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연의 「명화로 읽는 미술 재료 이야기: 템페라에서 아크릴까지」

미술재료사와 즉물성 재료로 읽는 미술사다. 미술사 전반을 아우르지는 않는다. 부제가 암시하듯 회화사에 집중한다. 미술이 물질의 한계를 벗어난 시점부터는 간단히 암시만 하고 마무리한다. 최근에 이소영의 책이 비슷한 주제를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 책의 저자 홍세연은 미술재료학을 전공했던 사람이라 그보다는 더 깊게 들어간다. 구체적인 안료와 색깔 하나하나까지 세분하여 설명해 준다. 미술 전공자는 학교에서 이미 배웠을 내용이고, 비전공자라면... Continue Reading →

이채은 개인전, 「The Moment Your Smile Fades Away」 (송은아트큐브)

시각예술에서 회화의 왕좌가 찬탈당한 역사는 어느덧 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진부한 수사(rhetoric)가 됐다. 테리 스미스(Terry Smith)는 1970년경 이후로 어떤 경향도 시각예술에서 지배적 양식이 될 정도의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여기서 ‘경향’을 ‘매체’로 바꿔 써도 이질감이 없다. 수많은 갤러리들과 경매장에서는 여전히 거래의 중심에 서 있지만, 보도지면을 장식하는 각종 비엔날레, 미술상, 블록버스터 전시에서 미디어와 개념미술을 걷어 내면... Continue Reading →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John Berger)는 케네스 클라크(Sir. Kenneth Clark)와 마찬가지로 BBC 프로그램을 통해 미술사 담론을 대중화시켰다. 하지만 클라크가 예술과 문명의 관계에 관한 아카데미즘을 대중의 눈 높이로 매끈하게 고쳐 놓았던 것과 달리, 존 버거는 아예 미술을 이해하는 틀 자체를 전면 수정할 것을 촉구했다. 그 비장한 선언서가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1972)」이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Continue Reading →

마르크 샤갈 특별전: 영혼의 정원 展 (M컨템포러리 아트센터)

이름 자체가 신화가 되어버린 빈센트 반 고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샤갈의 인기도 만만치는 않다. 그의 몽환적이고 다채로운 색감과 신비로운 상징들, 인생역정의 이야기는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 감동에는 서양미술사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한 여자만을 향했던 대가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도 결부되어 있다. 그러한 인기 때문인지, 올해는 샤갈을 둘러싼 이례적인 사건이 벌어질 예정이다. 그의 특별전이 두 장소에서 동시에... Continue Reading →

예르미타시박물관展: 겨울 궁전에서 온 프랑스 미술(국립중앙박물관)

눈과 귀에 너무나도 선명히 남아 있는 '에르미타주'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예르미타시'가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의문을 품고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현지 발음을 최대한 준용하는 것이 최근의 한글 표기 경향인 것은 알지만, 예르미타시가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기관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 익숙해져야겠지. 이번 전시는 상당히 영리하게 테마를 잡고 있다. 18~20세기... Continue Reading →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 2017)

영화가 시각적 실험에 천착할수록, 서사의 재미와 감동은 반감되기 마련이다. 그런데「러빙 빈센트」는 고흐의 화풍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 놓는, 그야말로 영화사적으로 유래 없이 야심찬 실험을 단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재미와 감동을 놓치지 않았다. '미술 영화'로 그 비교대상을 한정해 볼 때,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이 실패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 성공을 거둔 것이다. 영화는 고흐의 사망 1년 후, 그 죽음에 얽힌... Continue Reading →

워드프레스닷컴에서 웹사이트 또는 블로그 만들기

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