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역 부근의 어느 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했는데, 주르륵 훑어보자마자 저자와 나의 공통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은 나도 문장수집가다(11p). 태산 같은 통찰과 사유를 끌어낼 수 있는 단 한 문장의 힘을 알기에, 여기저기서 집착적으로 모아왔고, 이 개인적 공간에도 공개해 두었다. 이 홈페이지 유입의 일등공신이다. 방문자들이 여기서 퍼간 문장들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는 알 턱이 없지만, 그저 도움이 됐기를 바랄 뿐이다. 예전에 미술사 연구회에서 강의할 때도 중요한 대목에서는 슬라이드 한 판에 문장 하나만 띄워놓고 이야기하기를 즐겼다. 나의 마음을 울려 엄선한 문장이 청중에게도 모종의 화학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노라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나도 글 쓰는 사람이다. 무심한 익명의 독자들만 휑하게 오가는 이 홈페이지가 증명하듯, 취미로도 쓰고, 틈틈이 이런저런 공모전에도 내고, 생계형 논문과 보고서도 쓴다. 아직 제대로 된 저술은 없지만 어쨌든 글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 하나만큼은 굳건히 견지하고 산다. 그 정체성은 자부심일 수도 있고, 삶의 무게를 견디기 위한 동력일 수도 있다. 어떤 하찮은 감정이든, 지식이든, 의견이든 간에 기록할만한 가치란 있음을, 그리고 글의 포장을 덧입지 않으면 그 누구에게도 가 닿을 수 없음을 알기에 쓸 뿐이다.
끝으로, 미련하게 참는 사람이라는 점도 비슷하다(23p). 나도 약속 시각에 늦는 이에게 좀처럼 연락하는 일 없이 마냥 기다린다.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지출에는 끝까지 지갑을 열지 않는다. 에어컨 없는 단칸방에서 별다른 불만 없이 8년을 살았다. 김과 김치만 있어도 몇 끼고 마뜩하게 버틴다. 옷 한 벌 사면 10년은 기본으로 입는다. 이런 사람들이 문장과 글쓰기에 천착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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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법을 다룬 책이 부쩍 많아졌다. 글을 쓰지 않는 시대의 역설이다. 매체 경험은 초고화질 영상과 쌍방향 소통이 결합된 멀티미디어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동시에 책을 읽거나 진지한 글을 쓰는 사람은 급격히 줄었다. 그렇다고 글을 쓰고 싶은 욕망 자체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발화와 연결의 욕망은 그대로인데 매체의 변화로 인해 생산되는 글 대부분이 즉각적인 단답식 텍스트로 변화한 것이다. 글의 총량이 줄어든 만큼 글 하나하나가 귀해졌다. 작아진 시장규모에 발맞춰 고품질의 정제된 글만이 상품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이렇게 형성된 글쓰기 책의 세계에 은유는 또 하나의 얇은 지도 하나를 더 얹어 놓았다. 어떻게 쓰라고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책은 아니다. 글쓰기에 관해 저자에게 울림을 준 문장 하나를 놓고, 그 문장에서 파생되는 글쓰기에 관한 사유를 그 옆 페이지에 녹여냈다. 저자가 글을 쓰며, 글쓰기를 지도하며, 또 살며 깨달은 바가 글쓰기의 실천적 지침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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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꼴에 글 쓰는 사람이랍시고 공감 가는 대목이 많다. 일단 뭐라도 써야 좋은 글로 나아갈 수 있다(33p). 백지 위에 곧바로 명문을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뇌에서 제대로 정제되지 않은 사유의 파편들은 실제 활자로 전환되어 내 눈 앞에 펼쳐질 때 비로소 막연하게나마 그 갈피를 잡아간다. 내 글의 첫 독자인 나의 비평적 역량을 믿어야 한다.
뭐라도 일단 써 놓으면 그 글이 다음 일의 원동력이 된다(35p). 훈련과 우연과 신기(神氣)의 결합으로 좋은 글이 나오면, 그 글이 자신을 더 좋은 사람으로 느끼게 하고, 그 도취감이 더 좋은 다음 작품으로 이끈다. 쓰면 계속 쓸 수 있다. 안 쓰면 계속 안 쓰게 된다. 그리고 당시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 같은 글의 파편들이 쌓이고 쌓여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도 한다.
글은 완성하는 것이 아닌, 어느 순간에 중지하는 것이다(203p). 완벽한 글이란 없고, 계속 보면 계속 고칠 부분이 드러난다. 한때 만족스러웠던 글, 어딘가에서 인정받았던 글도 시간이 흘러 다시 보면 낯뜨거운 지점이 도드라진다. 때로는 완성을 향한 집념보다 중지할 시점을 아는 용기가 더 중요하다.
언젠가 후회하더라도 일단 다 쓴 글은 곧장 내보여야 한다(221p). 수장고에 쌓인 그림이 아무런 미적 담론을 야기할 수 없듯이, 비밀일기장에 덮인 글이 가 닿을 수 있는 지평이란 내 발가락 끝 언저리에 불과하다. 뭐라도 일단 담론의 장에 던져놓아야 스스로 더 경계하고, 더 조심하고, 그러나 더 나아진다. 예측할 수 없는 사회적 대화가 창출되고, 거기서 인연이 파생된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있는지, 또 무엇을 잘못 짚었는지 알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공개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럼에도 나는 모든 이 책을 포함해, 모든 글쓰기 책들이 입을 모아 주장하는 몇 가지 가르침은 끝끝내 이행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그래도 부사를, 접속사를, 만연체를 사수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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