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s De Waal(1982), Chimpanzee Politics: Power and Sex among Apes
동물원은 야생과 다르다.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과학적 지식은 끊임없이 진보한다. 캄캄했던 어둠은 언젠가 걷힌다. 어떤 대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때와 많은 것을 알고 난 후 그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동물이 감정을 느끼는지, 복잡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지, 제한적으로나마 지성을 발전시켜 나가는지 등에 관해 밝혀진 바가 없었고,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하였다. 동물은 오로지 섭식과 번식의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하등의 존재들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본능을 넘어선 고차원적인 정서적 가능성은 애써 무시되곤 했다. 오로지 인간만 영혼이 있는 선택된 피조물이고, 사후생의 권리가 있고, 신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서구 기독교적 위계 인식에 사로잡혀 동물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그들과 공존하려는 가능성은 절하되었다.
이 책이 1982년 발간 당시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은 이러한 배경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침팬지 폴리틱스」은 개별 침팬지 개체들의 고유한 개성, 성별 역할 차이, 권력 서열의 상위를 차지하기 위한 암투와 협력, 생존과 욕망의 기로에서 나날이 복잡해지는 사회적 네트워크 등을 다루고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BBC, 디스커버리 채널 같은 글로벌 다큐멘터리 네트워크의 은총을 받아 안방에서 매일같이 야생동물의 땀구멍까지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는 오늘날 우리로서는 저자의 관찰과 주장이 당시에 왜 논쟁적이었는지 자체를 이해하기 어렵다. 종마다 차이는 있지만, 동물들도 당연히 개체마다 개성이 있고, 권력욕이 있고, 전투와 음모와 협력이 뒤얽힌 사회적 망에서 살아간다. 인간과 유전자가 98% 같다는 침팬지라면 하물며 그러한 사실이 놀랍지 않다. 그러니 이 책에서 새롭고 놀라운 지식을 얻으려는 기대는 잠시 접어두고, 어떤 분야에서 선도적 연구의 사례를 훑어본다는 가벼운 마음을 갖는 편이 낫다. 미술사적 혁신의 순간을 상징하는 하나의 작품을 그때 당시의 눈으로 봐야 하듯, 한 권의 책이 지닌 가치도 발간 당시 지적 구조 속에서의 영향력과 참신성에 견주어 평가함이 바람직하다.
우리에게는 1970년대 말 당시 저자의 새로운 발견들이 전혀 새롭다거나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연구 내용보다는 오히려 연구의 방법론적 한계들이 도드라져 보인다.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의 관찰 연구는 아른험(Arnhem) 동물원에서 이루어졌다. 크고 자연 친화적인 동물원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동물원은 동물원일 뿐 야생과 같을 수 없다. 여기서는 무리가 먹이를 찾으러 영토를 확장하거나 이주하지 못하고, 다른 부족을 만나 전쟁을 벌이지도 못한다. 먹이활동에 쏟는 에너지가 상당 부분 분출되지 못하고 억제된 상태에서 다른 방향으로 분출된다는 것도 야생과 크게 다른 점이다. 과잉사회화의 편향성을 내포한다고 봐야 한다. 이 책이 침팬지의 정치적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과잉사회화된 개체들의 이야기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행동하기는 하나, 그 정치성은 과잉되고 함축적일 가능성이 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나는 솔로>라는 짝짓기 프로그램을 떠올린다. 이 프로그램의 특징은 출연자를 일정 기간 통제된 환경에 가둠으로써 연애질에서 벗어난 의식주에 관한 상념들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연히 <나는 솔로>의 연애 메커니즘은 사회 속 우리 현실의 함축판이기는 하나, 그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한편, 동물원 침팬지들은 사실상 단일부족이다. 여기서 다른 부족과 만남이라는 중요한 우발성이 배제된 상태이므로, 사회적 행태의 아주 중요한 요소가 관찰 범위에서 배제된 셈이다. 이렇게 갇힌 생태계에서는 근친상간의 문제를 피하기 어렵다(245p).

저자는 이러한 한계를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자기 방법론적 한계를 무마하고자 전체 무리의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관찰할 수 있는 동물원 환경이 침팬지 행태 연구에 적합하다고 서두부터 전제를 깔아 둔다(29p). 하지만 그 관찰도 엄밀하게 관찰은 아니다. 이 연구에서 연구자는 수의사와 상의하여 어떤 음식을 어떤 방식으로 줄지 결정할 수 있다. 또 어떤 개체를 무리에 포함하거나 배제할 것인지, 포함한다면 어떻게 기존 무리와 소개할 것인지 등도 결정한다. 새끼를 제대로 키울 수 없는 어미로부터 새끼를 분리하여 다른 암컷에게 입양 보내기도 한다. 연구자와 수의사의 개입에 응하거나 반하여 침팬지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바는 별로 없다. 어떤 조작이 가해지고 나면 그들은 어떻게든 새로운 제도에 나름의 방식으로 적응한다. 침팬지의 자연스러운 행동에 대한 관찰이라기보다는 조작실험에 가까운 경우가 많은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실험적 환경에서 관찰한 결과가 야생에서 직접 관찰한 연구결과와도 크게 다를 바 없다고 계속 되뇐다(66p, 98p, 276p 등; 물론 그가 인용한 연구들이 진짜 야생에서 있는 그대로 관찰한 결과인지까지 들여다볼 시간/열정이 우리에게 있을 리 없다). 그럼으로써 자기 연구결과가 실험적 환경에서만 특수하게 관찰된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보편성의 성좌로 나아간다. 야생 선행연구와 본인의 연구결과가 자못 다르다는 점을 솔직하게 시인하는 대목은 근친상간 문제에 대해서 이례적으로 등장한다. 갇힌 생태계인 동물원에서 근친상간 가능성은 큰 문제일 수밖에 없는데, 야생 침팬지들은 그것을 피하는 메커니즘이 발달해 있다며, 이러한 “메커니즘에 대한 진정한 테스트는 수년 내로 이뤄질 것이(245p)”라는 후속 연구의 방향성을 내비친다. 여기서도 명확히 자인 되듯, 이 보고서는 관찰연구라기보다 실험(test)연구에 가깝다.
영장류학자가 실험연구를 했다는 사실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당연히 그러한 실험을 통해서 유용한 지식이 많이 발굴되기 마련이다. 다만, 이 저술 전반에 걸쳐 침팬지라면 응당 그러하리라는 보편화 시도가 녹아들어 있고, 독자들은 야생의 모든 침팬지가 이 책 속 주인공들과 유사한 패턴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암암리에 수긍해버릴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야생 침팬지가 여기 등장하는 이에룬, 니키, 라윗과 유사한 패턴으로 권력 암투를 벌이리라는 보장은 없다. 야생 침팬지가 처한 환경은 훨씬 척박하고, 급변하고, 냉혹하다. 그들은 날이 갈수록 더 좁아지고 악화하는 환경에 나름대로 적응하면서 제국을 이어가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조작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DNA에 각인된 선험적 명령과 선조로부터 보고 배운 것을 결합하고, 아예 새로운 도전에 맞설 때는 본능, 지성, 심지어 집단지성을 모두 짜내 적절히 대응하며 살아간다. 그 삶은 동물원 동족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같다고도 볼 수 없다. 무엇이 구체적으로 다른지는 비전문가인 내가 설명할 수 없지만, 그 힌트 중 하나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인 <침팬지의 제국_Chimp Empire(2023)>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물원보다는 야생에 가까운 이 작품에서, 무리 내의 권력 투쟁이 다른 무리와의 영토전쟁과 복잡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양상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확실히 우간다에서는 권력다툼과 의례에 쏟을 힘과 시간이 충분치 않다. 하루하루 먹이 조달하는 것 자체가 생의 투쟁이다. 이 책이 선도적인 연구로서 오늘날에도 가치 있고, 이후로도 계속 추천할만한 가치가 있다면, 통제된 범위 안에서 조작 및 관찰된 결과물이라는 점이 (추천사에서든 옮긴이 서문에서든) 분명히 언급되어야 한다. 이 책이 실험의 제약조건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학자들을 대상으로 쓰인 것이 아닌, 대중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동물원과 야생은 엄연히 다르다는 내 주장의 기본 전제가 시간이 흐를수록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새삼 재인하게 된다는 사실이 슬프다. 동물원과 확연히 달랐을, 달랐어야만 하는, 그 야생의 환경이 점차 동물원과 마찬가지로 갇힌 생태계로 변모하고 있다는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여느 야생동물도 마찬가지겠지만, 서식지와 서식지 사이에 농장, 마을, 도로가 생겨 자유롭게 왕래하던 동선이 끊기면서 섬 아닌 섬에 갇혀버린 영장류 무리가 증가하고 있다. 식량이 고갈되고 짝을 만날 수 없는 서식지는 무덤으로 변한다. 새로운 서식지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무도한 손이 닿은 공간을 지나야 한다. 가로막혀 있는 경우가 많고, 혹여 지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침입자’라는 부당한 처우와 목숨을 건 위험을 감내해야 한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물들도 이주하지 않으면, 서로 뒤섞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제한된 범위에서 통제된 관찰과 조작이 가능했다는 이유로 동물원을 찾았던 학자들이 이제는 같은 이유로 국립공원이나 열대우림을 찾게 될 것이다. 그때 그들이 보편화를 시도하려 인용할 ‘진짜 야생’의 사례는 동시대 연구가 아닌 전설처럼 내려오는 닳고 닳은 선행연구에서만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통제된 삶을 원하지 않듯, 갇힌 생태계에서 통제된 가능성에만 만족하며 종의 명운을 이어가고 싶은 개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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