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훈 개인전, 「필드 field」 展 (갤러리 P21)

이면과 단면

경리단길의 수많은 카페와 레스토랑 사이에 P21이라고 적힌 흰 깃발이 나부낀다. 갤러리 P21은 P1과 P2라는 서로 이어지지 않는 독립된 두 공간을 아우른다. 코딱지만한 P1에는 친절한 관리자가 상주하고 있고, 무인으로 상시 운영되는 P2는 전시공간 자체가 P1보다 조금 더 크다. 예술과 무관한 전이지대로서 와인바 하나를 사이에 끼고 분리된 두 공간은 ‘따로 또 같이’라는 운영 전략을 취하고 있다.

최태훈은 P1의 창 하나를 우레탄 폼으로 가득 채워 한 폭의 장소특정적 추상화로 연출했다. 얼핏 보면 개업을 준비하기 위해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인 어느 아이스크림 가게가 신경 써서 걸어 놓은 장식적인 가림막으로 보일 수도 있다. 비정형의 단세포 생물 같은 개체들이 민트색을 중심으로 폭넓은 색의 스펙트럼을 공유하면서 자유분방하게 미끄러져 돌아다니는 형상이다. 하지만 손잡이 없는 출입구를 눈치 보면서 조심스럽게 밀고 들어가면 그 추상화의 이면을 형성하고 있는 더 큰 전체가 눈에 띈다. 마치 슬라임 같은 기괴한 생명체들이 서로 덕지덕지 눌어붙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기 위해 용을 쓰는 형국이다. 형상은 창문의 추상화로부터 공간 안쪽으로 터져 나와 용암이 분출하듯 사방으로 터져나가지만, 이내 중력이라는 온건하고도 일관된 힘의 인도를 따라 바닥으로 서서히 침전하고, 그 힘은 갤러리 바닥을 스멀스멀 파고들다 돌연 주체할 수 없는 상승 에너지를 만나 어떤 한 지점에서 다시 남근적으로 벌떡 융기한다. 이제 장소특정적 추상화는 장소특정적 소조가 되었다. 형상의 움직임은 거기서 멈춰 얼어붙은 채로 우리를 기다린다. 얼어붙은 형상은 자신이 지나온 역학적 궤적을 재구성해보라고 종용한다. 이 지점에서 최태훈은 우리가 지닌 두 가지 미적 충동을 건드린다.

충동 하나, 우리는 추상적 평면을 보면서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그 이면의 3차원적 공간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한다. 드러난 평면이 어떤 3차원적 운동의 결과로 포착된 한순간이라면, 그 과정은 시공간적으로 어떠한 경로를 따랐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는 의미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색면추상이 주는 감동의 연원 중 하나는 벽에 걸린 사각의 틀 안에서 유동할 것만 같은, 더 깊은 색채의 우주에 대한 암시다. 기술적인 작업 과정만 놓고 보면 로스코는 분명 우리가 서 있는 ‘이쪽’ 편에서 그림을 그렸지만, 정작 완성된 작품에서 색면추상의 에너지는 반대편인 ‘저쪽’에서 화면을 경유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만 같다. 이러한 에너지 방향성의 특징은 잭슨 폴락(Jackson Pollock)의 작업과 비교할 때 더 명백해진다. 폴락의 회화는 로스코와 달리 ‘이쪽’ 편에서 물감이 뿌려졌음이 너무나 명백해서, 그 거친 흔적을 달리 해석할 여지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폴락이 작품을 그렸던 것과 정확히 같은 위치에서, 그에게 동일시한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지만, 로스코는 우리와 같은 위치가 아닌, 작품의 건너편에서 작품을 매개로 우리에게 색의 에너지를 투사하는 것이다.

충동 둘, 우리는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3차원의 미적 개체를 보면서 거기에 불경스럽고 예리한 칼날을 들이대 그 단면을 보고 싶다고 느낀다. 거목의 나이테가 그러하듯, 단면에는 과정이 있고, 그 과정 너머에 다층적 앎이 있다. 단면을 본다는 것은 금기시된 앎을 향한, 죽음과 맞닿은 욕망이다.

유구한 미술사에서 대체로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표면이었다. 단면은 오직 상상으로서만, 혹은 작품의 완성에 이르는 과정의 한 장면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데, 상상은 좀처럼 실현되지 않았고, 과정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최근 과학적 분석 도구들의 발전으로 회화의 레이어를 층층이 쪼개 분석할 수 있게 되었고, 심지어 불상이 CT 촬영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작품의 제작과정에 대한 다양한 정황적 증거를 보여주어 미술사적 이해의 폭을 넓혀 주었지만, 그럼에도 그 앎은 사후적이고 추론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 최근 많은 작가가 SNS를 통해 작품의 제작과정을 보여주려고 안간힘인데, 이는 단면을 보고 싶은 관객의 오래된 관음증과 조응하는 측면이 있다.

<살(SAL)-P1>은 유리창을 뒤덮은 평면이 공간 안쪽으로 침투하는 과정을 통해 회화적 공간의 이면을 암시하면서, 동시에 특정한 공간을 점유한 물질에서 우연히 발견한 미학적 단면으로서도 기능한다. 최태훈은 장소특정적이고 매체 통합적인 작업을 통해 평면 회화와 입체 설치가 각자의 길에서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던 시각성의 실험을 집약적이고도 효율적인 방식으로 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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