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청년작가전: 누벨바그 展 (포항시립미술관)

안효찬의 디스토피아와 탈출구

환여횟집에서 물회를 먹고 포항시립미술관에 갔다. 두 개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는데, 하나는 ‘지역원로작가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영남청년작가전’이었다. 이런 걸 두고 신구의 격돌이라고 하던가. 경쟁 붙이려는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두 세대의 대표선수들이 나와서 겨루는 모양새가 됐다.

지역 화단을 오랜 시간 묵묵히 지켜온 한 원로작가의 따뜻한 미감을 <김정숙: 나의 에세이> 展에서 느낄 수 있었다. 여인과 자연을 향한 일관되고 애정 어린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청년작가들을 이 옆에 붙여 놓고 보니 확실히 달랐다. 세상, 내면, 혹은 예술 그 자체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들이 종잡을 수 없는 저마다의 형식으로 분출됐다.

그중에서도 나는 (당연히) 안효찬에 주목했다.

앙상한 철근 위에 철거 건축물 잔해에서 주워온 듯한 비정형의 구조물이 있고, 그 위에 디스토피아적 건설 현장의 미니어처가 매우 정교하게 묘사되었다. 회갈색이 뒤범벅된 비정형의 대지와 건축물은 나름의 정교함 속에서도 질서 없이 얼기설기 쌓아 놓은 형국이라, 착실히 망해가는 어느 시대착오적 공산국가의 비밀수용소 건설 현장 같기도 하고, 모종의 이유로 멸망해 버린 어느 나라의 어느 작은 땅뙈기에 마지막 남은 희망처럼 우뚝 선 임시사령부 청사 같기도 하다.

그곳에서는 제국의 승인 혹은 묵인 아래 기묘한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 무고한 돼지가 기운 없이 축 늘어진 채 제국의 일꾼들에 의해 측량되거나 잘리거나 혹은 그보다 더 참혹한 어떤 상황에 놓이기 일보 직전인 상태로 그렇게 누워 있다. 우리는 당연히 포유류의 표정을 읽을 능력이 있고, 본능적으로 이 작품 앞에서 그렇게 하려고 무의식적으로 노력하지만, 이내 이 작품에서 돼지의 표정을 독해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고사’라는 의례에 내재한 폭력성을 고발한 작가의 전작이 좀 더 직관적으로 돼지의 표정을 드러냄으로써 아이러니를 부각하려 했던 것과 달리, 이번 시리즈에서 작가는 의도적으로 돼지의 표정을 덮거나 뿌옇게 흐려 놓았다. 이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인해 전체적 정황의 스산함과 미스터리는 증폭된다.

아, 왜 하필 돼지인가? 돼지가 우리에게 주는 행복감과 기복적 가치와 죄책감의 복합체는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삼겹살집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나의 살과 피를 즐기라고 말하는 귀여운 돼지 광고물을 지나쳐 가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도축장에 가면 돼지는 버릴 게 없는 짐승이라고들 이야기하는데, 그 말은 우리가 어떤 생명체를 착취하는 기술이 그만큼 최정점에 도달해 있다는 뜻이고, 이 먹이사슬의 구조에 우리 자신도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서 참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안효찬이 출품한 가장 큰 작품인 <희미한 구조(2021)>에서는 착취로 굴러가는 디스토피아적 건설 현장, 무표정한 아파트 군락, 엉성한 ‘남근-타워’ 위 위태로운 타워크레인 등 작가의 핵심적 모티브가 총출동했다. 회백색의 아파트는 문도 없이 창도 없이 앙상한 목재 프레임 위에 가까스로 얹어졌고, 이 덧없는 물욕의 기호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착취의 제국과 뒤섞여 나란히 공명하며 허울뿐인 욕망의 무력감을 드러낸다.

하나의 시각장으로 포섭된 이 구조체는 우리가 애써 눈감고 싶었던 악의 공모다. 이 공모에서 쌀 한 톨이라도 떨어진다는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저 손톱만 한 인부 중 하나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눈 딱 감고’ 인부가 되기를 선택한 후 이내 감았던 눈을 뜬 그 순간,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장면은 사지가 절단된 채 계측 당하는 우리 자신의 신체다. 손톱만 한 인부가 되어 디스토피아 현장의 배우가 되기보다는 전체 구조체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이 폭넓은 시각장의 주체가 되는 것, 나아가 포식자-피식자의 사슬 밖에서 그 사슬을 관통하는 담론을 생산하는 것, 이것이 안효찬의 현기증 나는 디스토피아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비좁은 탈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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