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로 돌아보는 나, 그리고 “우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Vladimir Nabokov(1955), Lolita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의 양심이란
아름다움을 즐긴 대가로 치르는 세금 같은 것”

450p

“나에게 소설이란 심미적 희열을, 다시 말해서 예술(호기심, 감수성, 인정미, 황홀감 등)을 기준으로 삼는 특별한 심리상태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는 느낌을 주는 경우에만 존재 의미가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500p)

1. 들어가며

어떤 텍스트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대명사가 생성되었다면, 그 텍스트는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보장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 대명사가 천사 혹은 악마 중 누구의 편에 섰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일단 대명사가 생성되려면 많이 읽혀야 하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많이 논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끝없이 이야기를 생성한 고유명사만이 비로소 대명사가 된다. 그런 일은 범작들에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수작만이 대명사를 창출할 수 있다. 1930년에 출시된 스카치테이프의 품질이 거지 같았다면, 그 이름의 자리는 금세 투명테이프에 내줬을 것이다.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이 생겨나서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되는 배경에도 당연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Nabokov)의 수작이 있다. 이제라도 읽어보니 왜 여기서 대명사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알겠다.

나보코프는 대단히 현실적인 인물을 만들어냈다. 이름부터 ‘동어반복-상호참조’적인 화자 험버트 험버트는 유럽의 쇠락한 부르주아 가문에서 나고 자란 문예인으로, 대단한 삶의 의지를 지닌 인물이라기보다는 주어진 환경에 적절히 타협해 가며 쉽고 편한 길을 찾아 방랑하는 인물이다. 자칫 서사를 발목 잡을 수 있는 지리멸렬한 생계를 가문과 유산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퉁치고, 평생을 적당한 성취와 열렬한 사랑 타령에 쏟아붓는 그에게는 어린 시절에 실패한 첫사랑인 애너벨에 대한 회한이 강렬한 잔상으로 남아 있다. 그 기억이 평생을 짓누르며 그때 그 시절, 바로 그 나이대 소녀, 이른바 ‘님펫’에 대한 도착적 강박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그의 비뚤어진 페도필리아를 ‘실패한 첫사랑’ 운운하며 부연해주는 것 자체가 험버트의 알리바이―아니, 작가 나보코프가 험버트를 경유로 던져 놓은 알리바이―에 넘어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알리바이를 떠올리는 이유는 험버트 자신이 이 회고록(혹은, 사후 법정 변론)에서 시종일관 지긋지긋한 애너벨 타령으로 일관했기 때문이요, 심지어는 서두부터 직설적으로 “애너벨의 죽임이 안겨준 충격 때문에 그 악몽 같은 여름날의 좌절감이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것이 연애를 가로막는 영구적인 장애물로 작용하는 바람에 청춘을 쓸쓸히 보낼 수밖에 없었다(25p)”고 노골적으로 적시했기 때문이다.

온갖 정신적 문제를 겪는 사람 중에서도 극히 소수만이 자기 객관화에 성공해 스스로 정확하게 문제의 원인을 규명해 낸다. 애초에 그렇게 쉽게 원인을 규명해 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정신적 문제에 시달릴 이유도 없다. 험버트가 그러한 소수에 속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어떤 문제가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환경과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에게 주어진 텍스트가 험버트의 고백뿐이므로 그냥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험버트가 님펫에 집착하는 문제를 타고난 천성이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그의 말대로 실패한 첫사랑의 상처가 만들어낸 강박증이라고 봐야 할까? 어느 쪽이 됐건 벌어진 일들의 결과를 합리화할 수는 없겠지만, 진단결과에 따라 해법이 달라진다는 것은 염두해야 할 것이다.

2. 생동하는 인물

다시 현실성의 문제로 돌아와, 우리가 이 텍스트에서 험버트의 생생한 육성을 느끼는 까닭은 그가 겪는 늘어짐, 긴박함, 초조함, 흥분, 분노, 격정, 회한 따위의 변덕스러운 감정들이 팔딱거리는 문체를 뚫고 시시각각으로 흘러넘치기 때문이다. 경멸하는 누군가를 향해 배배 꼬는 언어유희, 초조하고 긴박한 상황을 다급하게 뛰어넘으며 미처 완성되지 못한 엉성한 문장들, 애써 자신을 포장하려 할 때 현학적으로 젠체하며 문학을 논하는 모습들을 보노라면, 이 글을 쓸 때 나보코프가 완전히 상황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음을, 그리고 험버트라는 인물에 완전히 동화되었음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얼마나 재밌었을까! 오해를 우려해 소심하고 비굴하게 첨언 하자면, ‘현실 세계 속에서는 차마 저지를 수 없는 가상의 악행에 완전히 몰입되어 대리만족을 느끼며 얼마나 재밌었을까!’가 아니라, ‘자기가 쓴 텍스트 속에 빨려 들어가서, 그로 인해 궁둥짝을 붙이고 앉은 현실을 까맣게 잊을 수 있어서, 나아가 이 글을 읽고 까무러칠 세상을 상상하며 얼마나 재밌었을까!’ 글을 쓰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천상계를 떠다니는 나보코프와 저 아래 지하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나를 감히 비교선상에 놓는 것조차 죄악이겠지만, 이렇게 몰입하며 써 내려갔을 그 경험을 일생에 단 한 번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인생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스티븐 킹(Stephen Edwin King)은 좋은 글을 쓰려거든 탄탄한 플롯을 만드는 데 집착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인물을 만들어내라고 했다. 현실감 있고 사연 많은 인물 하나만 제대로 만들어 놓으면 이야기는 그 인물이 알아서 생성해 낸다는 것이다. 정말 좋은 지적이다. 물론 플롯 구상보다 인물을 만드는 것이 더 쉽다는 보장은 없으나…. 어쨌든 킹보다 50년 정도 인생 선배인 나보코프도 아마 그런 창작법을 따르지 않았을까 싶다. 험버트가 하는 짓거리들은 악행의 정도만 다를 뿐이지 누구나 이미 적당히 하고 있는, 혹은 하고 싶은데 억지로 참고 있는 것들이다. 그의 행실은 보통의 사람들이 겪는 사고의 흐름을 따라 장소에서 장소로, 인물에서 인물로 유동하며 물 흐르듯 전개된다. 중간중간 복선을 깔아 놓기는 하나, 긴밀하게 짜인 느낌은 아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그렇듯, 우연과 감정과 욕망의 삼중주를 따라간다. (그러고 보니 이 두 통속 소설가는 묘하게 통하는 지점이 있다.)

3. 「롤리타」의 인물은 거울이다

자기가 진정 집착하는 대상에 대해서라면 정말 하찮은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저 꼴사나운 작태를 보라. 돌로레스의 학급 명단을 보자마자 시처럼 암송하고 줄줄 외워버리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그런 식의 유사한 짓거리를 누구나 해봤겠지.

“이렇게 여러 이름이 모인 특별한 자리에서 장미꽃 두 송이를 경호원처럼 거느린 ‘헤이즈, 돌로레스’를(그녀를!) 보게 되다니 정말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다.”

85-86p

처음 같이 보낸 밤에 대해서 엄청나게 구체적이고 너저분하게 써 내려간 대목에서는 자신에게 둘러쳐진 죄의식을 어떻게든 합리화하려고 심리적 알리바이를 층층이 쌓는 식자 특유의 비굴함이 느껴진다.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그날 밤의 떨림과 더듬거림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설명하는 이유는 내가 결코―지금도, 그때도, 앞으로도―잔인무도한 악당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입증하고 싶기 때문이다.”

209p

아동 성범죄자라는 법적, 행정적 카테고리에 험버트가 자기 자신을 직접 끼워 넣는 거의 유일한 대목(저자의 권유와 달리 아직 한 번 밖에 안 읽었으므로 그런 대목이 또 있는지는 잘 모름)에서는 자기 카테고리의 인물들 전체를 변호하려 드는데, 이렇게 자기 특수성을 교묘하게 일반화하며 사안의 첨예함을 뭉툭하게 깍아내리는 그런 언사를 우리는 정말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을까.

“남녀 배심원 여러분, 어린 소녀와 더불어 굳이 성교까지 가지는 못하더라도 달착지근한 신음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짜릿짜릿한 육체적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성범죄자의 대다수는 사실 그리 사악하지도 않고 소극적이며 소심하고 서투르기 짝이 없는 풋내기들입니다.”

141p

아무리 언어유희와 지식과 궤변과 임기응변을 버무려 자기를 포장하려 해도 지탄받는 짓거리가 축적되다 보면 어느 순간 어딘가 잘못됐음은 본인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다. 사안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애써 망각하거나 왜곡하는 역량에 차이가 있을 뿐.

“우리가 기괴하고 짐승 같은 동거생활을 하는 동안,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의 롤리타는 날이 갈수록 가정생활이 아무리 불행해도 근친상간의 패러디 같은 관계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457p

험버트가 진짜 살아있는(아니, 한때 살았던) 인간이라는 사실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은 롤리타에 대한 감정이 묘하게 탈색된 2부부터다. 그간 줄기차게 거친 욕망의 기관차에 올라탔던 통속소설은 여기서부터 갑자기 심리-서스펜스 소설로 선회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층위의 문학적 지평을 열어젖힌다. 간사하게도 인간은 그토록 갖고 싶었던 것을 정작 갖게 된 순간, 아니 잠시나마 가졌다고 착각한 순간, 왜 그토록 절절했던 욕망으로부터 싸대기를 얻어맞는 것일까?

“그녀에 대한 애정은? 전설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내 불타는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욕망의 안개가 말끔히 걷히고 무서울 정도로 정신이 맑아졌다. 아아, 그녀가 변해버렸구나! 지금 그 얼굴색은 저속하고 구질구질했는데, 더러운 손가락으로 남의 화장품을 푹 찍어 씻지도 않은 얼굴에 처덕처덕 처바르는, 화장품이 불결하든 말든, 여드름균이 옮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 여느 여고생과 다를 바 없었다.”

322p

모든 일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선명해지고, 다시 거기에 시간의 흐름이 더해지면 망각의 늪이 잡아당기기 시작한다. 사랑이 곁에 있었던 때는 내 욕심을 채우기 바빴지만, 떠나간 빈자리는 이내 회한만이 채운다. 그때는 늦었다. 사소하고 애매하고 우연한 단서들조차 자기 욕망을 투사해 보고 싶은 대로 보며 재조합한다. 그래도 늦었다.

“유리창을 통과한 알록달록한 빛의 장난으로 낯선 글씨가 왜곡되어 롤리타의 글씨처럼 보이는 바람에 기절할 듯이 놀라 그 옆에 있는 항아리에 기대야 했고, 하마터면 그것을 내 납골단지로 삼을 뻔했던 일도 벌써 여러 차례였다.”

419p

익숙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현실이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린 순간, 스스로 잘하고 있다며 합리화했던 믿음의 성은 퍼서석 무너지고, 그 빈터에 남는 것은 오직 정녕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왔다는 회한뿐이다.

“지금 이렇게 괴로워하며 기억을 떠올려보니 그날과 비슷한 일이 있을 때마다 롤리타의 심정은 무시해버리고 오히려 비열한 나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 내 방식으로 버릇이었다.”

456p

하지만 진짜 압권은, 그러니까 나보코프가 직조해낸 가장 활력 넘치는 인물은 주인공 험버트가 아니라 그에게 이용만 당했던 지고지순했던 샬럿이었다. 험버트와 롤리타의 만남을 위해 중간에서 다리만 놓은 채 1부 중반부에 요절해 버리는 이 비련의 캐릭터는 비록 짧은 분량의 존재감만을 드러낼 뿐이지만, 편지 한 통으로 가장 입체적인 인물상에 등극한다(109-111p). 험버트에게 내내 외면받고, 조롱받고, 몸과 마음과 보금자리를 다 내주고, 차곡차곡 쌓아온 미래의 꿈과 희망마저 빼앗긴 샬럿은 영원한 비밀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그 진실을 마주하고 절절한 마지막 편지를 써 보낸다. 설정상으로는 험버트가 그 자리에서 즉시 찢어버린 편지를 나중에 회상해 적어 놓았다는 것이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사진기억력’을 지닌 인간이 아니고서야 회상이 이렇게 생생할 수는 없다. 이중의 인용으로 위장한 이 편지는 끊어낼 수 없는 지독한 사랑과 그에 비례하여 휘몰아치는 배신감의 소용돌이, 그리고 그 충격으로 인한 횡설수설까지 적재적소에 보태져 충격과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한 인간의 위태로운 사고 흐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오직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영토에서만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는 당연한 이치를 여기서 다시금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애정, 기대, 열정, 분노, 애증, 회한, 그리고 정신착란이 이토록 집약적으로 한데 응축된 텍스트를 본 적이 없다.

4. 다시 “우리”를 생각한다

그렇다. 나보코프는 그냥 글을 잘 쓰는 소설가가 아니라 한 인간의 총체성을 구현해내는 능력이 탁월한 것이다. 한 사람의 뇌에는 은하계의 별 만큼 많은 뉴런이 존재하는데, 그런 복잡한 신경 연결 체계를 언어로 모사해내는 나보코프는 어찌 보면 자기 언어의 세계에 작은 은하를 창조해 낸 위인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의 은하에는 오늘도 크고 작은 혜성이 끼어들어 새로운 이야기를 보태고 주워섬긴다.

밑도 끝도 없는 언어유희와 상호참조로 뒤범벅된 유별난 이 ‘심리-범죄-블랙코미디’ 소설은 엄청난 해석의 지평과 악몽 같은 대명사를 남기며 그 질긴 생명력을 앞으로도 수백 년은 더 유지할 성싶다. 작가의 언어 세계를 침탈하고 싶은 독자에게 이보다 좋은 선물은 없겠지만, 그 대명사가 주는 사회윤리적 압력으로 인해 읽어보지도 않고 손가락질부터 하거나, 혹은 기껏 용기를 내 책장을 열었지만 온갖 인용과 상징의 홍수에 떠밀려 결국 중도에 나가떨어진 독자들이라면 덧붙인 작가의 말을 다시 한번 새겨볼 필요가 있겠다. “이 장면들이야말로 내 잠재의식 속에서 이 책의 구조를 결정해버린 미빌 요충지들이며 좌표들이지만,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건 「어느 매춘부의 회고록」이나 「그로스비 경의 사랑」과 같은 계열의 책이라고 생각하면서 「롤리타」를 읽기 시작한 독자들은 이런 장면들을 건너뛰거나 별생각 없이 지나가거나 아예 거기까지 읽지도 못하리라는 점이다(502p).” 그렇다. 위대한 예술가란 필연적으로 얼마나 외로운 사람들인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고된 여정에 올라야 하나? 이건 작품이 얼마나 인기가 많고, 얼마나 많이 팔려나갔는가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문제다. 어떤 작품이 많이 팔렸다는 이야기는 무수한 적들이 주변에 몇 겹이나 촘촘하게 둘러쳐졌다는 이야기기도 하니까.

끝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말 그대로 “우리”의 정체성이다. 나보코프는 이 책에서 선정적 쟁점만을 부각하려 드는 호사가들을 상태로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어린애도 아니고, 무식한 비행청소년도 아니고, 동성애를 즐기며 뜨거운 밤을 보내고 나서 불건전한 부분을 모두 삭제한 고전을 읽는 모순된 상황을 감내해야 하는 영국 사립학교 학생들도 아니다(502p).” 그건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으면, 만약 우리가 그런 존재가 아닌 게 아니라면,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생리적 충동의 일면들은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점점 무식한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지식 확산의 경로와 방법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결과적으로 인류의 지식은 총량적으로나 평균적으로나 분명 늘었다. 하지만 지식과 신념의 치우침이 문제가 된다. 르네상스적 인간으로의 회귀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자신이 내뱉는 만큼은 남의 이야기도 들어줄 여유가 필요한데, SNS가 부추기는 확증편향의 문화는 어느 순간 도를 넘어 모니터를 뚫고 나와 현실정치까지 집어삼키고 있다. 우리는 편향된 헛똑똑이들이 세상의 주인으로 부상하기 직전의 폭풍전야를 보고 있다(“요즘 젊은것들은 나약하고 버르장머리 없다.”고 했다는 소크라테스를 다시금 인용하시려거든 차라리 저리 가세요).

지금 우리는 나보코프가 전제한 그 “우리”와 동등한 인격체인가, 그저 약간 덜떨어졌을 뿐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종인가? 이 소설을 문제적이라고 정의하려거든 우선 이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할 것이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워드프레스닷컴에서 웹사이트 또는 블로그 만들기

위로 ↑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