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스 클라크의 「누드의 미술사: 이상적인 형태에 관한 연구」

우리의 눈은 늘 그 곳에 멈춘다. 늘 그것을 보고 싶어 하고 또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내 입을 다물고 만다. 그것에 늘 매혹되면서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거나 차라리 거부한다. 아니, 거부 당한다. ‘몸’은 이처럼 우리를 강하게 매혹하며, 동시에 매몰차게 배반한다.

늘 우리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바로 그것에 관하여 이토록 온전히 집중하고 있는 미술사 저술은 찾아보기 힘들다. 동일한 주제의 책은 많다. 하지만 그들은 대체로 지성과 감각, 둘 중 하나를 결여하고 있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왜 하나 같이 그렇게 누드에 집착했을까? 누드는 언제부터 시각 예술의 궁극적 아이콘이 되었을까? 그들이 진정으로 추구하고 싶었던 누드의 원형과 효과는 무엇이었을까? 이제 누드는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 경의 「누드의 미술사: 이상적인 형태에 대한 연구(The Nude: A Study in Ideal Art, 1956)」는 인류가 누드를 표상해 왔던 유구한 역사를 몇 번이고 되짚어가며 답을 구한다.

저자가 답을 구하는 방식은 지극히 편협한 그의 심미안에 근거를 두고 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천상과 자연의 비너스, 힘과 파토스를 각각 병치하고 있지만, 이러한 대립의 결과는 전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온건한 이성과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를 지지하며, 때로는 마치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처럼 고전적 규범을 찬양한다. 고전으로부터의 이탈에서 자연주의적 관찰의 결과라는 의의를 발견해주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그것이 타락이라는 점에 동의해주기를 원하고 있다. 고전적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집착도 그러한 태도의 발로인데, 로마 시대의 모각을 깎아 내리는 수많은 이유들 속에서 우리의 고개는 아주 작게만 끄덕여질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클라크가 가진 섬세한 눈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눈은 타고난 감각과 더불어 무수하게 축적된 관찰의 시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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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 책에서 눈을 땔 수 없게 만드는 몇 가지 이유들이 이 책을 명저의 반열로 올려 놓고 있다. 첫째로, 누드의 유형을 구분하는 칸막이가 매우 합리적이다. 저자가 아홉 개로 분류한 누드의 주제들은 매우 타당한 것이어서, 서양미술사 전반을 다시금 아울러 보아도 누드에 있어서 만큼은 이 밖의 주제를 꼽는 것조차 어렵게 느껴질 정도이다. 굳이 하나를 억지로 우겨 넣는다면, 노골적인 성애(性愛)의 모티브 정도가 있을까? 저자는 시대를 우선하지 않고 주제를 서술의 중심에 놓으며, 매 주제마다 최초로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주제 안에서는 별도로 단락을 구분하지 않는데, 그럼에도 그 안에서 소주제가 짜임새 있게 흘러간다. 또한 주제에서 주제로 넘어가는 연결고리도 매끄럽고 아름답다.

「누드의 미술사」 목차와 주제

  1. 알몸과 누드: 알몸과 작품 속 누드는 어떻게 다른가?
  2. 아폴론: 이상적인 남성의 누드
  3. 비너스1: 이상적인 천상의 비너스
  4. 비너스2: 세속적인 자연의 비너스
  5. 힘: 힘의 주체로서의 누드
  6. 파토스: 신에게 버림받은 고통과 절규의 누드
  7. 도취: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누드
  8. 또 하나의 관례: 고대에서 벗어난 고딕 취향의 누드
  9. 누드 자체가 목적인 누드: 육체와 형(形) 자체의아름다움을 추구한 누드, 그리고 동시대 경향

둘째로, 작품을 바라보는 섬세한 직관과 아름다운 표현이다. 영국 최고의 고등교육을 받았고, 31세에 내셔널갤러리 관장직을 수행했고, BBC다큐 <문명(Civilasation)>으로 미술사의 대중화를 이끌었던 선도적인 학자는 작품을 풀어내는 방대한 지식과 탁월한 해석력을 결부하여 학술서의 범주를 가볍게 뛰어넘는 비평의 미(美)를 선보인다. 특히 그가 고대의 계승자이자 미래의 길잡이로서 제시하는 미켈란젤로에 관해서 만큼은 미술사의 대가로서 지위조차 포기하고 만다. 클라크의 절절한 소네트는 르네상스 최후의 천재를 향한 지고한 숭배와 변호이며, 어쩌면 이 시대 마지막 낭만주의적 비평의 사례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표현들은 ‘유럽-주류-백인-남성’의 관점일뿐임을 감안하며 읽어야겠지만, 중립적 표현으로 점철된 서술들에 묻혀 지쳐있던 마음을 흔들어 깨워주며, 작품이 주는 감동과 영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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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이래 아카데믹한 데상의 정점으로 여겨져 온 이 유명한 그림은 최근에 이르러서는 약간 의혹을 띠고 바라보아지는 타입의 하나이다. 그것에는 위대한 선묘화가가 생명과 운동에 대한 그들의 본능적인 감정을 전달해 주는 그러한 자발적인 선의 약동이 결여되어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하나의 독립된 완성작품으로 간주한다면, 모든 중요한 결정부에 주의력을 집중하고, 끌과 같이 펜을 정열적으로 휘둘러 그것을 밀고 나감으로써 완전한 형태에 도달하려 하고, 마치 그것이 도망쳐 버리기나 하듯이 끝까지 따라잡으려는 미켈란젤로의 욕망을 그것은 얼마나 훌륭히 실현하고 있는가. 또한 창을 가지고 찌르려는 배경에 있는 인물 습작에도 같은 말이 적용된다. 이 인물은 미켈란젤로의 해부학 지식이 하나의 이상과 동화되고 또 그것에 동속돼있음을 보여준다. 근육조직이 이미 시뇨렐리의 악귀들에서처럼 눈에 거슬리거나 도식적이 아니고, 흐르는 듯 지속적이다. 그리고 모든 곳곳에서 그것은 인물에 운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데상이 상실되어 버렸단 말인가! <카시나 전투>를 본뜬 호캄 홀의 모사로써 한 인물에서 다른 인물로 더듬어 각 인물을 현존하는 두 세점의 습작으로 미루어 그려 가면, 우리의 가슴에도 어느덧 ‘아름다운 나체(bel corpoignudo)’에 대한 피렌체인의 열정이 되살아난다. 당시 ‘디세뇨(disegno)’란 성스런 말에 얼마나 고상한 이상이 함축되었었는지 깨닫게 된다. -249p

또한 미켈란젤로의 계승자인 로댕이 창조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짧고 멋진 말을 남겼다.

만일 그들이 걷는다면 그것은 파멸을 향한 행진이며, 만일 그들이 뒤돌아본다면 그것은 어느 복수의 천사가 두려워서이리라. -332p

셋째로, 육체와 건물을 양식의 연계로 설명하는 독창적인 관점이다.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육체는 영혼을 담은 집이다. 그렇기에 육체를 바라보는 시대의 감각은 우리를 둘러싼 구조물을 만들어내는 영감과 크게 다르지 않다. 파르테논 신전이 보여주는 질서의식은 폴리클레이토스의 아폴론과 연결되고, 고딕 성당의 늑재궁륭은 크라나흐(Lucas Cranach)의 늘어지는 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연계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철근콘크리트 구조물과 도구적 육체의 관계를 재검토하라고 은연 중에 촉구하는 것 같다.

1956년 초판이 나온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고, 미술 담론은 엄청난 속도로 풍부해졌다. 따라서 오늘날의 독자라면 이 명저를 존중하되, 이것이 진리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저자는 마지막 장을 통해 ‘누드 자체가 목적인 누드’를 옹호하고 있지만, 동시대 미술이 고전에 대비한 타락의 결과라는 점은 일관되게 전제하고 있다. 그리스 규범은 진리이며, 그것을 변형할 때 감동이 반감된다는 주장은 오직 규범을 철저히 공부한 자들에게 국한된 논의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클라크는 <라오콘>의 뒤통수에 놓여 있던 오른팔이 부당한 복원에 의하여 펴진 것을 애석해하고 있지만, 그때의 상태를 옹호할 관람객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으며, 그들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의 논의에서 누드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유럽의 백인이며,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는 비교 대상으로서의 가치만 지니는 타자이다. 저술의 범위를 무한정 확장시킬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해야 하지만, 모든 민족은 나름대로의 이유로 육체를 표현하거나, 반대로 그것에 완강히 거부해 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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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절판되어버린 이 책을 중고책방에서 운좋게 구했다. 개정 전의 1982년 초판이고, 1993년의 3쇄본이다. 이 녀석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고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나보다. 아무도 읽지 않은 옛날 책을 읽는 기분은 마치 소복한 만년설에 처음으로 발자국을 남기는 것과도 같다. 논문 한편을 쓸 수도 있을 것 같은 넉넉한 여백과 톡톡한 잉크 질감까지 느껴지는 견고한 활자가 매력적이다.

이런 좋은 책이 서점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멋진 문장들을 곱씹으며 책장을 덮는다.

벌거벗은 인체는 본래 우리가 그 자체를 즐거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고, 또 그려진 것을 기쁘게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영원불멸하게 하고 싶어한다.

선의 흐름은 시각예술에서 가장 음악적인 요소이며, 끊임없이 우리를 재촉하여 시간의 흐름 위에 태운다.

하나의 관념은 문자의 기술에 의해서보다도 오히려 시각적 형태를 통하여 그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아무도 자기의 시대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케네스 클라크의 「누드의 미술사: 이상적인 형태에 관한 연구」”에 대한 답글 1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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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난번의 독서 후기에서 하나의 정해진 관점이나, 하나의 진리가 없다는 점을 서술하셨는데 이번 글에서도 같은 관점이 드러나서 글을 읽는 지나가던 눈팅러에게도 경각심을 주네요.
    이번글은 좀 더 언어가 부드럽고 섬세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러면서도 감성적으로 글의 내용이 흐르기보다 내용적인 면에서 핵심은 잘 전달하고 있어 저 두꺼운 책을 읽지 않아도 될것같다는 생각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누드에 대해서 합리적 기준을 바탕으로 카테고리화한 점은 좋은데.
    , 고전미술 이외의 것에 대해서 타락했다고 보는 관점이 매우 맘에 안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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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는 영국 최고의 문화 엘리트이고 스스로도 작위를 받은 귀족이죠. 그가 보는 관점은 그의 태생적 맥락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만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의 글을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죠. 관점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고 또 반드시 가져야만 합니다. 그것이 너무 편협하고 배타적일때 삶이 메말라버린다는 것만 경계하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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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글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은 “이러한 표현들은 ‘유럽-주류-백인-남성’의 관점일뿐임을 감안하며 읽어야겠지만” 요부분이에요. 또한 글의 말미에 탈식민주의적 관점을 독서에 적용킨 것도 공부한 것을 한번 읽고 잊는게 아니라 적용시킨다는 점에서 좋네요~

        공부한걸 공부하고 잊는게 아니라 써먹는 게 확실히 더 좋은거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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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ㅋㅋㅋㅋㅋㅋ 후기구조주의 탈경계/혼종성 등의 단어 쓰시는거 보면 무슨 대학원 가셔야할거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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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양질의 글에 엉뚱한 댓글이지만 두번째, 세번째 사진에 나온 커피는 맛있나요? 라떼같은데 ..ㅜㅜ 맛있으면 좌표 부탁드립니다. 클로리스는 가보진 않았지만 익히 들어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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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번은 ‘고종의 아침’, 서울에서 거피를 가장 잘하는 곳 중 하나죠. 3번은 성수역 ‘카페 에이크’, 그냥 튀지 않는 맛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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