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국립중앙박물관)

메타 경험과 복원

일찍부터 장대비가 퍼붓던 평일 오후였음에도 정말 많은 관람객이 전시장을 찾았다. 내셔널갤러리의 이름값은 톡톡히 하고 있었다. 바로 직전 합스부르크 전도 예년 같았으면 1년에 한 번 정도 할 법한 블록버스터급 서양미술 특별전이었는데, 그런 전시를 이례적으로 연속 편성한 셈이다. 그럼에도 다시금 흥행 사례를 이어가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순연되었던 전시들이 최근 몰리게 된 것인지, 아니면 국제미술계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아져서 가능해진 것인지, 그도 아니면 이 전시들을 성사시킨 몇몇 인물의 리더십과 열정이 빛을 발한 것인지는 잘 모른다. 이유야 어찌 됐든 평소에 보기 힘든 좋은 작품들이 연속으로 들어오는 현상 자체는 고무적인 일이다. 좋은 흥행성적은 다시금 좋은 전시기회로 이어지며 선순환을 이룰 것이다.

블록버스터 전시의 흥행은 거시적으로 보면 이렇게 좋은 일이지만, 이게 내 일일 경우 사실 달갑지 않다. 코로나 이전, 서울에서 살 때는 관심이 몰릴법한 전시 소식이 들려오면 평일에 휴가를 내고 일찌감치 다녀오곤 했다. 아무리 ‘미술사급’ 거장이 오더라도 시간대별 사전예약 시스템 같은 것은 없었다. 그냥 개관 시간에 맞춰 일찍 가면 됐다. 그래도 꽤나 여유 있게 둘러 볼 수 있었다. 물론 주말 오후 2~4시 피크 타임에는 줄을 좀 서야 했지만, 그때만 피하면 주말도 괜찮았다. 도대체 코로나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땅에 미술 애호가들이 넘쳐나게 된 것일까? 억눌렸던 문화소비 심리와 더불어 인스타그램, RM 등 몇몇 키워드는 떠오르지만 정확한 독립변수는 짜 맞춰지지 않는다.

진짜 작품을 사랑한다면, 주변이 붐비든 어떻든지 간에 작품과 나만이 오롯이 존재하는 몰입의 순간을 만들어 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주변을 둘러싼 모든 인격적 존재들을 관념 속에서 완전히 소거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 같은 사회적 동물에게는 사방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낯선 이의 눈초리를 의식하는 메커니즘이 DNA 깊숙이 선험적으로 장착되어 있다. 만약 내 뒤에서, 내 뒤통수에 가려져 작품을 감상하지 못하는 누군가를 의식하지 못하겠다면 스스로 사이코패스가 아닌지 돌이켜 봐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작품과 나 사이에 누군가가 손풍기를 들고 지나가게 되고, 그의 목덜미에 오전 내내 엉겨 붙어 있던 비릿한 땀 냄새가 손풍기 바람에 실려 날아와 들숨과 함께 내 비강을 가득 채우게 된다면, 그 순간 내 눈앞에 있는 작품이 고갱인지, 고흐인지, 세잔인지 알게 뭔가. 그냥 그 손풍기를 냅다 가로채 바닥에 던져버리고 싶다는 망상에 빠지려는 찰나, 실제로 그 차가운 바닥에 내던져지게 되는 것은 스탕달(Stendhal)에 빙의해 작품과 혼연일체 되어 감동의 눈물을 흘리려 했던 나의 순수했던 열망일 터이다.

작품과 나 사이에 누군가의 뒤통수만 미끄러져 지나친다면 다행이다. 우리는 어차피 도시문명 속에서 서로 뒤엉켜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오랜 기간 충분히 학습해왔다. 하지만 내 좌우측 가슴께 어디선가 7인치 남짓의 LCD 혹은 OLED 디스플레이가 불쑥 미끄러져 들어와 시야 한가운데를 차지했다가 ‘찰칵’ 소리와 함께 이내 사라져 버린다면 내 몰입도 같이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번 전시에서 떠올린 동시대의 화두를 하나 꼽자면, 그것은 ‘메타 경험’이다. 우리는 메타 경험의 시대를 살고 있다. 메타 경험이란 내가 오감을 통해 대상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귀속된 기계적 인터페이스가 대상을 일차적으로 경험하고, 나는 그 기계적 인터페이스를 거쳐서 나온 산출물을 통해 이차적으로 대상을 경험하는 일련의 기제를 일컫는다. 즉, 내가 경험하는 것이 아닌, 기계가 경험한 것을 메타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가장 흔한 사례는 콘서트장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왜 가수를 보러 가서는 정작 그 가수를 보지 않고, 전광판만 보고 있나? 그도 아니면 왜 가수를 찍고 있는 내 작은 화면만 보고 있나? 그조차 아니면 왜 전광판을 찍고 있는 내 화면을 보고 있나? (여기까지 가면 ‘메타-메타 경험’, 혹은 ‘중첩 메타 경험’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가 콘서트장에서 찍어온 그 동영상을 다시 꺼내 보는 순간은 데이터 저장공간이 부족하다는 알림을 받고 울며 겨자 먹기로 뭐라도 지워야 하는 바로 그 순간뿐이다.

물론 그 대상이 너무나 소중하니까 기록으로 남겨놓고 싶은 마음, 나아가 이 세상에 무수한 기록이 존재함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나만의 관점을 녹여낸 조금은 특별한 기록이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경험의 총량 측면에서, 메타 경험이 일차적 경험을 능가하는 특이점에 도달한다면 조금은 서글퍼질 터이다. 우리는 지금도 레서피, 길찾기, 전구 갈아 끼우기, 친구 사귀기, 심지어 연인과의 첫날밤 등 너무나 많은 실존적 경험과 중대사에 앞서 디지털 정보 인프라의 가르침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다는 그 고도의 창조적 순간―아무런 쓰잘데기 없는 미적 오브제를 만들고, 감상하고, 논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는 순간―마저 메타 경험에 의존해야 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조건에 대해 원점에서 다시 성찰해봐야 한다.

작품의 보존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남기는 전시였다. 내셔널갤러리야 2014년작 다큐멘터리에서도 엿볼 수 있듯, 보존과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달리는 기관이니, 그 기술적 역량에 대해서는 더 논할 것도 없지만, 작품 하나하나를 현장에서 마주하면 이게 정녕 500년 전 작품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조반니 바티스타 모로니(Giovanni Battista Moroni)의 <붉은 옷을 입은 여인(c.1550)>을 보라. 작년에 그린 것 같다. 사소페라토(Sassoferrato)의 <기도하는 성모(c.1640-1650)>는 방금 일러스트레이터 소프트웨어로 구현한 것 같다.

작품의 원형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추론해서 그 당시 외관과 똑같이 재현할 것인가, 아니면 작품이 버텨온 시간의 흐름을 인정하면서 변화해온 과정의 맥락을 남겨둘 것인가. 이 전시에 온 작품들만 보더라도 내셔널갤러리는 확실히 전자의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분명하다. 17세기 이전 작품들의 표면에 정말로 그때 당시에 화가가 찍어 둔 붓자국은 현재 얼마나 남아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내셔널갤러리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크랙까지 선명한 초고해상도 이미지를 얼마든지 확대/축소해가며 감상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땀 뻘뻘 흘려가며 줄 서서 미술관에 입장하는 까닭은 사실 원작의 아우라에 대한 변함없는 열망에 있다. 그 점에 한해서는 사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130년 전 예언이 아직도 제대로 실현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작품의 표면에 남아 있는 예술가의 생생한 흔적을 가까이서 마주하며 작품을 매개로 시공간을 초월해 예술가와 공존하는 듯한 감각을 느끼기 원한다. 그런데 어떤 작품의 표면에 예술가의 흔적은 없고, 예술가의 손길을 철저히 연구한 어떤 이름 모를 지적인 소시민인 복원가의 손길만 가득하다면, 우리는 이런 공인된 사기극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2017년작 다큐멘터리 내셔널갤러리를 보고서도 아래와 같이 글을 써재꼈던 것을 보니 나는 6년 동안 쳇바퀴를 돌고 있나 보다. 사실 원형도 궁금하고, 시간의 흔적도 보고 싶다. 원작은 하나이고,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하니,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시간의 흐름 그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다면, 작품을 최초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 다큐멘터리에서도 그런 논쟁이 존재한다며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역사가’의 관점을 강조한다면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1600년대 작품이 1700년대의 바니시 복원으로 인하여 변색되었다면, 그러한 변화 자체가 하나의 아카이브로서 작품의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원형 그대로를 100% 복원할 수 있는 최고의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그가 렘브란트와 겸상을 하고 작업실에서 와인을 나눠 마시며 플랑드르 미술 트렌드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지 않았던 이상, 그것이 100% 원래의 상태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현재 한 명도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물며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1495)>라면 어떨까? 다빈치가 오늘 환생한다면 성모의 옷에 채색된 청색을 마음에 들어 할까?”


이렇게 써놓고 보니 전시에 실망한 듯 느껴지는데, 실은 카라바조(Caravaggio), 터너(J. M. W. Turner) 등 보고 싶었던 작품들 많이 봐서 좋았습니다. 특히, 각양각색 액자들의 다양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고, 액자 복원 과정을 재조명한 동영상도 흥미로웠습니다. 기획과 설명이 여전히 투머치 & 프로토타입이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이니까 어쩔 수 없겠죠. 좋은 전시 기획해주신 관계자 여러분께 박수,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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