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비슷한 제목의 책이 전에도 있었다. 테리 스미스(Terry Smith)의 「컨템포러리 아트란 무엇인가」. 꽤 많이 팔린 책이기도 하다. 표지 디자인도 은근히 비슷하다. 노린 것 같다. 제목도 사실상 같다. ‘현대미술’이나 ‘컨템포러리 아트’나 일반적인 용례상 같은 시기와 대상을 가리킨다. 다른 점이 있다면, 테리 스미스는 좀 더 이론적으로 고찰하는 편이고, 오자키 테츠야는 현장 중심의 접근에 가깝다. 그런데 현장 중심의 접근이라면 세라 손튼(Sarah Thornton)의 「걸작의 뒷모습」도 생각난다. 미술관, 언론사, 경매사, 대학, 스튜디오 등 동시대 미술의 현장을 참여관찰법으로 취재했던 책이었는데, 테츠야의 저술은 그에 비하면 이론 쪽에 좀 더 가깝다. 만약 현대미술의 이모저모를 이론에서 현장 순으로 읽어보고 싶다면, 테리 스미스, 오자키 테츠야, 세라 손튼 순으로 읽기 바란다. 물론 그 역순도 좋고, 그러는 편이 문턱도 더 낮을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테츠야의 책을 나머지 두 저자의 명저와 비슷한 선상에 올려놓는 셈인데, 그래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확실히 아트 저널리스트로서 상당한 경력을 쌓아 온 인물답게 현장에 대한 다년간의 경험과 박식함을 바탕으로 균형 잡힌 관점을 보여준다. 또한, 예술에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한 일반 대중이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눈높이를 낮추면서도 나름의 깊이 있는 관점은 놓치지 않았다.
공감 가는 지점이 많다. 이야기는 비엔날레에서부터 시작하는데, 물론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세계 최고의 작가들과 기획자들과 후원사들과 수집가들과 갤러리스트들이 한자리에 모여 복작거리는 것만으로도 현대미술의 아이러니가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2015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자본론」 읽기를 기획하고, 또 동시에 롤스로이스에서 협찬을 받은 아이작 줄리언(Isaac Julien)의 사례는 그러한 아이러니의 단적인 예다(33p). 오늘날 세계 미술계를 이끌어가는 최고의 작가들은 대부분 ‘좌익 지식인’의 정체성을 지니는데, 그들은 자기 작품을 통해 사회 정의를 외치지만, 한편으로는 이 시대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신자유주의의 검은돈에 의지한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이 유난히 탐욕적이어서가 아니라, 시스템 전체가 애초에 그렇게 세팅되어 있다. 혼자 티베트 고원에 들어가 도 닦으면서 작업할 것이 아닌 이상, 모든 소통의 가능성은 자본에 잠식되어 있다. ‘돈-권력-예술’의 유착은 짧게 봐도 르네상스, 길게 보면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역사적 카르텔이다.
저명한 공공 미술관이라고 다를까. 그들이 비주류에게 숨통을 틔워줄 가능성이 조금은 더 있을지 몰라도, 자본과 권력의 자장 안에 들어 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미술사적 권력을 독점한 공립 기관의 이사진을 까발리거나 저격하는 작품은 한스 하케(Hans Haacke) 이후로 이미 동시대 미술 언어가 되었다(316p). 미술관은 존립을 위해 관객동원 수를, SNS 피드를, 이사회를, 정부 부처를, 거물급 후원사를 눈치 본다. 가장 진보적인 큐레이션조차 의심의 눈초리로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엇이 표면화됐는지보다 무엇이 순화됐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제는 캐캐묵은 비평의 위기, 나아가 비평의 종언은 다시 한번 강조된다. 「아트리뷰」 지가 선정하는 미술계 파워인물 중 전업 비평가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론가로는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와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만이 남았다. 개념미술, 레디메이드, 그리고 다원주의의 완전한 착근에 발맞추어, 이제 아트월드에서 의미 없는 몸짓은 하나도 없게 되었고, 동시에 누구를 옹호하거나 까내릴 논리도 사라졌다. ‘~주의’, ‘~ism’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대신 비평은 작품의 창작 논리로 스며 들어갔고, 특권적 비평가의 역할은 잘게 쪼개 관람객에게 일일이 불출됐다. ‘저자의 죽음’ 이후로도 창작의 샘은 마르지 않았듯, 비평의 죽음은 오히려 다른 의미에서 비평의 르네상스를 이끌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레디메이드를 앞에 두고, 관중 쪽이 작가보다 늦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작가는 관중과 다른 위치에 있지 않다.”
티에리 드 뒤브 (372p)
“예술가는 이상적인 예술 생산자에서, 이상적인 예술 감상자로 변모했다.”
보리스 그로이스 (372p)
“텍스트란, 무수히 많은 문화의 중심에서 온 인용의 직물이다.”
롤랑 바르트 (374p)
저자는 이제 동시대 미술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것은 총체적 감각을 선사할 수 있는 설치미술뿐이라고 지적한다. 동영상, VR, 메타버스, 스펙터클의 시대에 평면 회화가 누려왔던 특권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뛰어난 현대미술이라면 개념적인 설치미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오늘날 자국 일본의 미술은 여전히 ‘회화 바보’라며, 느린 발전 속도에 개탄한다. 미술교육 측면에서는 우리나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물론 이 지적은 아트월드라는 특권적 세계에서 얼마나 공적으로 인정받는가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기에, 예술의 모든 다층적인 기능들을 포괄할 수 있는 비판은 아닐 것이다. 골방에서 홀로 먹을 갈며 지난한 수양의 시간 끝에 그려진 한 떨기 매화의 가치를 누가 감히 함부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예술=문화자본=국가경쟁력’이라는 비약적 등식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미술을 공동체의 부흥을 위한 일종의 미끼, 소위 동물원의 판다(169p)와 같은 존재로 계속 써먹고 싶다면 어느 정도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이긴 하다. 기왕 고생고생해서 대나무 먹여 키웠으면, 어떻게든 세상에 내놓는 편이 시대의 감각을 조금이나마 살찌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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