한 후원자로 그려지지만, 그것을 주문하고 매입한 재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사치품을 향한 절대 권력의 욕망은 어떠한 결핍을 대리 충족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들은 전시장 밖에서 찬 바람을 맞으며 줄을 서 있다가 마감 시간이 임박하여 문전박대를 당하고 만다.

멋진 작품들 가운데서도 유독 기시감을 자아내는 걸작이 하나 있다. 구스타프 아돌프 뮐러(Gustav Adolf Müller, 1694-1767)의 동판화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존경을 표하는 행렬(1740)>이다. 1740년 10월 20일에 아들이 없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6세가 사망하자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왕으로 취임했다. 화가는 섬세하고 정교한 선으로 1740년 11월 20일에 새로운 왕에게 존경과 충성을 표하는 백성들의 행렬을 보여준다. 구불구불한 행렬은 호프부르크 궁에서 성 슈테판 대성당까지 이어졌다고 한다(전시의 공식 설명에 따르면 뭔가 대단히 긴 행렬인 것 같지만 구글 지도로 찍어보면 딱 1km 남짓, 걸어서 13분 거리에 불과하다).

근대화의 격변을 목전에 둔 빈에서 왕을 알현하기 위해 섰던 행렬이 28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8,269km 떨어진 이곳 서울에서 재현되고 있다. 그날 빈에서 백성들은 이제 막 부임한 서슬 퍼런 왕 앞에 알아서 머리를 조아렸겠지만, 오늘 서울에서 줄을 서는 관객들은 이미 관에 들어간 권력과 한물간 미학을 향해 선택의 여지 없는 찬사를 강요받는 처지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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