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mberto Eco, Numero Zero
그의 소설에 대한 첫 기억은 ‘좌절’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도 전에 「장미의 이름」을 읽다가 포기했기 때문이다. 핑계를 대자면 일단 어려운 이름이 너무 많았고, 초반의 전개는 너무 느렸으며, 고색창연한 문체도 까다로웠다. 더 정확하게는 인쇄본이 아닌, e북으로 그 작품을 읽으려 했던 오만함이 문제였다. 그것도 최초의 ‘아이패드 미니’로! 그 조악한 디스플레이로 에코를 맞이하려 했으니 얼마나 오만한가! e북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내 지론이 굳어진 계기였다. 가끔 플랫폼이 부당하게 본질까지 왜곡할 때가 있다.
작품은 어느 부도덕한 언론 재벌의 야심으로 기획된 신문 창간 준비팀을 다룬다. 이 팀의 출범에는 두 개의 트릭이 작동하고 있었다. 하나는 발행인 비메르카테의 뒤통수를 쳐 창간 준비 과정을 다룬 책을 출판하려는 시메이 주필의 트릭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책을 이름 없는 존재로서 대필하게 되는 주인공 콜론나의 트릭이다. 서두에서 은밀하게 손을 잡은 시메이와 콜론나의 이중 트릭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지겠지만, 그 모든 트릭은 단박에 없었던 일이 되고 만다. 극히 순수하지 못한 의도로 출범한 준비팀에서 유독 불필요할 정도로 순수한 열정을 담아 취재를 이어가던 기자 하나가 석연치 않게 살해당한 것이다.
그가 다루려던 사건은 이탈리아 현대사를 관통하는, 전후의 파시즘과 테러리즘과 바티칸이 뒤엉킨 거대한 음모의 일각이었기에 강한 심증을 남겼다. 하지만 그 죽음이 진짜 어두운 권력의 소행인지, 아니면 그저 공교로운 사고일 뿐이었는지 명확한 결론은 드러나지 않는다. 에코는 종반부 연인의 대화를 빌려 정확히 반반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특히 화자의 어린 연인 마이아는 초반에 다소 자폐적 기질이 있는 철딱서니 없는 아가씨로 나오지만, 음모에 휩싸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주인공을 위로하는 대목에서는 강한 정신력과 분별력을 보여준다(303p).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참으로 음모가 아닌, 그저 과대망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미궁에 갇혔지만, 진실과 상관없이 현재가 암울하다는 전망만큼은 분명하다. 세상에는 중요한 사건들이 있지만, 그 사건들은 이내 새로운 사건들로 묻혀버린다. 새로운 사건이 진정 더 중요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중요했던 어떤 사건이 언젠가부터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신문들은 뉴스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뉴스를 덮어서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아.”
250p
“나도 잊어버렸어. 마치 새로운 폭로 기사가 나올 때마다 이전의 뉴스를 지워 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야.”
309p
에코가 중심 무대로 신문사를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언론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지만, 이런저런 사건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끝도 없이 떠들어 댈 수 있는 사람들도 오직 거기에만 있기 때문이다. 1인칭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무솔리니 생존설, 파시스트 전복설, 스테이 비하인드 조직의 테러리즘 배후설, 그리고 파시스트-바티칸 동맹설 등을 장황하게 풀어내려면 끝없이 ‘썰’을 풀어내는 어떤 존재가 필요한데, 모든 것을 의심하는 장광설의 허언증 기자인 브라가도초가 바로 그러한 음모론의 발화장치로 작동한다. 체감상 소설에서 브라가도초의 장광설은 30% 이상 지분을 차지하는데, 음모에 관한 너무 구체적인 세부적 정황까지 발화로 처리하는 대목에서는 다소 안일하게까지 느껴진다. 현실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독자라면, 이 정도 수준의 발화장치는 에코 정도의 대가니까 용인되는 것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음모의 진실을 파헤치던 브라가도초가 의문의 살해를 당하자, 그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경청해줬던 주인공 콜론나도 덩달아 실존적 공포에 사로잡히는데, 그 공포감이 일소되는 계기도 다소 안일하다. 은신 중에 TV를 틀었는데, 거기서 그 음모론의 실체를 취재한 다큐멘터리가 나오는 것을 보게 됐고, 그걸 보니 브라가도초의 의심은 상당 부분 진실이었고, 그 진실이 전국 방송을 통해 백일하에 드러났으니 그렇게까지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이유는 없다는 식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주인공이 어떤 의지나 능력을 발휘하여 추가적인 진실을 파헤치거나 목숨을 이어나가는 대목은 거의 없다. 그냥 별 의도 없이 들은 이야기를 통해 위기에 처했고, (약간의 탈출극은 벌였지만) 그냥 별 노력 없이 연인의 돌봄을 받으며 TV를 보다가 공포감에서 차츰 벗어나게 됐다.
그런데 에코는 애초부터 이 이야기 속에 헐리우드식 영웅주의나 스펙터클한 위기탈출담을 심어 놓을 의도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짧은 소설에서 거창한 문학적 기교나 장치 없이 직설화법으로 언론과 자본이 결탁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암시한다. 현대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잉태된 전후 이탈리아의 난맥상을 이 술술 읽히는 짧은 소설을 통해 누구나 쉽게 꿰뚫어 보기를 바랐던 것이다.
권력 기구가 체제의 유지를 위해 허울뿐인 대리인을 내세우고, 실질적 폭력과 공포를 도구로 사용하고자 할 때, 언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언론이 시대의 진실한 목격자이기를 바라지만 실제로는 왜곡된 프레임만 찍어내는 공장일 때가 얼마나 잦은가? 에코는 진실과 거리가 먼 음흉한 의도로 출발한 신문사를 반면교사로 내세워 언론의 책략을 폭로한다. 그 책략을 포장하는 방식은 은유적이거나 아름답거나 섬세하지 않지만, 그만큼 명징하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무 근거가 없다면 취재 수첩이라도 인용하라(93p). 거기 적힌 내용의 정확성과 상관없이 뭐라도 인용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보도를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허점을 파고들어 인신공격하고 매도하라(93p). 판사도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아무 허점도 없는 사람이란 없다.
셋째, 정의의 사도가 되려 하지 마라(117p). 정의보다는 흥미, 희열, 감정의 고조를 쫓아라.
넷째, 상투적인 표현을 써라(146p). 어떤 표현이 상투성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그 효과가 검증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섯째, 진실을 파헤칠 자신이 없다면 그냥 감정에 호소하라(218p).
콜론나와 마이아는 뜻하지 않은 거금을 들고 제3국으로 날아가는 회피적 결론 대신, 전혀 변화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에서 반쯤 눈을 감고 다시 지리멸렬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구조적 모순에 발을 담근 우리가 일요일 밤에 침상에 드러누운 채 내뱉는 한숨 속에 섞인 그 마음과 같은 마음이다. 회피도, 전복도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버텨내자. 대신 휩쓸리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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