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경, 「매끄럽지 않은」 展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촉각적인 관점에서 그 여정은 매끄러움이 거침으로 변하는 과정이다. 갓 태어난 아기의 살결은 향긋하고 촉촉하고 보드랍다. 반면 노인의 살결은 비릿하고 뻣뻣하고 거칠다. 이처럼 거친 속성은 시간의 흐름을 대변하고, 결국에는 죽음과 맞닿는다. 필멸의 존재에게 영생은 필연적 갈망이다. 거칠고 주름진 것에서 벗어나 매끄럽고 촉촉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은 그야말로 선험적이다. 보드랍고 매끄러운 성질은 그것을 잃어버린 자들의 갈망을 부른다. 자기 신체를 스스로 보호할 능력이 없는 아기는 보드랍고 매끄러운 성질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그 사랑스러운 속성을 갈망하는 어른들이 나서서 아기를 보호한다. 고양이는 거친 야생에서 경쟁하기보다는 인간 아기의 속성을 본뜨는 편이 더 쉬운 생존전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양이들은 아기를 보살피고픈 인간의 욕망을 자극해 인간 사회에서 나름의 터를 잡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매끈한 것은 미로, 주름지고 거친 것은 추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표면이 거친 비너스 상이란 존재할 수 없다. 매끈한 표면 묘사가 가능한 대가들만이 대리석을 쪼고 또 쪼아 그 안에서 눈부신 비너스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와 대척점에 있는 형상으로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판타지 영화 속 오크다. 그들은 주름지고, 거칠고, 더럽다. 인간이 상상해 낼 수 있는 추의 원형적 성질을 다 모아 놓은 형국이다. 하지만 추는 혐오감과 단순하게 등치 되지 않는다. 그뤼네발트(Matthias Grünewald)의 <이젠하임 제단화(1515)>가 보여주듯, 추는 그 활용방법에 따라 성스러운 힘을 덧입기도 한다. 이 그림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유난히 일그러지고 뒤틀리고 거칠게 패였다. 그 표면을 통해 치유와 희생의 정신이 도드라진다. 이처럼 미든 추든 정점에 도달하면 독특한 힘을 발현한다. 따라서 미 또는 추가 어떠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맥락에서, 어떠한 전략으로 그 형상들이 활용되었느냐가 중요하다.

청주시 상당구의 가지런한 아파트 단지들에 둘러싸인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는 경직된 외견상 창조적 힘이 분출되기 어려운 구조다. 여기서 16기 입주작가 릴레이 전시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최민경 작가는 전혀 상반되는 세계관을 보여주는 강건 작가와 함께 마지막 순서로 무대에 올랐다. 최민경의 전시는 총 다섯 개의 작품으로 구성되는데, 중심에는 <영원한 젊음을 위한 매뉴얼(2022)>이 위치한다. 나머지 작품들은 사실상 이 작품을 위한 사전조사 혹은 예행연습에 가깝다.

44분 25초의 2채널 비디오는 젊음에의 욕망을 부추기는 목소리와 거기에 순응하거나 저항하는 두 사람을 다룬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운명과 나란히 놓인 두 도시가 병치 된다. 전지전능한 목소리는 노화를 죄악이나 심지어 죽음과 연결 짓고, 그것에 저항함이 마땅하다고 세뇌한다. 여기서 젊음을 표상하는 성질이 매끈함이다. 시간으로부터 줄줄 새어 나오는 매끈함을 어떻게든 다시금 붙들어 매야 한다. 목소리가 제시한 네 단계 매뉴얼은 대단히 현실적이다.

첫째, 노화의 거친 흔적을 “지워라.” 둘째, 젊음을 향한 정량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수시로 측정하라. 모든 수단을 가차 없이 실행하고 적절히 “통제하라.” 셋째, 추한 과거와 과감히 단절하고, 필요하다면 젊음의 씨앗을 적진에 침투시켜 널리 확산하라. 낡은 영토를 “식민화 하라.” 넷째, 만약 혁신의 과정에 저항이 따른다면, 과거의 흔적들을 외형만 그럴싸하게 취하여 급진적 변화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위장하라.”

여기서 우리가 특히 눈여겨봐야 할 항목은 네 번째 단계, “위장하라”다. 이 개념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우파의 일곱 가지 신화화 전략 중 하나로 제시한 “예방접종”과 일맥상통한다. 이것은 체제의 부수적인 악을 미리 고백함으로써 일시적인 안심을 가져오고, 더 큰 구조적인 악을 숨겨 전복의 위험을 줄이는 전략이다. 바르트는 “고백된 약간의 악은 감춰진 많은 악을 인정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준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매끄러움의 신화를 부추기는 목소리도 이렇게 교묘하게 작동한다. 자연스러운 노화를 거스르는 온갖 행위들은 어느 정도 임계점에 도달하면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단절만이 진보인가?’ 이러한 저항의 씨앗을 완전히 잘라 버리려면 상당한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목소리는 대중이 품은 노스텔지어를 완전히 소거하려 들지 말고, 그저 거기서 몇몇 껍데기 요소들을 취해 혁신으로 가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배치하라고 조언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안심하고 서서히 변화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젠틀몬스터 플래그십 스토어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미학적 폐허 구조물, 근현대건축자산인 대진정밀 건물에서 일부 벽돌만 남겨 놓고 보존이라는 외형적 조건을 갖춘 세운지구 재개발 사례를 들며 시뮬라크르적 노스텔지어를 강요된 혁신의 교두보로 사용하는 책략을 폭로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통의동 보안여관을 떠올렸다. 남겨 둔 껍데기는 보존이 아니다. 껍데기는 껍데기일 뿐이다. 독극물은 껍데기를 타고 스멀스멀 흘러든다.

싱가포르 출신의 동료 예술가 싯왱산(Sit Weng San)과 함께 영상에 직접 출연한 최민경은 노화를 단죄하는 목소리를 따라 젊어지기 위한 애처로운 과정에 꾸역꾸역 동조한다. 때로는 자기 정체성을 주장하며 소심하게 저항해보기도 하지만 번번이 묵살 된다. 구조적 압력과 내밀한 욕망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몸부림은 정보범람 시대의 엔트로피에 빠진 동시대적 자화상을 정확히 짚어내어 쓴웃음을 자아낸다. 신체 표면에서 집요하게 작동하는 일종의 강요된 혁신에 두 여성 작가는 동조하고 저항한다. 몸을 재단하는 칼날은 서울의 을지로나 싱가포르의 부낏 브라운(Bukit Brown) 공동묘지와 같은 물리적 공간에 같은 논리로 파고든다. 이 지점에서 젠더, 신체, 지역성을 가로지르는 성장연합의 상품화/시장화 전략이 폭로된다. 신체를 포함한 만물은 상품화되어야 하고, 내가 밟는 모든 땅은 시장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매끄러운 몸이라는 강요된 욕망에 시간과 정력을 쏟고 있는 사이, 진짜로 매끄러워지는 것은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물리적/문화적 토대이며, 그렇게 매끄러워진 토대 위에서 끝까지 미끄러지지 않고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똥파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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