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나잇 (키아프 & 프리즈 연계행사, 23.9.7.)

키아프 서울과 프리즈 서울에 참여하는 삼청동 갤러리들의 특별한 야간 개장 행사에 가봤다.

PKM갤러리

구정아 개인전과 DJ파티(LEVITATION Party)가 열리는 PKM갤러리가 가장 핫할 것 같아서 먼저 가봤다. 직원들이 입구에서 팔찌를 채워준다. 키아프/프리즈 VIP 티켓 소지자만 입장할 수 있다고 해 우리는 못 들어갔다. 아쉬웠다.

다른 곳을 다 둘러보고 밤늦게 다시 돌아와 그 앞을 지나가는데, 비트는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경찰차 두 대가 서 있고, 경찰관 몇 명이 분주하게 갤러리 앞 도로를 오가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주민 신고가 들어온 모양이다. 여기는 거주지역과 워낙 가까워 어떻게 옥상에서 파티할지 의문스럽기는 했다. 나 빼놓고 파티하더니 결국 문제가 생겼네.

초이앤초이갤러리

우베 헨네켄(Uwe Henneken)과 피에르 크놉(Pierre Knop)의 「Sweetscapes and Strangos」 展이 열리고 있는 초이앤초이 갤러리에 갔다. 밤은 깊어졌지만, 젊은이들은 뜨문뜨문 계속 오갔다. 피에르 크놉은 일상적인 풍경에 이색적인 구도, 색채, 질감을 조합하는 작품을 선보였고, 우베 헨네켄은 어린 시절 세계명작 동화에서 봤을 법한 삽화에 몽환적 색과 패턴을 덧입혀 초현실적 느낌으로 재해석한 회화를 내놨다. 크놉의 실내 풍경이 흥미로웠다(<Bouquet(2023)>, <Last Summer Beach(2023)>, <White Cat(2023)>). 음울하면서 목가적인 풍경이 모델하우스 같은 경직된 인테리어를 뚫고 들어오는 듯한 구도가 인상적이었다.

1, 2층에는 두 작가의 작품이 교차로 전시되고 있었고, 3층에도 몇 점의 작품이 있었으나 가운데 큼지막한 테이블이 놓여 감상할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3층에 연결된 옥상으로 나가보니 갤러리 직원으로 보이는 청년이 가정용 전기 그릴에 성심성의껏 소시지를 굽고 있었고, 국산 맥주와 컵라면도 준비되어 있었다. 소박하지만 갤러리 관계자끼리 즐거운 대화를 나누기에는 좋은 구성이었다. 그 소박함이 오히려 나를 밀어내어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고 갤러리 주변 골목 풍경을 잠시 부감하다 나왔다. 옥상 난간에는 이태수의 <Stone Composition 019(2021)>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국제갤러리

국제갤러리 앞 모퉁이를 돌자마자 이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온갖 개성으로 중무장한 젊은이들이 한 손에는 플라스틱 컵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종이 접시 하나를 들고 거리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고급 차량들이 쉴새 없이 갤러리 앞 도로에 정차하여 멋쟁이들을 떨구고 청와대 쪽으로 사라졌다. 건물 입구부터 산소가 부족했다. 실내는 그야말로 바글바글했다. 입구 우측 접수대에서는 파김치가 된 직원들이 벌써 반쯤 영혼이 나가 있었고, 쓰레기통에는 일회용품의 산이 흘러넘칠 기세였고, 저 뒤로 DJ는 혼란과 동떨어져 이미 음악과 혼연일체가 된 모습이다. 전담 사진작가마저 와인 한 잔을 들고 다니며 촬영할 정도로 자유분방한 분위기였다. 군데군데 스탠딩 테이블은 다국적 미술애호가들에게 점령되어 여기가 삼청동인지 소호인지 구분이 안 됐다.

일단 빠르게 전시부터 돌았다. 본관에서는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展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측 첫 번째 방에는 과슈로 그린 평면 회화가 있었는데, 시각적 혼돈 또는 공의 영역을 표현한다고는 하지만 작가의 이름값을 빼면 남는 것이라고는 인스타 인증용 뒷배경으로서만 의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눈총을 받으며 DJ 앞을 빠르게 지나쳐 가면 그 악명 높은 반타블랙 오브제들이 등장한다. 정면에서는 얼핏 평면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움푹 패거나 볼록 튀어나온 형상으로, 감각의 신뢰성에 대해 되묻는 작품이다. 나중에 프리즈까지 돌아보니 작가는 이러한 형상의 작품을 서로 다른 마감처리로 엄청 많이 찍어낸 모양이다.

마당을 지나쳐 K3 전시관으로 줄 서서 들어가면 검거나 검붉은 네 개의 비정형 거대 덩어리가 각 벽면에 찰싹 붙어 있다. 우주를 유랑하던 운석 하나를 낚아채 그물로 감싼 다음 절반으로 뚝 잘라 사면에 붙여 놓은 모양새다. 아무리 유리섬유나 실리콘 같은 가벼운 소재를 썼다고 한들, 절대 규모 자체를 생각해보면 이렇게 벽에 안정감 있게 붙여 놓기 쉽지 않아 보이는데, 그걸 해냈기 때문에 눈길을 끈다. 이렇듯 돈이 있으면 터무니없이 어려운 것들을 많이 시도할 수 있고, 그 시도는 많은 돈을 벌게 해준다.

국제 갤러리가 준비한 삼청나잇에서 놀라웠던 것은 아니쉬 카푸어의 예술혼이 아니라, 믿기지 않을 정도의 행사 준비였다. 우리가 거기 도착했을 때부터 엄청난 인파가 길게 줄을 서 소규모 뷔페 음식을 퍼 와인에 곁들여 즐기고 있었는데, 이후 몇 군데 더 들렀다가 그곳을 다시 지나칠 때도 여전히 그 음식의 샘은 마르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그 음식의 퀄리티가 상당했다. 연어, 파스타, 샐러드, 미트볼 등이 나왔는데, 종류도 많은 편이었지만 하나같이 좋은 식재료로 정성 들여 만든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저녁을 든든히 먹고 온 것을 후회해야 했다. 아마 국제갤러리에 입점해 있는 ‘더 레스토랑’, 늘 붐비던 것을 밖에서만 봤던 그 맛집의 재료와 실력을 그대로 이 케이터링에 쏟아낸 모양이다.

갤러리 마당에서도 놀라운 일은 계속 이어졌다. 케이터링이 아쉬운 미술애호가들을 위해 푸드트럭이 정박한 채 분식과 젤라또를 퍼줬고, 한구석에는 누구라도 집어갈 수 있게 커클랜드 생수가 쌓여 있었다.

국제갤러리는 이렇게 화끈하게 퍼주는 행사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평판? 해시태그? 잠재적 고객? 그날 좋은 밥 먹고 기분 좋아져서 작품을 사줬다는 사람은 물론 못 봤지만, 적어도 나는 그들이 베푼 호의를 이렇게나마 비공인 사료의 한 귀퉁이에 남겨 둔다. 그들이 기분 좋아지면 또 베풀 수도 있으니까.

학고재

이어서 학고재의 이우성 개인전, <여기 앉아보세요> 展을 봤다. 초기에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던 모양인데, 우리가 갔을 때는 커다란 쟁반에 얼음만이 채워진 채 그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봤음 직한 평범한 일상 속 평범한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회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묘하게 밑도 끝도 없이 긍정적인 무드는 마치 AI로 생성한 이미지 같은 작위성으로 다가온다. 생성형AI 명령어 창에 때려 박은 프롬프트 같은 제목도 그런 심증을 굳혀준다. 차분히 훑어보면 누구라도 자기 지인 하나쯤 떠올릴 법한 작품들이다. 나도 몇 떠올렸다. 왜 이 사람들을, 왜 이 배경에서, 왜 이 구도로 그렸을까, 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그냥 그들이 거기 있어서 그린 것이다.

안쪽 방에 걸린 대형 걸개 작품인 <해질녘 노을빛과 친구들(2023)>에서는 실물의 1.5~2.0배쯤 되는 인물들이 어깨동무하고 환하게 웃으며 죽 늘어서 우리를 바라보는데, 그 매체의 특성 탓에 기념비적인, 혹은 이데올로기적인 냄새마저 풍긴다. 그 전과 달리 이 시대의 ‘운동’에는 명분보다 사람의 실존이 앞서야 한다.

가끔 어떤 전시는 주제가 되는 작품보다 소품이 더 재미있다. 한쪽 벽에 줄 지어선 <지금 작업 중입니다(2023)> 연작에는 예술가로서 고민하고, 소통하고, 구상하고, 작업하고, 스트레스 풀고, 생존하는 온갖 실존적 고민이 얄궂은 페르소나로 승화되었다. 하찮게 흐느적거리는 인물은 카카오톡 이모티콘을 연상케하는 도식적 매력을 갖췄는데, 사각의 틀에 빡빡하게 끼인 채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예술가의 일상을 해학적으로 연기한다. 예술가의 길 초입에 이제 막 들어선 사람이라면 이 재치 넘치는 그림을 보며 ‘나도 이 시간을 견디면 언젠가 학고재에서 개인전을 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으리라. 이우성은 개인전을 통해 의도치 않게 후배 작가들과 멘토링까지 시도한 것이다.

갤러리현대

마지막으로 방문한 갤러리현대에서는 사라 모리스 개인전(Sarah Morris), <Pinecones and Corporations> 展을 만날 수 있었다. 갤러리 입구 밖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제공했고, 입구 바로 안쪽에서 간단한 스낵, 견과류, 핑거푸드를 제공했다. 가짓수가 많지는 않았으나, 동나는 음식을 족족 채워주는 정성이 느껴졌다. 배가 불러 스낵은 먹을 수 없었다. 와인만 한잔했다. 와인 맛 하나만큼은 국제갤러리보다 한 수 위였다.

도식화된 개체들이 강박적으로 촘촘하게 배열된 추상회화가 주를 이뤘는데, 솔방울의 기하학적 형태와 후기 자본주의의 산업적 풍경들이 암시하는 인공적/도식적 감각을 결부시켰다고 한다. 공감대를 찾지 못해 빠르게 훑어보고 나와야 했다.

하지만 와인은 정말 잘 마셨습니다. 최고였습니다.

총평

여러 갤러리를 집약적으로 빠르게 둘러보면서 다양한 미술의 경향들을 한 자리에서 포식하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됐다. 늘 느끼듯,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경향과 예술가들이 존재하며, 그들은 그 누구와도 같지 않다.

숨통이 트이기 시작하는 가을밤, 양질의 공짜 음식과 와인을 곁들이며 여러 갤러리를 둘러봤던 추억은 오래갈 듯하다. 각양각색의 개성 넘치는 젊은이들과 세계 각국에서 온 미술인들 사이에 낑겨 다닌다는 생동감만으로도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삼청나잇에는 삼청을 걷자.

(심지어 가구 전시장에서도 DJ 파티와 와인을 즐길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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