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에 네덜란드에 다녀왔다. 짧은 기간 레이덴과 암스테르담만 찍고 왔다. 가계 사정상 최대한 소비를 억제하려 했으나, 책방에서 예기치 못한 출혈이 있었다. 다녀본 대다수 서점이 신간과 중고책을 함께 다루는 구조였다. 신간 코너의 그 어마어마한 다양성에도 물론 눈이 돌아갔지만, 중고책 중에도 숨겨진 보석이 많았다. 어디서 이런 책을 다 모아 놨을까. 심지어 안산시 공공미술 프로젝트 보고서까지 ‘한글판 원서’로 꽂혀 있었다. 신간은 환율과 물가를 고려할 때 엄두가 안 나는 물건이 많았지만, 중고책은 의외로 저렴했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도록들이 싸기까지 하니 그냥 지나치긴 힘들었다.
이 책도 그때 캐리어에 바리바리 챙겨 들어온 책 중 하나다. 도판이 많은 새책이었지만 정가는 20파운드로 생각보다 저렴했다. 주제가 마음에 들어 냉큼 들고 나왔는데, 그때는 한국어판이 있는지는 찾아볼 생각을 안 했다. 안되는 영어로 꾸역꾸역 다 읽고 정리하려고 보니 시그마북스에서 출간한 한국어판(공민희 역)이 있었다. 한국어판은 2012년 초판 버전이고, 내가 읽은 원서는 2022년에 출간된 10주년 기념 개정판이다. 새로운 사례들과 10주년 후기가 포함되어 있다.
소싯적에 읽은 ‘비포 선라이즈 & 비포 선셋’ 대본집 이후 거의 10년 만에 원서를 읽었다. 대본집에 어려운 표현이 있어 봤자 어쨌든 일상 회화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 이 전문서적(완전 학술서적까지는 아니고 대중서에서 한두 발 정도 더 들어간 전문서적)과 난이도를 비교할 수는 없다. 어휘력의 한계에 여러 차례 부딪히기는 했다만 조금 느렸을 뿐 독서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1년에 한 권 정도는 훈련 삼아 꾸준히 도전 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프란시스 보르젤로(Frances Borzello)는 시각 예술의 영원한 주제인 누드를 다루면서 그 주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이정표, 즉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의 「누드의 미술사(1956)」와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겠다는 계획을 분명히 밝힌다. 클라크는 미술사의 고전이 된 그 책에서 누드(the nude)와 알몸(the naked)을 구분한다. 알몸은 말 그대로 그냥 벗은 몸이다. 씻거나, 속옷을 갈아입거나, 혹은 어떤 행위를 위해, 심지어 그냥 그렇게 태어나서 벗은 상태를 지칭한다. 알몸의 벗는 행위는 기능적이고 필연적이다. 그에 반해 누드는 알몸이 미학적으로 승화된 상태이다. 어떤 이상향이나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벗은 것이므로 우리는 누드를 미적으로 관조할 수 있다. 누드에서 벗음이라는 행위는 미학적으로 승인된 영역 안에 놓여 있다. 그 승인은 유구한 미술사의 흐름 속에 관행과 혁신의 반복적 순환을 거쳐 사회문화적으로 완전히 인준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격조 높은 공공장소인 미술관에서 전혀 거리낌이나 당황스러움 없이,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누드를 바라보며 어떤 감정을 느끼거나 사유를 도출할 수 있다. 단, 견고했던 누드의 승인은 한순간에 분열되기도 한다. 최근 미국 플로리다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다비드상 사진을 보여준 교장이 학부모들의 항의를 받아 결국 사임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사태는 유구한 역사 속에 확립된 누드의 미학적 인준이 특정한 정치사회적 맥락과 맞물려 순식간에 변모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벌거벗은 육체가 얼마나 다양한 이해와 첨예한 쟁점들을 야기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알몸과 누드의 본질적 차이는 벗은 그 상태가 특정 개인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보편적 이상을 추구하는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술사에서 누드는 기본적으로 이상적인 형태를 향한 끝없는 연구와 경쟁을 통해 발전했다. 선사시대 비너스 상에 관한 문헌적 증거는 아무것도 없지만, 여인의 생식기와 신체적 특성을 과장하는 그 형상이 특정한 개인을 관찰한 대로 묘사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대 그리스 청동상이나 로마 시대의 대리석 모각이 보여주는 이상적 육체에는 신을 닮고 싶은 당대 보편적 욕망이나 그 욕망을 부추기고 싶은 권력의 프로파간다가 담겨 있다. 그 완벽한 육체는 당대 스포츠 영웅이나 창기의 아름다운 육체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최종적 결과물의 비교 대상은 저 올림포스산을 가리킨다.
조르조네(Giorgione), 티치아노(Titian),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등이 선보였던 프로토타입인 기대어 누운 누드(reclining nude)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대가들이 특정한 인물을 모델로 두고 그 비너스를 탄생시켰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최종적 결과물에서 특정한 인물을 유추할 수 있는 정황은 없다. 이상화되었음이 명백한 얼굴과 몸매는 개인적 특질을 고려하지 않으며, 당대 동시대인들이 두루 공유했던 보편적 미의 관념만을 웅변한다. 겨드랑이털과 음모가 말끔하게 제거된 그 육체는 대리석처럼 차갑다.
결국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신체가 있다. 하나는 이상적이고, 다른 하나는 이상하다. 불철주야인고의 시간 끝에 제련된 소수 1%가 아니고서야 우리는 대부분 이상한 영역에 서 있다. 저자는 이 이상한 영역을 다룬다. 케네스 클라크는 우리가 누드를 보고 그것에 관해 논할 때는 알몸에서 마주할 수 있는 불편한 구석을 느끼지 않게 된다고 했는데, 이 책에서는 그 불편한 구석들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고전적인 관점의 누드가 애써 무시해 온 알몸의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측면들을 집중해 들여다보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케네스 클라크의 ‘누드’와 구별되는 이른바 ‘벌거벗은 누드(the naked nude)’다.
근대 이전의 미술은 보통사람의 일상적 삶에 관심이 없었다. 진지하게 다뤄질 수 있는 주제는 신, 역사, 위대한 인물, 보편적 진리였다. 미술은 일상적 삶보다 우위에 있었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한 값비싼 재료와 인건비는 아무 주제나 다룰 수 없는 일종의 경제적 제약을 부과했다. 오직 부와 권력을 가진 자만이 작품을 주문할 수 있었고, 그들의 기호와 의도를 고려하지 않은 작품은 작업실 밖을 빠져나올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근대의 생산성 혁명과 함께 자원의 잉여가 넘쳐나게 되었고, 시간적 여유도 생겼으며, 정치적으로도 안정되면서 새로운 미감이 형성되었다. 카메라와 사진술이 발명되어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비용이 비약적으로 절감되었고, 보통사람들도 초상 이미지 하나쯤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권력이나 역사보다 일상적 삶이 미술의 주제가 되었다. 이러한 혁신의 분위기 속에 인상주의와 정신분석학과 바우하우스를 거쳐 누드의 탈역사화가 착실히 진행되었다. 이제 누드는 역사와 신화라는 면죄부를 덧입지 않고도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누드는 개인의 욕망과 문화적 승인 사이의 경계를 건드리며 영원한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누드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건네고 싶을 때 더없이 좋은 재료이기도 했다.
벌거벗은 누드는 서사에 기대지 않는 누드다. 누드가 신화와 역사를 참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누드의 진짜 주인공에 주목하게 된다. 서사를 벗겨낸 누드는 거추장스러운 제도와 문화의 굴레를 훌훌 벗어던진 현존재를 지목한다. 개인의 가장 감추고 싶은 내밀한 속내를 드러낸다. 우리의 본질이라고 부를만한 뭔가가 두개골 아래 어딘가에서부터 몸 구석구석으로 신경망을 타고 흘러 다닌다면, 그 본질에 한 겹이라도 가깝게 다가가는 행위가 바로 벌거벗는 것이다. 피부 아래까지 다 까발릴 수는 없으니, 아쉬운 대로 제도적/문화적 굴레인 옷이라도 훌훌 벗어 던지는 것이다.
보편적 미의 관념을 표현하던 기대어 누운 누드에서 전례 없이 특정인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 순간, 그리고 그 모델이 자기 몸 구석구석에 관음증적 시선을 허용하며 시선을 돌리는 대신 오히려 관객(주문자)과 빤히 눈을 마주친 순간, 누드의 미학적 문법에 최초의 균열이 시작되었다. 고야의 그 혁신으로부터 마네를 거쳐 우리는 벌거벗은 몸을 전복적 행위의 재료로 쓰거나(캐롤리 슈니먼_Carolee Schneemann), 수천 명의 누드를 대지에 흩뿌려 놓아도(스펜서 튜닉_Spencer Tunick) 대수롭지 않은 해외 토픽으로 흘려듣고 마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 이제 인간의 몸이 의미 있는 반응을 일으키려면 더 큰 역치가 필요하다. 스크롤을 타고 쉴새 없이 쏟아지는 ‘숏츠’ 영상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몸이 이제 더는 새로운 충격을 줄 수 없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다음 재료/주제는 무엇일까?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기술적 변화로 인해 몸을 둘러싼 일련의 체계가 총체적으로 변하더라도, 몸이 정신과 세계를 연결하는 궁극의 인터페이스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사이버네틱스의 가상화 흐름 속에서도 정신을 담을 그릇 자체가 무용해질 수는 없다. AI의 진화로 득을 보고 있는 것은 뇌과학자나 엔지니어가 아니라 엔비디아다. 불과 2~3년 전의 비대면 광풍은 오히려 접촉의 대체 불가능성만을 확고히 했다. 몸을 경유하지 않는 접촉과 소통이 무의미한 상황에서 몸 다음은 없다. 미술, 아니 현대적 개념의 미술에 빗댈만한 인류 창작물의 역사는 몸을 재현하거나 몸의 흔적으로 시작했고, 그것의 마지막 장이 온다면, 그 또한 그 시대의 몸일 것이다. 몸은 궁극의 주제이자 재료이다.
저자는 논의의 끝에서 누드의 두 가지 용례를 비교하며 벌거벗은 누드가 나아가야 할 길을 암시한다. 예술의 누드가 상업적 미디어 속 누드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예술가들이 누드를 통해 들여다보고자 하는 주제가 인간성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예술의 영토에서 벌거벗은 누드는 인간성의 회복을 노골적으로 주장하거나, 적어도 그것의 본질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라고 멍석을 깐다. 반면 미디어의 누드는 몸을 팔아 돈을 만드는데, 그때 인간성도 번들로 묶어 같이 팔아넘긴다. 누드를 팔아 돈을 만드는 기제는 고대 로마 목욕탕의 벽화나 심지어 중세 고딕 제단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권력으로부터 부여받은 주제 안에서 창의성을 발휘한 선대 장인이나 예술가까지 싸잡아 현대적 미디어 개념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 상업화의 극한까지 치닫는 미디어 생태계는 원래 몸으로 먹고살던 사람들의 몸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이제는 보통사람 중 그나마 봐줄 만한 몸도 상품화의 덫을 피하기 어려우며, 그보다 비루한 몸들도 약간의 기술적 도움을 힘입는다면 상품화 대열에 합류할 수 있고, 그보다 더 비루한 몸은 아예 전혀 다른 경로의 상품이 될 수 있다. 이제 몸의 모든 국면에 가격표를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벌거벗은 누드는 인간성을 상기시키기도, 인간성을 상실시키기도 한다. 극단적 이미지만이 드러날 권리를 얻는 이 시대는 그 양극단의 방향성을 부추길 것이고 중간지대는 날이 갈수록 좁아질 것이다. 후자의 득세를 막으려면, 아니 늦추려면, 전자의 영토를 넓혀야 하고, 그러려면, 미술계의 담론을 형성하는 지식인들이 진지한 예술계에서 벌거벗은 누드에 투신한 예술가들을 위해 대중의 미감을 확장하고 사회적 용인의 허들을 낮추는 비평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일시적 손가락질이 두려워 인민재판과 마녀사냥에 편승한다면, 학생들에게 다비드상을 보여줬다가 강제로 퇴임하게 된 교장의 사례는 만리타국 남의 일이 아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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