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나 개인전, 「동쪽에서 뜨는 달」 展 (디스위켄드룸)

1960년대 이후 동시대 미술은 개념주의 기치 아래 탈매체화를 향해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눈에 드러난 한낱 외형에 허비할 시간이 없다. 붓칠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한 작가는 시대착오적인 장식가로 오해받기에 십상이다.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말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런데 중요한 건 개념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작가들에게 진짜로 묻고 싶은 것은, 당신의 그 개념이 외형을 모두 포기할 만큼 독보적이고 변혁적인 무언가냐는 질문이다. 유구한 미술의 역사에서 시각성은 단연 최종적 심급을 차지하고 있다. 시각성의 포기나 평가절하에 대한 선언은 시각성의 권좌를 인정한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외형의 미를 권좌에서 내려오게 하려면, 그것을 대체할 정도로 압도적인 개념을 창출해야 한다. 여기서 압도적인 개념이란, 모든 시각성을 한낱 부차적인 장식물로 여길 정도로 독보적이면서, 일상적 실천의 모든 순간에서 변혁을 가져올 수 있는 무언가다. 그 정도 개념을 담은 작품만이 외형은 무의미하다고 선언할 수 있다. 심지어 외형의 무의미함을 외치는 때조차 개념은 외형을 매개로 창출되거나 촉진된다.

이런 세상에 이토록 공력을 많이 들인 동시대 작품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처음엔 당연히 공들인 유화겠거니 생각하며 둘러보는데, 뭔가 묘한 이질감이 있어 다시금 캡션을 살펴봤다. 에그 템페라란다. 에그 템페라라니. 물론 템페라 자체는 동시대 미술계에서도 여전히 널리 쓰인다. 하지만 에그 템페라를 정말 최초의 ‘에그 템페라적 용례’에 맞춰서 쓰는 동시대 작품은 극히 드물다. 여기서 최초의 에그 템페라적 용례란, 말 그대로 유화가 보편화되기 이전에, 그것밖에는 회화 재료로서 대안이 없어서 쓰던 15세기 이전의 채색화 기법을 말한다.

「월간미술」의 미술용어 사전에 따르면, 템페라는 “건조가 빠르고, 또 엷고 투명한 물감의 층이 광택을 띠어 덧칠하면 붓자국이 시각적인 혼합 효과를 낸다. 또 일단 건조된 뒤에는 변질되지 않고, 갈라지거나 떨어지지도 않으며, 온도나 습도에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기법은 종교개혁 이전 시대, 그러니까 아직 민초들이 정파적으로 쪼개지기 전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신을 향한 순수한 열정을 간직했던 그 시대의 종교화를 상징하는 재료다. 전쟁, 정치적 폭압, 전염병에 상시 무방비로 노출되었던 당시 민초들은 템페라 화면의 투명하고 정갈한 색채로 빚어낸 절대자의 임재를 느꼈다.

박지나는 이 매체의 장점을 정확히 살렸다. 너무나 정갈한 색채와 구도로 비현실적인 풍경을 풀어 놓았다. 거기에는 폐허를 거닐다가 우연히 발견한 고대 유적과 유물이 있다. 하지만 마치 원형처럼 너무 깨끗하고, 또 총천연색이라 낯설다. 우리가 늘상 박물관이나 도판을 통해 봐왔던 그런 유물이 아니다. 바닥, 천장, 주두에는 배색이 선명하고, 조각상에는 흠집 하나 없다. 이러한 명징함이 오히려 놀이동산에서 조악하게 재현해 놓은 세트장을 보는 듯 키치로 다가온다. 너무 아름답고, 깨끗하고, 명확한 것은 오히려 의심스럽다.

의심스러움은 부조리한 개체들의 조합을 통해, 또 묘하게 어긋나는 원근법을 통해 극대화된다. 사물 간의 일반적 비례를 무시한 새와 말이 반도체 공장 같은 고대 신전을 거닐며 무심한 조각상들에 말을 건넨다. 각각의 개체를 투과하는 투시도법은 묘하게 엇갈려 이질적 대상들의 부조리한 공존 속 아이러니를 증폭시킨다. 중세 이래로 성스러운 대상을 묘사하는데 특화되어 있던 템페라가 초현실적 구성을 만나 물리적 세계와 동떨어진 신비감을 자극한다. 학력이라는 사소한 단서를 끄집어내 라이프치히 화파의 영향이 느껴진다는 둥 어쭙잖은 일반화 및 동일시를 시도한다면 작가의 자의식을 거스를 수도 있겠지만, 이질적 개체들의 담담한 듯 보이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 효과가 치밀하게 계산된 미적 구성의 결과물을 보면 훈련의 배경이란 결코 쉬이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박지나의 이번 작품들과 그것을 품은 갤러리는 실로 서로 잘 만났다. 템페라가 주는 말갛고 투명한 감각이 이 결벽스럽고 미니멀한 화이트 큐브의 장소성과 결합해 예기치 못한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사실 인근 공원 주차장에 (몰래) 차를 대고 좁은 골목길을 돌아 이 전시장에 다다랐을 때 퍼뜩 든 생각은 갤러리가 들어설 만한 곳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저층부는 미용실, 네일아트, 와인샵 같은 동네 단골장사에 적합한 상가로, 상층부는 주거 기능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그런 도심 속 전형적인 꼬마빌딩 입지로 보였다. 의구심을 떨치고 현관을 밀치고 들어가면 참으로 허여멀건 공간이 드러나는데, 화이트 큐브의 먹먹함은 수평의 직선으로 길게 뻗은 LED 조명으로 인하여 더욱 도드라진다. 작가가 모던하게 재해석한 키치적 폐허는 이 먹먹한 빛의 진폭을 흡수하며 심연의 공간을 유동한다.

하지만 장소와 작품의 결벽적 결합이 비집고 들어갈 틈 하나 없는 통제된 세계에 갇혀 있지는 않다. 작가는 일견 완벽하게 통제된 화면 구석구석에 보일 듯 말 듯 성긴 붓 자국과 흘러내리는 물감 자국을 의도적으로 남겨 놓았다. 이 미시적 균열을 통해 간신히 작품과 세계 사이의 통로가 열리고, 그 통로를 통해 작가와 장소와 우리의 실존에 대한 인식이 투과해 들어간다. 윤색된 폐허는 그렇게 고대와 현재, 동양과 서양, 꿈과 현실을 가로지르며 또 다른 발굴자와의 우연한 조우를 숨죽이고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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