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란 단순한 심심풀이 땅콩이 아니다. 모든 이야기에는 화자의 의도, 나아가 그 화자가 몸을 담고 있는 어떤 시공간의 각인이 아로새겨져 있다. 오랫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구전서사도 마찬가지다. 바르트의 표현에 따르면 일종의 메타 언어활동, 혹은 신화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이야기는 그 시대의 권력이 무엇을 중요시했는지, 어떠한 삶의 양태들을 강요했는지, 그리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란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누구의 명시적인 강요도 없이 오랜 시간 동안 자생적으로 생명력을 얻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 역동적으로 변모하는 구전서사는 그러한 의미에서 중요한 이야기다. 구전서사는 그것을 흘려보낸 입들이 처했던 그야말로 복잡다단한 개인적, 문화적, 정치적 상황들의 흐름을 역동적으로 시사한다.
현재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저술 당시 경기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였던 김영희 박사는 ‘부친살해’라는 참신한 주제를 돋보기 삼아 우리 구전서사를 톺아봤다. 오이디푸스로 대변되는 부친살해의 서사는 서양 신화나 고전에서는 흔하며, 오죽하면 프로이트도 이에 영감을 받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병증을 제안했다. 통상 서구 신화 속 부친살해는 누군가가 자기에게 둘러쳐진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운명의 주인공으로서 발돋움하려는 순간의 전환점이다. 주인공은 가공할 압박과 두려움 속에서 부친살해를 선택하거나 강요받고,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이를 성취해 낸다. 아버지의 시대를 종식함으로써 역동적인 새 시대를 열고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새기게 되는 것이다. “자식은 부모의 세계를 벗어나야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다(4p).” 여기서 부친살해란 말 그대로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아버지를 죽이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즉, 아버지가 속한 시대의 구습과 절연하여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것까지 부친살해의 메타포에 포함되며, 성공적으로 부친살해가 이뤄졌다면, 살해된 아버지는 단순히 역사의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혁된 현재를 있게 한 기틀로서 제의의 성전에 안치된다.
저자의 논의는 우리 구전서사에서 이와 같은 부친살해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구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부친살해의 통과의례만이 사회 혁신과 세대 전환의 역동성을 보여준다면, 유독 우리 구전서사에서 부친살해가 드물다는 것, 나아가 오히려 부친살해가 아닌 ‘자식살해’가 더 빈번히 구전되었던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부친살해를 열쇳말 삼아 주목할만한 네 가지 유형의 이야기들을 선별했다. 이에 따르면, 첫째, 부친살해보다 부친탐색이 앞서 등장한다. 우리가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초기 신화들은 아버지 없는 영웅들로 시작한다. 건국 신화 속 혁거세, 김알지, 수로는 알에서 태어났다. 알에는 아비도 없고, 직접적 출생도 아닌, 일종의 간접적 2차 출생이다. 그야말로 근본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다. 그러니 주인공에게는 살해할 부친 자체가 없다. 부친살해를 회피한 것이다. 고승 아도는 “조위 사람 굴마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왔다가 고도령과 사통하(33p)”여 태어났고, 유리도 주몽이 잠깐 부여에 온 사이 예씨에게 장가들어 태어났다. 아도와 유리는 어느 정도 나이가 차 자각이 생긴 후 아버지를 만나는 여정을 한 후에 비로소 세상에 이름을 알린다. 부친살해가 아닌, 부친탐색을 통해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되었다.
둘째, 부친살해와는 정반대의 흐름, 즉, 자식살해가 빈번히 구전되었다. 노모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아이를 죽이는 부모를 다룬 손순매아 이야기, 노모의 병을 낫게 하려고 아들을 삶아 대접하는 동자삼 이야기, 시아버지가 죽을 위기에 빠지자 시아버지를 살리고 그 사이 자기 자식은 죽게 내버려 둔 며느리 이야기, 노부모가 자식을 죽였는데 그것을 눈감은 이야기 등 온갖 엽기적인 설화들은 가장 귀히 여겨 마땅한 자식을 죽여서까지도 부모를 섬겨야 한다는 극단적 내러티브로 효사상을 강요한다. 이 이야기들에서 흥미로운 점은 부모를 위해 자식을 죽여야 하는 상황의 극단적 파토스에 대한 반대급부로 허울뿐인 거짓보상이 주어져 자식살해의 죄책감을 애써 무마시켜 준다는 것이다. 자식을 죽이려 땅을 파다가 석종을 발견해 나라님으로부터 보상을 받고(손순매아), 자식을 죽였으되 그 자식이 다시 살아서 돌아온다(동자삼). 하지만 보상이 무엇이 됐건 자식을 죽이려 했다는 것, 혹은 한번은 실제로 죽였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노부모를 위해 자식을 죽이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주된 발의자 또는 행위자가 여성인 ‘며느리’로 설정되어 있고, 죽는 자식은 ‘아들’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들이 자기 부모 챙기는 것은 너무 당연해서 재미가 없다. 그런데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해 극단적인 의사결정을 제안한다면? 그리고 그 희생의 대상이 당시 그 귀하디귀하다는 생때같은 아들이라면? 부모 중에서 ‘모’로, 자식 중에서 ‘자’로 설정된 이 두 가지 극단적 변수가 효사상의 성역화를 위해 한 지점에서 결합되면서, 자식살해를 통한 효의 완성이라는 신화는 이중의 충격요법으로 작동한다.
셋째, 자식살해 후 단순히 사회 기득권적 가치에 손을 들어주는 일차원적 결론에서 벗어나, 뒤늦은 회한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날개 달린 비범한 자식이 태어나자 친족 및 이웃 공동체와 공모해 자식을 죽이는 아기장수 이야기, 그리고 비범한 아이가 태어나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어머니의 실수로 야심이 발각되어 미처 뜻을 이루기 전에 죽임을 당하는 우투리 이야기는 기득권적 공동체가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 싹을 꺾어버리는 과정을 은유한다. 두 이야기에서 비범한 아이는 가족과 사회의 몰인정으로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지만, 아이가 떠난 자리에 신성한 용마가 등장한다거나, 아이가 뜻을 이루지 못하여 위대한 변혁의 가능성이 소멸되고 말았다는 회한의 감정이 뒤를 잇는다. 이는 자식살해를 효사상의 완성으로 포장하려 했던 두 번째 이야기 유형과는 전혀 다른 여운이며, 비범한 천재나 영웅의 면모를 단순한 차이의 기호로 받아들여 섣불리 축출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기며 사회혁신을 위한 작은 씨앗을 심는다. 구전서사가 주로 채택하는 기득권 체제의 유지라는 주제의식에서 한발 빗겨나 있는 것이다.
넷째, 본격적인 부친살해가 일어나지는 않더라도 자식이 부모보다 나을 수 있다는 이야기들, 혹은 자식으로 인해 부모가 감화되는 이야기들이 일부 존재하며, 이들 이야기는 우리네 독특한 현실을 반영한 부친살해의 징후로 해석할 수 있다. 어른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현답을 제시하는 아지설화, 그리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자기만의 가정을 꾸리고 성공을 일궈낸 여성(선화공주, 복진 며느리, 내복에 산다, 평강왕의 딸)의 이야기는 자식이 아비를 초월했다는 주제를 담은 몇 가지 드문 사례이다. 후자에 속하는 설화에서 딸은 여성에게 씌워진 당대의 사회적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스스로 입신양명하지 못하고 남편을 변화시키거나 잠재력을 끌어 올려주는 형식으로 우회적 성공의 경로를 채택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또한, 아비의 구세계를 완전히 청산한다기보다는 그가 정해 놓은 굴레를 벗어나 결국 아비로부터 후회, 성찰, 회환 따위의 감정을 끌어내는 수준의 성취에 그친다. 하지만 부친살해가 부재한 우리 구전설화의 토양에서는 이 정도 수준의 미미한 전복도 의미 있는 발자취로 포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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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떤 글에서 이 책을 소개받았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여튼 어떤 문헌에서 우리나라에는 서양과 달리 오이디푸스 신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읽었고, 그 주장에 이 책이 참고문헌으로 달려서 바로 장바구니에 넣었다. 오래전부터 관심을 두고 있던 주제였다.
신화는 한 시대, 한 민족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메타 언어활동이다. 견고하게 정립되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신화는 특정 문화권 전체의 구체적 삶의 양태들에 어떻게든 그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그러한 점에서 서구 신화는 그들의 역사와 가치관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주요 관문이 되지만, 알면 알수록 이 양놈들의 신화란 대단히 폭력적이고 난잡하기 일쑤여서 도대체 이놈들이 모태에서부터 주입받는 사고의 기저란 어디서부터 글러 먹은 것인지 종잡을 수 없을 때가 많다. 대형서점 어린이 코너를 가득 메우고 있는 저놈의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는 사실상 유해 매체로 분류해야 마땅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이 험난한 세상에 대한 일종의 예방주사로 봐야 하는지 혼란이 오기도 한다.
그 무수한 출혈의 응고와 재응고로 빚어낸 신화적 메타포 중에서도 오이디푸스 신화를 긍정한다면, 그것을 일종의 사회적 변혁, 새로운 세상의 도래, 세대교체 등으로 포장할 수 있을 텐데, 이러한 D.N.A.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의 신화적 세계관은 세대교체를 용납하지 않을까? 기득권의 끝없는 승리였을까? 변화는 있어도 변혁은 없었던 것일까? 애석하게도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간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부친살해의 신화가 없는 곳이고, 동시에 존댓말 체계가 가장 발달한 언어를 사용하는 곳이다. 교실에서 질문하기 위해 든 손이 가장 적은 곳이고, 연인이 결혼하기 위해서는 무려 부모의 허락이라는 것을 받아야 하는 곳이다.
우리는 자신을 역동적이라고 정의할 때가 많다. 한강의 기적! 붉은악마와 4강 신화! 다이나믹 코리아!(혹자는 이 말이 다이너마이트를 연상시켜 핵전쟁 위기에 놓인 한반도를 은유한다고 비꼬기도 한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얼마나 사회의 역동성이 부족하길래 다이나믹 코리아를 스스로 외치고 다녔을까. ‘내가 다이나믹하다는 것을 제발 좀 알아줘.’ 착각하지 말자. 이 사회는 절대 말랑말랑하지가 않다. 그냥 성격이 급한 것을 역동성으로 착각하고 산 것뿐이다. 이 사회가 그렇게 말랑말랑했다면 인구절벽의 위기에서 매일같이 애 좀 낳아 달라고 정부가 사정사정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저자가 머리말 첫페이지에 남긴 연구의 출발점은 내게 깊숙이 와닿았다. “한 연구자가 어떤 주제를 선택하거나 구성하는 데에는 반드시 개인적인 계기가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3p).”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모든 연구자는 내면에서 우러나온 자발적 주제에서 가장 뛰어난 성과에 도달한다. 저자는 칠남매 중 막내였는데, ‘딸-딸-딸-딸-딸-아들-딸’ 순이었다. 이 구조 속에서 오빠가 태어난 순간 가족은 이미 꿈꾸던 이상에 도달하여 완성된 상태였고, 저자는 탄생과 동시에 잉여적 존재가 되었다. 어떻게든 삶의 이유를 찾는 여정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 여정에서 부친살해에 강렬히 끌렸으리라. 고흐는 죽은 형의, 알튀세르는 죽은 작은아버지의 ‘대체물-잉여’로 태어났다. 푸코는, 그리고 데리다의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거부하고 자기 이름을 스스로 선택했다. 그 누구도 다른 누군가의 대체물이나 잉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자기만의 이름을 가져야 한다.
나도 이 주제에 끌린다. 내가 잉여적 존재여서가 아니라, 나의 ‘청소년-청년기’ 전체가 홀로서기를 위한 투쟁으로 요약되기 때문이다. 7부 능선쯤은 넘었을까? 문득 악몽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9부 능선까지는 아직 먼 모양이다. 개인적 삶의 성숙을 위해서나 사회 전반의 진보를 위해서나 부친살해는 혁신의 다른 이름으로 긍정되어야 하며, 이 은유가 직관적으로 풍기는 흉측함으로 인해 섣불리 축출되지 않도록 섬세한 파종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것이 이 시대의 신화학자들이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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