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Vladimir Nabokov(1955), Lolita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의 양심이란 아름다움을 즐긴 대가로 치르는 세금 같은 것” 450p “나에게 소설이란 심미적 희열을, 다시 말해서 예술(호기심, 감수성, 인정미, 황홀감 등)을 기준으로 삼는 특별한 심리상태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는 느낌을 주는 경우에만 존재 의미가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500p) 1. 들어가며 어떤 텍스트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대명사가 생성되었다면, 그 텍스트는... Continue Reading →
김영희의 「한국 구전서사의 부친살해」
이야기란 단순한 심심풀이 땅콩이 아니다. 모든 이야기에는 화자의 의도, 나아가 그 화자가 몸을 담고 있는 어떤 시공간의 각인이 아로새겨져 있다. 오랫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구전서사도 마찬가지다. 바르트의 표현에 따르면 일종의 메타 언어활동, 혹은 신화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이야기는 그 시대의 권력이 무엇을 중요시했는지, 어떠한 삶의 양태들을 강요했는지, 그리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란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Continue Reading →
오자키 테츠야의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
이런 비슷한 제목의 책이 전에도 있었다. 테리 스미스(Terry Smith)의 「컨템포러리 아트란 무엇인가」. 꽤 많이 팔린 책이기도 하다. 표지 디자인도 은근히 비슷하다. 노린 것 같다. 제목도 사실상 같다. ‘현대미술’이나 ‘컨템포러리 아트’나 일반적인 용례상 같은 시기와 대상을 가리킨다. 다른 점이 있다면, 테리 스미스는 좀 더 이론적으로 고찰하는 편이고, 오자키 테츠야는 현장 중심의 접근에 가깝다. 그런데 현장 중심의... Continue Reading →
캐서린 스푸너의 「다크컬처」
Catherine Spooner, Contemporary Gothic 오늘날의 유령은 어디에? 헌책방의 진정한 의미는 책값의 절약 같은 단편적인 효과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보다는 의외성의 미학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쿰쿰한 서고가 천장까지 닿아 있고, 누리끼리한 책들은 책장에서 미어져 나와 복도까지 장악한다. 사람의 공간에 책을 둔 것이 아니라 책의 공간에 사람이 제멋대로 침입해 굽이굽이 유랑하는 맛이다. 책들은 못내 겨우 사람 하나 비집고... Continue Reading →
김상근의 「삶이 축제가 된다면: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김상근 교수의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시리즈 두 번째 편이다. 첫 번째는 로마였고, 이번에는 베네치아, 세 번째는 역시 피렌체다. 이번 편만 제목 짓는 방식이 좀 다르다. 도시명이 표제에서 빠졌다. 이런 식이라면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할 때 다소 손해를 보겠는걸? “축제”라는 단어 자체를 그대로 “베네치아”와 등치시켰다고도 볼 수 있겠다. 구성은 전작과 같다. 장소 하나를 정해 놓고, 거기에 얽혀... Continue Reading →
제임스 엘로이의 「아메리칸 타블로이드」
James Ellroy, AMERICAN TABLOID 영화 「LA컨피덴셜(1997)」은 킴 베이싱어(Kim Basinger)가 육감적으로 전면에 등장한 포스터 이미지로 소년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지난해 여름에 어느 싸구려 호텔에서 IPTV의 하이퍼링크를 유랑하다가 그 포스터를 우연히 만나 반가운 마음에 재생 버튼을 눌렀다. 생사를 넘나드는 긴장감, 배신과 반목과 화해가 뒤엉킨 갈등 구조, 담담하고 묵직한 연출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원작자에 대해 찾아보다가 이 소설에... Continue Reading →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전쟁: 성스러운 폭력의 역사」
“어떤 신앙 전통도 군사적으로 막강한 제국의 후원이 없었다면 ‘세계 종교’가 되지 못했을 것이며, 모든 전통은 어쩔 수 없이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개발하게 된다.” 30p 모든 전쟁은 자원 경쟁에서 비롯된다. 인류는 더 많은 식량, 자원, 토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을 벌여왔다. 전장의 깃발에는 온갖 숭고하고 휘황찬란한 가치가 아로새겨져 나부끼지만, 사실 자원 경쟁의 틀을 넘어서는 고도의 대의명분은... Continue Reading →
본인을 넘어선 대리인: 「지능의 탄생」에 부쳐
최근 인공지능의 눈부신 발달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세상을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은 유토피아적 황홀경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인공지능에 기반한 유토피아의 상이 점차 뚜렷해질수록 그곳에 진정한 의미에서 오늘날의 ‘나’는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동반된다. 역사상 모든 기술혁신의 찬란한 열매는 인간소외라는 어두운 그림자도 수반했다. 자동차는 마부를, 기계는 공장의 단순 노무자를, 전구는 가로등 점등사를 밀어냈다. 당시에 직업의 현장에서... Continue Reading →
손원평 소설집, 「타인의 집」
미화된 이야기가 없는 세상은 오지 않겠지만 ❚ 망각과 미화 손원평의 첫 번째 소설집에는 온통 가슴이 답답해지는 이야기뿐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은 나의 아픔을 이해해 주지 못하거나(「4월의 눈」), 애초부터 평생 나를 무시만 해온 인간이거나(「zip」), 아예 상상을 뛰어넘는 괴물이다(「괴물들」).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더라도 타인을 향한 순수한 선의는 천추의 한으로 돌아오고(「상자 속의 남자」), 세대와 민족 간 혐오는 극에 달해 일대... Continue Reading →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미술 1900-2020」
정론 미술사 생성 기관의 책무 국립현대미술관이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사의 정론을 만드는 공식적 기관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기관은 가장 방대한 컬렉션, 가장 많은 인재, 가장 큰 규모의 투자를 앞세워 미술사 담론을 주도해 나간다. 국립 기관으로서 자국 미술사를 긴 호흡으로 직접 정리하겠다는 야심이 그동안 왜 없었겠느냐 만은, 2021년에야 이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1969년 경복궁 미술관 개관... Continue Read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