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이 시대적 화두가 된 세상에서, 그것을 거스르려는 조그마한 움직임일지라도 조리돌림을 각오해야 한다. ‘민주주의=절대선’이라는 제국주의적으로 강요된 등식에 다양성이 무비판적으로 침습되면서 단순한 의견이나 취향의 표명마저도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자연스럽게 비평의 영토까지 침범한다.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비평은 편파적이고 열의에 차고 정치적이어야 한다.”[1]는 것이 기존의 패러다임이었다면, 이제는 “모든 것에 좋은 이유가 하나 이상은 있을 것이다. 고로 무슨... Continue Reading →
[에세이] 혼돈에서 사후생으로: 양은영의 2022년 회화
예술가는 자신의 눈으로 본 세상을 작품의 형태로 투사한다. 그 작품은 미술계, 혹은 그 울타리 밖 더 넓은 세상의 한 가운데에 놓여 소통의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작품이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는 그 소통이 성공할지, 혹은 실패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많은 예술가가 그 성공의 여부에 관심이 없다는 듯 짐짓 초연한 표정으로 작업실을 지키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소통의 가능성이 완전히... Continue Reading →
손택, 키이우, 이태원 : 타인의 고통
“부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Susan Sontag(2003),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무더위 속에서 이 책을 읽고 이제야 글로 정리한다. 진작 썼어야 하는 데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덧 낙엽이 쌓인다. 먹고 살기 위한 글에 쫓기다 보면 사적으로 쓰는 글도 일처럼 느껴진다. 미뤄뒀던 글감이 어떤... Continue Reading →
린다 노클린의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Linda Nochlin(1971),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가리키는 곳을 보지 말고 그 손가락을 분질러라 「아트뉴스」 紙 1971년 1월호에 실렸던 에세이다. 미술사와 미술비평을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글이다. 그만큼 많이 인용된다. 만약 본인이 미술사를 공부했는데도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이라는 이름이 생소하다면 자신의 식견이 68혁명 이전 어딘가, 심지어 반 고흐의 노란집 어느... Continue Reading →
아즈마 히로키의 「약한 연결: 검색어를 찾는 여행」
누가 몰라서 못합니까? 미디어는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을 넘어 뇌의 인지 구조 자체를 바꾼다. 인간의 신경기전은 언어, 문자, 라디오, TV,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대대적으로 변화했다. 이 변화는 한 사람의 생애에 여러 차례 나타날 수가 없고, 한 번 나타나더라도 대단히 점진적이므로 체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변화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유선전화로 친구 집에 전화해서 친구 부모님께 아무개... Continue Reading →
[에세이] 전시장의 토르소: 비평적 전시문화를 위하여
"시간이 흐르고 초기의 매력이 점점 약해지다보면 언젠가는 아예 새로 태어나야 하는 때가 온다. 한때 아름다웠던 것이 모두 떨어져나가고 작품 그 자체만 남아 폐허의 형태로 서 있게 되는 때다."1) "진짜 귀중품들은 아주 꼼꼼한 탐사를 통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모든 과거의 연관관계로부터 벗어난 상들이 일종의 귀중한 물건들로─수집가의 갤러리에 있는 파편 혹은 토르소─ 나타나는 곳은 현재 우리의 성찰이... Continue Reading →
데이브 히키의 「보이지 않는 용: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데이브 히키의 전복적 시선」
Dave Hickey, The Invisible Dragon 아름다움은 죄가 없다. "아름다운 작품은 미덕 없이도 살아남는다. 아름다움 없이 미덕만 있는 작품은 그러지 못한다." 155p 1. 앵? 반 고흐? ㅎㅎㅎ^^;; 얼마 전 한 작가의 개인전 오프닝을 관람하고 뒷풀이에 참석했다. 아무래도 작가들이 모이면 작품과 작업 이야기가 오가게 마련이다. 대화가 이어지다가 ‘예술가들이 좋아하는 예술가’라는 흥미로운 주제에 이르러 모두가 ‘빵터지는’ 순간이 있었다.... Continue Reading →
존 버거의 「사진의 이해」 (제프 다이어 엮음)
John Berger, Understanding a Photograph "나는 내가 본 것들을 말로 표현하려고 노력한다."181p 존 버거(John Berger)가 평생에 걸쳐 해온 일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 적합한 자기소개는 없다. 그는 미술평론가라는 경직된 호칭보다는 그저 본 것을 말하는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꾼으로 남고 싶어 했고, 이 머나먼 땅에서도 그의 책들이 줄줄이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바람은 충분히 이루어지고... Continue Reading →
김훈의 「연필로 쓰기」
몸의 진실성 디지털 시대에 연필로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흑연심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쓰는 문장은 키보드로 후다닥 쓴 문장과 다른가? 단지 쓰는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그리고 ‘CTRL+Z’가 없다는 이유로 연필로 쓴 글이 더욱 신중하다거나 사색적이라고 포장할 수는 없다. 붓으로 쓴 글이라면 몰라도, 키보드와 연필은 그 정도로 멀지 않다. 저자가 제목에서 연필을 강조한 까닭은... Continue Reading →
[에세이] 오브제로서 인간: 에드워드 호퍼의 ‘일요일(1926)’
“너무 냉랭한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오브제가 눈앞에 보였다. 시간이 정지됐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열광시키는 오브제를 예술로 전화(轉化)한 모습을 통해 다시 한 번 경험한다.”에드워드 호퍼(1928) 2019년의 미국도 모르는 내가 1926년의 미국에 대해서 알 턱은 없다. 하지만 그때, 거기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는 사실은 안다. 아마도 그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외로운 그 남자의 눈빛은 경계로 가득하지만 우리를... Continue Read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