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엘로이의 「아메리칸 타블로이드」

James Ellroy, AMERICAN TABLOID

영화 「LA컨피덴셜(1997)」은 킴 베이싱어(Kim Basinger)가 육감적으로 전면에 등장한 포스터 이미지로 소년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지난해 여름에 어느 싸구려 호텔에서 IPTV의 하이퍼링크를 유랑하다가 그 포스터를 우연히 만나 반가운 마음에 재생 버튼을 눌렀다. 생사를 넘나드는 긴장감, 배신과 반목과 화해가 뒤엉킨 갈등 구조, 담담하고 묵직한 연출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원작자에 대해 찾아보다가 이 소설에 이르게 되었다.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암살사건의 배후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두운 세력들의 이해관계와 암투가 있었을 것이라는 흥미로운 가설에서 출발하는 작품이다. 국가안보에 직결된 어떤 첨예한 사건은 으레 세부사항들이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고 오랜 시간 비밀에 부쳐지기에 세간의 입방아를 낳는다. 이 소설은 그런 입방아들을 가장 간결하고 현실적인 형태로 재구성하여 풀어낸 결과물이다.

이야기는 케네디가를 중심에 놓지만, 정작 케네디가 사람들을 비중 있게 다루지는 않는다. 그들은 모든 권력과 부와 인기를 독점한 신성불가침의 가문일 뿐이고, 그 가문을 중심으로 갈등과 이해관계로 연결된 온갖 세력들이 병치되면서 저마다 생존을 위한 위험한 게임을 시작한다. 트럭노조와 지미 호파(Jimmy Hoffa)는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가 자신을 부패 세력으로 규정하고 숨통을 조여오는 탓에 죽을 맛이다. 시카고 마피아는 쿠바 정책의 변화로 인해 카지노와 마약 밀매 사업에 피해가 돌아올까 걱정이다. FBI의 에드가 후버 국장(John Edgar Hoover)은 케네디가를 탐탁지 않은 빨갱이로 규정하고 있으며,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케네디가의 숨통을 끊어 놓을 온갖 증거들을 수집하고 있다. KKK 꼴통들은 인종차별철폐를 추진하는 케네디에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지만, 사실 그런 ‘꼴통-반동’ 세력들은 사회진보라는 자양분을 빨아먹고 산다. CIA는 카스트로 축출을 위해 쿠바 침공을 기획하고, 여기에 망명자들과 KKK 꼴통들을 꼬드긴다. 케네디의 유화정책에 따라 쿠바 침공 계획이 틀어지려는 조짐은 CIA에 있어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이 모든 욕망과 불안의 이전투구가 뒤엉켜 피그스만 침공과 케네디 암살로 이어졌다.

역사적 사건과 실존 인물들만 줄줄이 나열하면 자칫 이야기가 겉돌 수 있는데, 작가는 매력적인 세 인물을 창조해 실존적 고유명사들 속에 끼워 넣고 독자들이 몰입할 지점으로 만든다. 세속적인 FBI 비밀요원 캠퍼 보이드, 답답한 이상주의자였으나 이내 야욕에 눈을 뜨게 되는 워드 리텔,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해결하는 ‘거인’ 피터 본듀란트 등 세 사람은 거창한 대의명분 없이 그저 한 푼이라도 더 벌고, 하나라도 더 짓밟고, 그도 아니면 그저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더러운 힘에 결탁한다.

「LA컨피덴셜」도 그랬지만, 작가는 평범한 사람이 서서히 강렬한 충동에 눈을 뜨거나, 악의 구렁텅이에서 제때 브레이크를 밟지 못해 끝내 파국으로 치닫고 마는 변화를 묘사하는 데 탁월한 역량을 보여준다. 매 챕터마다 지명과 날짜를 못 박아 사건의 구체성을 강조하거나 짧은 문장의 상황 묘사로 심리를 은유하는 방식도 독특하다. 어떻게 그렇게 수많은 장소와 구체적인 날짜들을 특정해 가상의 사건들을 직조해내면서 동시에 실제의 역사 속 타임라인과도 자연스럽게 연계시킬 수 있을까? 대단하다.

하지만 80년대생 한국인 독자로서 보기에 그리 흥미롭거나 몰입되는 소설은 아니었다. 미국 근현대사에 원래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던 사람이 아닌 이상 아마도 대체로 그럴 것이다. 기본적으로 돈과 권력 앞에서 가차 없이 총질부터 해대는 그네들의 정서 자체가 선량한 우리 ‘K-서민’들과는 너무 큰 괴리가 있는 데다가, 679페이지에 걸쳐 끝없이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성-약칭-별명’을 매칭하느라 흐름만 계속 깨진다.

그나저나 ‘소송의 나라’ 미국에서 이 정도로 쎈 수위의 실존인물 관련 작품이 등장할 수 있는 걸 보면 예술적 표현의 자유가 상당히 폭넓게 용인되는 것 같다. 작품에서 존 F. 케네디는 FBI 출신 첩자를 통해 매일같이 하룻밤 상대를 공급받고, 허구헌날 잠자리에서 도청을 당하며, 그마저도 ‘2분컷’이라며 놀림 받는 처지다. 그 후손들도 버젓이 살아 있는데 참 대담한 묘사다. 우리나라에서는 16세기 인물에 대한 묘사도 후손들에게 고발당하던데…. (무혐의로 결론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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