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 Katherine Hayles, How We Became Posthuman: Virtual Bodies in Cybernetics, Literature and Informatics
가상성의 유토피아에 속지 말자
얼마 전 이런 유머 게시물을 봤다. 누군가 한 시간 동안 숨이 찰 정도의 고강도 운동을 수행했는데, 그동안 애플워치를 차고 있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분명 운동을 할 때는 몰입했고, 즐거웠지만, 기록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자 억울해지기 시작한다. 디지털 매체에 기록되지 않은 운동은 무의미하며, 거기에 이미 쏟은 에너지마저 뒤늦게 되돌려 받고 싶다는 것이 유머의 포인트다.
이 유머에 공감했다면 우리가 이미 포스트휴먼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휴먼’ 앞에 붙은 ‘포스트’는 기존에 정의된 인간 개념의 와해를 의미한다. 현생 인류는 신체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이미 전통적 인간 개념에서 한 차원 증강되었다. 여기서 증강 개념은 어감과 달리 가치중립적이다. 증강이 진정한 의미에서 진화인지 혹은 퇴행인지는 주관적 가치판단을 따른다.
이러한 증강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은 정보 기술이다. 우리는 정보 기술을 만들었고, 그 망에 접속해 다시 우리를 본다. 지금 우리가 품은 어떤 생각이나 무심코 실천하는 하나의 행동이 정보망을 투사해 되돌아온 피드백 반응이라면 그것이 우리가 포스트휴먼이라는 증거다. 컴퓨터 키보드를 두들겨 쓴 글이 연필로 눌러 쓴 글과 어딘가 다른 사고 흐름을 보여 준다면, 그 미묘한 차이도 포스트휴먼으로서의 징후를 예증하는 것인데, 하물며 스마트폰을 들고 태어난 요즘 아이들이 우리 본-아날로그 세대와 다른 사고체계를 가졌음이 명백하다면, 그것은 포스트휴먼으로서 더 큰 한 걸음이 이미 내딛어졌음을 시사한다.
다시 애플워치 사례로 돌아가면, 내가 가장 최근에 본 그 제품 광고에서 이제는 손가락만 튕겨도 애플워치가 주인님의 마음을 깨닫고 온갖 원격 통제 기능을 발휘해 준다고 한다. 포스트휴먼을 향한 우리의 여정은 이처럼 걷잡을 수 없는 속도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증강의 소용돌이에서 순식간에 도태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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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언젠가 신체라는 물리적 속박에서 벗어나 오직 정신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시대가 오리라는 충격적인 전망을 나에게 처음 가르쳐 준 사람은 미치오 카쿠(Michio Kaku; 加來道雄)였다. 이때 ‘정신’이라는 단어는 당연히 직관적으로 정보를 가리키나, 그보다 더 상위의 어떤 숭고한 형이상학으로 독자를 이끌려는 의도로 정교하게 선택된 단어다. 인간이 타고난 신체에 기계와 정보 네트워크를 결합한 과도기적 상태를 넘어서 언젠가는 순수한 정보의 형태로 시공간을 유영하며 살 수 있으리라는 그의 전망은 설득력이 있었다. 허나 나는 그러한 주장이 담긴 미치오 카쿠의 저서에 혹평을 남겨야 했다. 정확하게는 저서에 대한 혹평이 아니라, 그러한 전망을 언젠가 현실화할 것이 자명해 보이는 현생 인류의 그 비뚤어진 욕망에 대한 혹평이었다. “죽어야 할 때가 오면 (제발 좀) 죽자.”라는 것이 당시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유물론적 맹신에서 비롯된 시대착오적 저항은 아니었다. 사이버네틱스 시대에 러다이트 운동이나 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좁게는 자기 한목숨, 넓게는 자기 종(種) 하나만 대대손손 영위하면 그뿐이라는 그 같잖은 신념을 영생 운운하며 숭고하게 포장하는 그 꼬락서니가 싫었다. 한 치 앞만 보며 호의호식한답시고 천운으로 얻어걸린 이 풍요로운 대자연을 마구잡이로 파괴한 주제에 이제는 그 환경을 되돌릴 생각은커녕, 이대로는 못 살겠다고 정신으로만 둥둥 떠다니며 우주 이곳저곳을 누비겠다는 그 썩어빠진 사고방식이 싫었다. 달리 말하면, 집안 아무 데나 똥을 싸질러 놓고는 그 똥이 더럽다며 계속 이사 다니면 된다는 식이 아닌가? 어쩌면 나도 그런 선택을 하고야 말까 봐 싫었던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더 무서운 것은 나만 그 선택을 못 하게 되는 불가피한 상황으로 떠밀리는 것이겠지.
캐서린 헤일스(N. Katherine Hayles)는 미치오 카쿠의 사이버네틱스 유토피아론에 맞서 나와 같은 진영에 선다. 나와 같은 진영에 선 이 학자가 화학 석사이자 영문학 박사이면서 직접 프로그래밍을 짤 정도의 디지털 미디어 연구자라는 점이 참으로 든든하다. 저자는 자신의 다학제적 이력을 살려 사이버네틱스 시대 포스트휴먼에 관한 70여 년의 과학사적 흐름과 문학 비평을 단 한 권의 책으로 접합한다. 과학사와 문학비평을 가로지르는 이 방대한 연구를 관통하는 주제는 나의 기존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아무리 사이버네틱스의 기술혁신이 우리 사지를 휘감아 미래로 끌어당기더라도 신체를 벗어난 정신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설령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신체를 벗어난 그 존재가 현재의 우리 존재와 연장선상에 있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물론 나의 주장은 그냥 막연한 바람에서 출발하지만, 헤일스의 주장은 치밀한 연구에서 길어 올린 탄탄한 논리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헤일스는 우선 사이버네틱스 담론의 역사를 훑기 위해 메이시 회의(Macy Conference)의 회의록부터 철저히 독해했다. 1943년부터 1954년까지 진행된 이 학회는 정보, 인지, 미디어, 사이버네틱스 등 다학제적 주제를 다루었다. 2차 대전 이후, 이제는 물리적 기계장치나 물질보다는 정보가 더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을 예견한 선각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보, 인지, 가상세계 등에 관한 개념적 틀을 잡으며 미래를 진단했다. 정보의 체계적인 가치 승격은 필연적이거나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었고, 단지 제2차 대전 이후 미국의 기술경제 상황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했던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106p). 이 회의를 거치며 사이버네틱스의 개념이 점차 구체화되었고, 여기서 정론이 된 어떤 생각들은 단지 진지한 학술 세계에 머무르는 차원을 넘어 문학, 영화, 예술 등 폭넓은 내러티브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일련의 논의를 거듭하면서 사이버네틱스 개념을 정교하게 가다듬었고, 그때 당시에는 이를 깨닫지 못했겠지만, 훗날 돌이켜 봤을 때 이 개념은 크게 세 단계의 과정을 거치며 발전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적 발전은 단계마다 분절적이지 않았다. 하나의 개념이 끝나는 시기에 새로운 개념이 부상하며 겹쳐지는 시기가 있었고, 그보다 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할 때도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단계의 키워드는 1945년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항상성’이었다. 정보를 하나의 물질처럼 전달, 측정, 예측하기 위해서는 무형의 정보를 하나의 생명체처럼 물질적 대상으로 은유하여 사고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항상성으로 연결되었다. 생명체는 외부적 자극이나 결핍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자연스러운 기제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피드백 루프가 정보의 흐름에도 있다고 가정하는 양상이 항상성 개념에서 대두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재귀성’이다. 하나의 존재가 시스템 안에 놓여 있으면서 시스템의 영향을 받거나 그것을 이용하는데, 시스템에서 존재를 향한 어떤 작용이 반대로 다시금 시스템에 반영되어 시스템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쌍방향의 복잡한 흐름이 재귀성이다. 정보를 하나의 사물로 보고 측정 가능한 영역에 주목하는 것이 항상성이라면, 재귀성은 정보를 하나의 행위로 본다. 이 행위는 적응적이며, 수행적이고, 신체적이다. 재귀성의 흐름은 쌍방향으로 향하면서 끝없는 순환의 궤적을 그린다. “인간이 컴퓨터를 만들 듯, 컴퓨터 역시 인간을 만든다(100p).”
세 번째 흐름은 ‘가상성’이다. “가상성이란 물질적 대상을 정보 패턴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문화적 개념이다(42p).” 이때부터 창발적 행동이라는 개념이 대두된다. 창발적인 행동이란 정해진 구조 없이 능동적으로 환경을 인식하고 적응하면서 자기 자신을 그 환경에 맞춰서 변화시켜 나가는 행동이다. 창발적 기능을 고려하지 않는 전통적 AI 구상안에 따르면, AI 기반의 존재는 앞으로 닥치게 될 모든 상황별 대응 논리를 경우의 수에 따라 끝도 없이 주입해 준 상태에서만 작동을 시작한다. 반면, 창발적인 AI는 최초 입력된 명령어가 거의 없이 대원칙만 주어지고 여러 상황에 부딪히면서 능동적으로 학습한다. 상황에 따라 대응하고 학습하는 과정을 통해 진화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대체로 이러한 후자의 AI 개발이 더 효율적이라는 데 의견이 모이고 있다. 이러한 3단계 사이버네틱스는 재귀성의 순환 논리를 벗어나 나선 구조로 설명된다. 재귀성의 순환 고리 속에 진화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이다(396p).
이렇게 세 단계의 흐름을 거쳐 정보는 점점 더 대단한 무언가가 되었다. 가상성 패러다임은 항상성과 재귀성이 각각 품고 있었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며 정보를 제국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이제 모든 길은 정보로 통한다. 정보는 돈이 되었고, 우리를 둘러싼 물질세계의 가시적 존재들을 하나하나 대체했고, 우리가 들어가 살게 될 새로운 영토가 되었으며, 나아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대체할 새로운 재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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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일찌감치 자신의 연구 목표를 못 박아 둔다. 그것은 신체와 정보를 분리하는 모델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39p). “신체 없는 정보와 같은 추상성에 도달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소멸시켜야 하는지 분명히 보여 주기(40p)”를 원한다. 신체/정보의 단절에 저항하는 신체화 과정을 상기시키고자 한다(52p). 가상성의 유토피아로 충만한 포스트휴먼 개념을 회의하라고 말한다(55p).
“가상성은 그것에 깊이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에 비해 어울리지 않을 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52p)”하고 있다. 하지만 정보와 물질을 분리하더라도 결국 정보는 어떻게든 물질에 의존해 생성되고 전달될 수밖에 없다. 정보가 물질을 이미 압도했고,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세계라는 속삭임은 최근 몇 년 사이 발생한 정보혁명의 성취에 취해 과장하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인류가 매일같이 어마어마하게 생산해내는 데이터를 보존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용량의 서버와 냉각수가 필요하다. 에너지 소모와 온도 상승은 불가피하다. 빅테크 기업은 그물질의 소모와 변화에 관해 논하기를 꺼리면서도 너에게 할당된 저장 용량이 다 찼으니 상위 패키지를 결제해야 한다는 알림을 보내는 데는 주저함이 없다. 또 빅테크 기업은 그 데이터를 소비하기 위한 최적의 단말기인 최첨단 스마트폰을 새로 사야 한다고 거의 세뇌 수준의 강매를 이어가고 있지만, 그 제품을 구성하는 막대한 양의 광물자원과 폐기물 처리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철저히 입을 다문다. 서버와 냉각수와 광물은 정보가 아니다. 물질이다. 실존이다. 그 물질의 소모가 여러 경로로 우리 신체의 실존을 좀먹고 있다.
우리가 정보의 유토피아를 누리느라 신체의 안위를 위협받고 있다는 증거는 뚜렷하지만, 그 증거가 주입되는 경로인 정보망은 가상성의 유토피아를 동시에 전달하면서 시시때때로 목을 조여오는 불안감을 효과적으로 상쇄한다. 신체가 좀먹으면 어때, 깎여져 나간 물질의 총량만큼을 정보로 대체하여 벌충할 수 있잖아. 신체가 전부 다 깎여져 나가버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 전에 가상의 존재, 시공간을 지배하는 정보 그 자체가 되면 되잖아! 그렇게 도래할 정보 제국의 유토피아에서 구시대적 섹스의 충일감을 느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빅테크 기업 총수들뿐이리라. 당신이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뒤통수 맞았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신체에서 정신을 뽑아내는 방법은 있을지 몰라도, 뽑아낸 정신을 다시 신체에 집어넣는 방법은 없으니. 그때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대안은 그 총수들이 자애롭게 하사하신 버튼식 오르가슴뿐이다.
“오르가슴을 느끼시겠습니까? (Y/N) (YYYYYYYYYY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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