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사 라이트의 「괴물성: 시각 문화에서의 인간 괴물」

Alexa Wright, Monstrosity: The Human Monster in Visual Culture

“괴물성은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나타낼 필요성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개념이다.”

130p

눈에 보인다면 증거가 아니다.

인간은 언제부터 괴물을 묘사했나? 기이한 형체, 압도적인 힘, 오감으로 전해지는 불쾌함, 기묘한 혼종성, 위협적 존재감 등으로 버무려져 실존적 공포로 다가오는 존재가 괴물이라면, 인간이 괴물을 묘사하지 않은 시절은 없을 것이다.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시각적 이미지의 원류인 저 알타미라 동굴벽화까지 올라가더라도, 그 압도적 존재감은 단지 선망하는 사냥감이나 주술적 대상에서 그치지 않는다. 나약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그 고대 소들의 장대한 기골은 언젠가 제압하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펄떡이는 괴물성으로 다가온다.

괴물성의 스펙트럼은 만들어 낸 것, 타고난 것, 관찰된 것, 상상된 것, 뒤섞인 것, 와전된 것 따위를 폭넓게 아우른다. 사실상 우리가 기괴하고 무섭고 위협적이라고 느낀 모든 대상이 괴물성의 자장에 발을 걸친다. 저자 알렉사 라이트(Alexa Wright)는 시각 문화의 주제로서 괴물성에 주목하면서도 그 안에서 다시 인간 괴물로 논의의 초점을 좁힌다. 인간 괴물은 말 그대로 인간의 범주에 속하는 괴물이다. 고로 존재 자체가 전적으로 괴물인 고질라나 용가리와는 다르다(그것이 모성애와 같은 생명 보편적 정서를 공유할지라도). 인간인데 괴물 같거나, 괴물인데 인간 같아야 한다. 저자가 인간 괴물에 주목한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객체를 인간 괴물이라고 규정하는 행위는 순수 인간이라고 자각하고 있는 주체의 정체성 인식에 관하여 의미 있는 질문을 건네기 때문이다.

인간 괴물을 다룬 그림들은 고대로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오늘날 우리가 증거로서 목격할 수 있는 자료들은 중세로부터 시작한다(23p). 주로 소문으로만 들려왔던 먼 나라 타국의 이민족들을 다룬 인간 괴물 도상들은 누군가에겐 분명 객관적인 관찰이었을 행위가 소문과 와전을 거듭하며 기괴한 이미지로 남게 된 흥미로운 현상을 보여준다. 농토와 집, 거기서 몇 걸음 더 나가 봐야 광장과 성당 정도였을 서구 중세의 협소한 세계관에서 먼 나라 이민족을 다룬 이야기는 그야말로 흥미와 경외로 가득한 판타지 문학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분명 객관적으로 보고 들은 무언가였겠지만, 그 존재가 이역만리를 거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가운데 여러 구전자의 편견과 악의와 몰상식이 뒤섞이며 기괴한 혼종적 인간 괴물의 형상을 입게 되었다. 어느 지역에서 신화 속 주인공으로 일컬어지던 존재는 지구 반대편 사람들에게는 실제로 그곳에 사는 미개한 민족으로 여겨지게 되었다(25, 27p).

이처럼 중세 도상에 희미하게 남은 “인간 괴물들은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도사리고 있는 혼란스러운 형체들이다(29p).” 그것은 편협한 기독교 사회가 그 경계 밖에 있던 존재들, 자기들의 ‘자비롭고 선량한’ 포교를 거부한 존재들, 얼핏 보기에 미개해 보이는 존재들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보여주는 시각적 증거자료다. 그리고 인간 괴물에 대한 인식이 그 시대 인류의 정체성 인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이라는 점은 중세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늘 새롭게 타자를 재구성하며, 그 타자는 다시금 우리를 정의한다(30p). 타자를 재구성하는 행위를 멈추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규정할 수 없게 된다.

저자는 이처럼 괴물 이미지에 투영된 주체들의 자의식을 탐구하며 중세 고문서로부터 2011년 노르웨이의 연쇄 테러 사건까지 시각적 증거들과 정황적 맥락들을 뒤섞어 풀어낸다. 그중에서 저자가 가장 꽂힌 사례는 아무래도 테드 번디(Ted Bundy)가 틀림없다. 1970년대 미국의 연쇄살인마 테드 번디는 그때까지 그런 부류 인간에 대해 대중이 가졌던 통념과 전혀 다른 외형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번듯한 호감형의 백인 남성인 번디는 자기 범죄 동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언론을 이용할 줄 알았고, 방송 카메라에 잘 나오는 각도와 표정을 알았으며, 심지어 로스쿨에서 갈고닦은 (어쭙잖은) 지식을 이용해 스스로 법정에서 변호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인간 괴물이라는 관념적 틀에 균열을 일으킨 존재로 볼 수 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과학적 프로파일링 기법이나 인지심리학적 발전이 더뎠고, 과학적 지식에 대한 대중적 파급도 지지부진했으므로, 외형과 내면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골상학자들은 외형적 특징(못남)과 범죄와의 상관관계를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프릭쇼(freak show)에 등장하는 출연진 다수는 그 외형의 기괴함이 추악한 범죄나 저주와 연관되어 있다는 서사를 깔고 무대에 섰다. 1960년대 영국의 유아 청소년 연쇄살인범 마이라 힌들리(Myra Hindley)는 외형적으로 괴물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평범한 편에 속하지만, 대중적 기대심리에 결탁한 언론이 희미한 괴물성마저 확대 재생산해 집단적 기억을 거의 조작하다시피 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즉, 괴물 같은 외형은 괴물 같은 내면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라는 인식은 오랜 시간에 걸쳐 굳어졌다. 하지만 번디는 멀끔했고, 사교적이었으며, 심지어 지인들에게 사려 깊게 행동했다. 그가 충격적인 사례였던 이유는 괴물과 시민을 외형적으로 구별할 수 없을 때 우리가 겪게 될 잠재적 혼란을 예증했기 때문이었다.

과학의 발전으로 외형과 내면의 상관관계는 그다지 유의하지 않음이 충분히 밝혀졌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외형을 통해 정상성의 경계를 파괴하려는 위험분자들을 솎아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놓지 않고 있다. 물론 지난한 세월에 걸쳐 못난 생각으로 가득 차 결국 못난 외형을 갖게 된 사람도 없지는 않겠으나, 대게는 그런 소수 사례를 확대재생산하며 불변의 진리로 옹립하기 위해 애쓰는 것에 가깝다. 과학은 발전하고 있으나, 도리어 과학 개념의 본질에 역행하는 용례인 ‘관상은 과학이다.’라는 말은 더 자주 내뱉고 있다. 이런 진술이 사실에 대한 발화라기보다 위험을 감지하고 싶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주문이라는 점은 사실 발화자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그 발화는 괴물을 걸러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강화하려는 일종의 자기 최면이다. 그리고 나 자신은 그 정도로 못나지 않았으니, 지금까지 괴물이었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괴물로 변할 가능성이 없다고 온 세상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 선언하고 싶은 것이다. 어차피 “눈이 다른 감각 기관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문화에서(190p)” 시각성이란 가장 믿을만한 감각이며, 내면을 달리 까 보일 방도는 없으므로, ‘관상은 과학’이라는 말은 현대적 인간 괴물의 외형에서 괴물성을 착즙하는 작업의 시발점이며, 동시에 정상성에 안착한 나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 이중의 효과를 겨냥한다.

최근 몇 년 사이 강력범죄자 신상 공개 제도에 의해 초췌한 얼굴을 까고 폴리스라인에 선 인간 괴물들이 꽤 많아졌다. 그중 더러는 오래된 증명사진을 먼저 언론에 공개했는데, 누구에게나 그렇듯, 정형화된 인물사진의 교본을 따라 찍은 그 사진들은 인간성이 축출된 자리를 인적자원기능이 대체한 형상인지라, 거기서 개인의 고유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윈도우 바탕화면 아이콘 같은 무색무취한 기표다. 당연히 수갑 차고 경찰 손에 이끌려 나온 생생한 뉴스 영상 속 불안한 눈빛의 그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증명사진 공개는 실효성이 없으니 머그샷을 공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외형을 뚫고 나오는 직관적인 괴물성의 원형에 도달하고 싶은 그 욕망은 전근대 시기 공개처형에 앞서 단두대 아래 모여들었던 시민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 와중에도 더러는 증명사진만 보고도 단박에 ‘관상은 과학’을 외친다. 아는 대로, 혹은 믿고 싶은 대로 보는 인간의 시지각적 편향에 기꺼이 편승한다. 실제 범죄사실들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다는 전제하에, 강력범죄자와 선량한 시민의 증명사진을 무작위로 10개 섞어 놓고 그중에서 범죄자를 찍으라고 하면 정답률은 얼마나 될까? 스타벅스와 이디야 사이의 커피 맛 블라인드 테스트보다는 높을까?

외형이 내면에 관해 시사할 수 있는 바는 생각보다 적다. 괴물성의 증거를 외형에서 찾으려는 노력은 부질없다. 외형을 향한 곁눈질과 손가락질은 이내 되돌아와 나를 향하게 되어있고, 그 겨냥에서 완전히 빗겨날 수 있는 존재는 몇 없다. 애브젝트(abject)는 정상성과 분리될 수 없다(194p). 지금 잠시 빗겨날 수 있더라도 역사의 긴 호흡에서 유예기간은 찰나다. 외형에 대한 평가 기준은 계속 바뀐다. 내면을 볼 길이 없거나, 그 길이 좁고 험하다는 이유로 외형적 괴물성 감별의 지속적 확대재생산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외형을 다룬 담론이 지면을 가득 채우면 정작 중요한 이야기들은 설 곳이 없어진다. 내면의 증거를 수색하지 않는 한 괴물의 기소는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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