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근의 입도조, 소니아 샤의 「인류, 이주, 생존」

Sonia Shah, The Next Great Migration

“토착민과 이주자라는 정체성은 영구적인 존재 상태가 아니다.”

366p

“우리는 신참자를, 이주자를, 침입자를 예외로 여기는 압도적인 정주의 감각에 빠져들기 쉽다.”

495p

이주에 관한 두 가지 시선

작년 가을에 출장차 찾은 제주에서 어렵사리 시간을 내어 도립미술관에 들렀다. 「이주하는 인간 – 호모 미그라티오」 展이 한창이었다. 역사적, 문화적, 생태적, 우발적 이주의 다양한 양태를 예술로 승화한 시도들이 폭넓게 다뤄졌다. 이주라는 느슨한 주제 아래 9개국, 20개팀, 27명의 작가가 보여주는 자유분방한 시선과 다매체적 실험이 인상적이었다.

이 전시에서 특히 주목했던 작품은 박정근의 <입도조> 연작이었다. ‘입도조(入島祖)’란 말 그대로 섬에 들어선 조상이다. 누군가 이런저런 이유로 섬에 첫발을 디뎌 그 섬에 뿌리를 내린 1세대가 된다면 입도조라고 할 수 있다. 음성에서 태어나 가족과 함께 제주에 정착한 박정근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입도조들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두고 셔터를 눌렀다. 그가 포착한 입도조는, 만약 그들이 섬 밖에서 들어와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기 위해 나름의 투쟁을 이어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본다면, 크고 묵직한 카메라 앞에서 한없이 경직될 수밖에 없는 평범한 우리네 이웃일 뿐이다. 그들이 입도조라는 사실에 새삼 주목할 때, 우리는 그 무표정한 경직 속에서 묘한 긴장감, 억척스러움, 다부짐, 체념, 외로움 같은 정서를 읽는다. 이미지가 맥락의 망을 투과하고 나면, 그 이미지는 더 이상 이전과 같아 보이지 않는다.

이 복잡한 감정은 어디서 오나? 이 감정은 내가 차마 해내지 못한 것을 해낸 누군가에게 보내는 존경스러움, 내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을 하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멸시, 내가 꾸역꾸역했던 무언가를 뒤이어서 하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연민, 이 중에 하나겠지만, 딱 하나일 수는 없다. 복합적 감정의 화학작용 속에서 최초의 용질을 하나하나 구분해낼 수는 없다. 그저 이 용액에 무언가가 어느 정도 비율로 섞여 들어갔으리라고 추측할 따름이다. 그러니 <입도조>를 바라보며 느끼는 나의 고유한 감정은 이주의 숙명을 타고난 지구 위의 생명체, 그중에서도 특히 ‘호모 미그라티오(Homo Migratio)’로서 ‘나’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박정근의 세션에서 사진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그의 피사체가 제출한 주민등록표 초본이었다. 태어나서 입도하기까지의 모든 주소 변경 이력을 기재하고, 거기에 거주지에 얽힌 내밀한 사연까지 꼼꼼히 적어 확대 인쇄한 행정 서류가 주인공의 사진과 나란히 게시됨으로써, ‘인물 – 이미지 – (공증된) 서사’가 삼위일체를 이루었다. 아마 이 작품의 피사체가 되기로 선택한 주인공들은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었겠지. 나 같으면 아무리 재기발랄한 컨템포러리 아트의 주인공이 되는 영광을 준다고 하더라도 내 과거의 어떤 한순간의 과오, 그러니까 나조차 기억 못 할 더러운 삶의 흔적이 나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까 두려워 차마 내 삶의 궤적 전체를 낱낱이 작품 일부로 출품하는 용기를 차마 내지는 못했으리라. 해남, 진주, 태백, 의정부, 양주를 경유로 이곳에 장착하기까지, 삶의 궤적을 스쳐 지나가는 작은 편린 하나가 누군가에게 부지 부식 간에 물어뜯을 빌미를 줬을지 누가 알겠는가. (나는 스쳐 지나간 작은 과오가 큰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망상에 자주 사로잡히곤 하는데, 아마 영화 <올드보이>를 본 이후 더 강화된 느낌인 듯하다.) 그 모든 곳의 상세 주소와 축축한 자기연민으로 가득한 사연들을 공공재로 낱낱이 오픈할 용기가 나에겐 없다. 하지만 공중의 시선 앞에 당당히 고개를 쳐든 박정근의 피사체들은 그 모든 압력과 두려움을 뚫고 그것을 해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실존과 포개지거나 절묘하게 빗겨 지나가는 특정한 좌표를 경유하는 삶의 내러티브가 미학적 영토에 똬리를 틀었다. 확대 인쇄된 초본 위를 넘실거리는 사연들이 그 앞에서 관음증적 시선으로 서성거리는 우리 각자의 이야기와 중첩되고, 전시관을 빠져나오는 우리 뒤통수를 투과하여 세상 밖으로까지 미어져 흘러나온다. 이 글은 그러한 유동의 흔적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제주도립미술관은 기획 서문에서 소니아 샤(Sonia Shah)의 「인류, 이주, 생존」이 전시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명확히 언급했다. 책과 전시가 모티브와 실천으로 연결되니, 전시에서 느꼈던 바를 잠시 언급하고 이어서 책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논하는 식으로 이 글을 쓰려 했다. 하지만 예기치 않게 서두가 길어졌다. 계획과 달리 늘어지는 것에는 뭔가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책보다는 전시와 작품이 나에게 준 영감이 더 컸던 모양이다.

인도계 미국 이민자 가정의 2세인 저자는 저널리즘적 글쓰기로 동식물과 인류의 이주에 관해 논한다. 저자의 배경에서 유추할 수 있듯, 책의 모든 논점이 이주를 긍정한다. 지구를 뒤덮은 모든 동식물과 마찬가지로 인류도 살기 위해 이주해왔다. 이주는 생명의 본질이다. 생명은 이주를 통해 새로운 터전, 식량, 동료, 짝을 만나고, 그 결합을 통해 더 우월한 존재로 진화한다.

모든 생명이 각자 정해진 특정한 위치를 점한다는 생각은 신의 창조물에 한점도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그릇된 신화이고, 이주의 긴 서사를 관통하지 못하는 근시안적 추론의 산물이다. 안락한 영토로 들어오는 이주자에게 품는 정착민들의 경계심과 두려움의 토대에는 바로 그러한 그릇된 신화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근시안적 시선은 내 눈길이 닿을 수 있는 지점까지만 바라본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포함한 거의 모든 생명체가 궁극적으로는 이주자일 뿐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불과 200여 년 전에 원주민을 대부분 죽이거나 한구석으로 몰아내며 이주해 들어와 놓고서는 이제는 자기들만이 정통성 있는 정착민이라며, 더 이상의 이주자는 막겠다며 거대 장벽을 세우는 제국을 우리는 묵도했다. 소니아 샤는 최신의 과학기술 학술 문헌을 탐독하고, 이주에 관한 지구촌 곳곳의 뉴스를 따라가고, 고된 이주의 여정에 내몰린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발걸음에 동행하며 이주자를 악마화하는 그릇된 신화를 조금이라도 희석하려 안간힘을 쓴다. 그 열정에는 박수를 보낼만 하다. 이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에 기반한 논점들이 확산되어 이주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이라도 따듯해질 수 있다면, 저자는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몇 세대에 걸쳐 꾸준히 그곳에 거주했다는 이유로 토착민과 외부자를 가르는 것은 결국 자의적이다.”

335p

그럼에도 무력감은 가시지 않는다. 이 책이 이주자로 인해 실존적 손해를 입는 사람들을 위한 실무적 솔루션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갑자기 급증하게 된 가마우지로 인해 생계 수단을 잃은 어업 종사자들을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 그들에게 근시안적인 마음을 버리십시오, 우리도 전체 역사 차원에서는 이 땅의 외래종일 수 있습니다, 가마우지가 장기적으로는 우리 생태계에 융화되어 생물 다양성을 증진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라고 이야기해 본들 당장의 실존적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공감 능력 없는 사이코패스 소리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러니 이 책의 담론은 구름 위에 살포시 올려놓은 그 상태로만 만족해야 한다. 이주로 인한 즉물적 피해가 없는 누군가의 잠재적 불안감에는 유효한 처방이 될 수 있으나, 현재 이주자로 인해 실시간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감각에 짓눌린 누군가에게는 다른 말을 건네야 한다.

영화배우 정우성도 생각난다.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 오랜 시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의 행보는 참으로 존경할만하다. 난민구호를 옹호하는 그의 인터뷰를 읽다 보면 감동과 연민을 느끼지만, 그 밑에는 어김없이 다음과 같은 논조의 비아냥 섞인 댓글이 등장하며 인류애를 부숴버리곤 한다: “그렇게 잘난 너희 집에 난민 들여서 같이 살아 보고나 그런 말 하시지.” 이 얼마나 저열한 논리인가. 마치 직접 신장 하나씩 떼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지 않고서는 장기기증 옹호 토론회에 참석할 수 없다는 말이나 같은 것 아닌가. 이 지구를 공유하는 가엾은 어떤 대상을 향해 연민을 갖고 아주 작은 호의를 베풀어 달라는 호소가 화자 스스로 최상급의 실천을 직접 이행하지 않을 거면 차라리 닥치라는 일갈로 되돌아온다면, 이 세상에서는 누군가를 설득할만한 그 어떤 언사도 오갈 수 없게 되리라.

소니아 샤가 전하는 메시지도 딱 그 정도의 나지막한 설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각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작은 물리적/제도적 범위 안에서 모든 생명체의 생존을 뒷받침하는 이주를 위한 좁은 통로 하나쯤 열어주도록 섬세한 시선과 부지런한 손길을 갖자는 것. 언젠가 그 통로가 우리에게 생명의 숨통으로 되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현재로서 우리가 가로막힌 이주의 무력감에 대응할 수 있는 길은 그뿐이다.


No Day But Today에서 더 알아보기

구독을 신청하면 최신 게시물을 이메일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

박정근의 입도조, 소니아 샤의 「인류, 이주, 생존」”에 대한 답글 1개

Add yours

댓글 남기기

워드프레스닷컴에서 웹사이트 또는 블로그 만들기

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