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서 더 멀리: Afterglow 展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회화과 석사학위청구전, 홍익대학교 문헌관 4층 현대미술관)

참조점 없는 예술에 대한 증명할 수 없는 가설들: 졸업전시라는 특수한 제도적 맥락에서

아마추어 미술사 연구회를 운영하던 당시 회원 중에는 작품 구매와 그에 수반되는 부수적인 경제적 이윤에 대한 관심이 큰 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은 어떤 작품을 구매해야 하는지 나에게 종종 묻곤 했다. 번지수를 잘못 짚은 질문이었다. 나는 작품을 구매해 본 적도 없고(딱 한 작품을 구매했지만, 해당 작품의 작가와 경제공동체가 되는 바람에 그 작품의 소유권은 애매해진 상태다), 소위 ‘아트테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므로 농반진반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미대 졸업전시에 가서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이 있으면 그 작가에게 연락해 만나보고, 깊은 대화를 나눠본 후 구매하세요.” 이미 값이 오를 대로 오른 기성 작가들의 시장에서 고점에 물리기보다는 예비 작가의 잠재력을 보고 장기투자하라는 취지였다.

내가 그때 좀 더 사려 깊었다면 그냥 졸업전시가 아닌, 대학원 졸업전시라고 했을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석사학위 청구전이라고 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학부 졸업전시는 너무 투자 리스크가 크다. 미대 학부 졸업자 중에 10년, 20년 후쯤 진정한 순수예술 작가로서 이름을 떨칠 이가 몇 퍼센트나 남겠나. 그렇다고 박사학위 청구전까지 눈을 돌리자니, 그들은 대체로 이미 미술계에서 어느 정도 커리어를 쌓았을 터이니 벤처투자로서 의미는 없을 게다. 그러니 석사학위 청구전이 리스크와 과도한 투자금 사이에서 적정선이 아닐까 싶다.

이번 홍대 석사학위 청구전은 두 파트로 나눠 각각 한 주씩 진행됐다. 모두 평일에, 그것도 공무원 근무시간에만 진행됐다는 점에서 대중 친화적 전시라고 보기는 어렵다. 말 그대로 졸업전시의 외형을 갖추기에 급급한, 다분히 내부자들만의 축제로서 의미를 지니는 전시에 가깝다. 작가들은 1부와 2부로 나뉘었는데, 주제 및 형식에 따른 군집이 아닌, 공간적 한계를 고려한 임의 배정이었다. 그러니 이 구분에서 의미를 발견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나는 2부만 봤고, 이 세션의 어느 작가와 긴밀한 사적 이해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설치에도 미미하게 관여했다. 기획과정을 제쳐둔다면 전시 설치는 백화점에서 특정 매장을 신규 오픈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나는 두 노동을 모두 경험해 봤으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참고로 백화점에서 매장 오픈하는 작업을 ‘까대기’라고 한다). 미명의 현장에 일부 관계자만 잠입해 들어가서 다소 난잡한 육체노동 과정을 통해 작품/상품을 심미적으로 배열한다. 신비화를 위해 이 과정은 철저한 보안에 부쳐진다. 육체노동을 추동하는 정신적 기저는 최종적으로 완성된 상태의 완전 무결성에 대한 이데아, 그리고 언젠가 작품/상품과 마주할 관객/고객의 예기치 못한 상호작용을 둘러싼 신비주의적 기대다. 모든 유토피아는 도래하지 않아서 아름답고, 너무 아름다워서 도래하지 않는다.

2부에서 본 작품들이 전체적으로 이렇더라는 말은 함부로 할 수 없다. 내가 어느 작가와 사적 이해관계를 맺고 있어서가 아니라 (솔직히 그렇기도 하지만) 작가들 사이에 공통분모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연히 같은 시기에 같은 대학원에서 수련했을 뿐, 인구통계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공통분모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실증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느낌만을 말할 따름인데, 이들의 작품에서 세상과의 구체적인 연결점보다는 작가의 내면으로 침전하는 경향이 조금 더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작가가 창조해 낸 시각적 산물은 당연히 그가 세상 속에서 보고, 듣고, 느낀 모든 바의 총체를 내면에서 재해석한 결과물이다. 그러니 고도의 미적 창조물의 표면에 세상과 내면의 함량을 기입하는 일은 제조물책임법에 의한 표시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미술사의 흐름 속에, 혹은 동시대 미술이 보여주는 다극단(多極端) 스펙트럼의 지평 속에 특정 작가의 내면이나 제도권 미술계의 피드백 루프를 넘어서는 외부 세계와의 참조점에 대한 표면화 정도는 지각 있는 관객의 인식 범위에 놓인다. 구상/추상의 낡은 이분법을 따르지 않더라도, 어떤 작품이 이 세상의 구체적인 대상 혹은 사건을 지목하고 있다는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직접적인 진술이나 우회적인 방식이 전시의 맥락에 배열될 수 있다는 말이다.

단서를 단서라 명명하는 것, 그 단서의 선명성 수준을 측정하는 것은 모두 자의적이다. 자의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 어떤 최고 수준의 사상가와 이론을 인용하더라도 그 인용마저 극단을 넘나들며 거의 무한대에 가깝게 펼쳐진 선택지 가운데 하나라는 자의적 선택이고, 예술의 영역에 던져진 숙명과도 같은 무한의 자의성은 이 비실용적 공동체에서 엄청난 담론을 양산해내는(그러나 그 중 무엇 하나도 제대로 읽히지 않는) 조건이 된다. 이 밑자락 위에 나는 주장의 논거를 세우는 일을 포기한 채 곧장 다원주의의 계시를 받아 이렇게 자의적으로 판단한다. 이 전시에서 내면이나 예술 개념 자체를 넘어서는 세상과의 참조점은 상당 부분 배제했거나, 감춰졌거나, 뭉뚱그려졌다고.

이제 예술계를 서성거리는 사회과학자로서 가설을 세운다. 학기당 700만원의 수업료를 현찰로 내는 작가들은 세상일에 딱히 관심이 없을 수 있다. 학기당 700만원의 수업료를 전부 빚으로 내는 작가들은 세상일에 관심이 많지만, 현찰 지불 작가들과의 사회적 상호작용 과정에서 자신이 괜히 유난스러운 사회운동가로 비칠까 봐 주저할 수 있다. 대학원의 수련 과정 및 커리큘럼이 갖는 독특한 제도적 특성이 이 세상의 특정한 문제들을 미적으로 전환할 필요성을 상기시키지 않았거나 그 필요성의 제기를 온건하게 억제할 수 있다. 특정 사안 및 대상을 언급하게 되면 작가의 해석을 강요할 가능성이 커지고, 그에 따라 졸업 후 작가로서 본격적 커리어도 좁아질 수 있으므로 (적어도 졸업전시에서만큼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최대한 포괄적인 개념적 우산을 쓰는 것이 좋겠다.

그렇다. 이상의 가설은 암암리에 연구자의 편향적 가치관 위에 쓰였으므로 객관적이고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 완전히 반대 극점에 있는 가설도 소환한다. 이 세상의 어떤 구체적 대상 및 사건을 문제시하는 예술이 애초에 필요치 않을 수 있다.


추방된 혐오물질, 추방된 원형: 양은영의 출품작을 중심으로

이제는 뻘소리를 집어치우고 사적 이해관계인의 작품에 대해 논해보기로 하자.

양은영 작가는 혐오물질을 주제로 이번 졸업전시의 학사행정적 평가 기준인 1000호를 가득 채웠다. 다양한 크기의 화면에서 끈적하고 말캉한 비정형의 물질이 마구 뒤엉키고 꿈틀거린다. 그간 주로 물리적 공간을 향하던 작가의 시선이 이번에는 그 공간 안에서 역동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의 내부 구조, 그러니까 공간 속 공간을 향했다. 이 물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이면서 동시에 그 생명체의 삶을 결정하는 내부 구조로서 장기나 혈액, 더 깊게 들어가면 체세포일 수도 있다.

생명체의 외피 너머 비가시적인 내부에 있는 물질은 자기 본연의 위치를 지킬 때 생명활동의 근원으로서 그 순전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그것이 외부로 노출된 상황은 공포와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잠재적으로 숭배와 도착의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혐오물질은 외부로 노출됨으로써 존재의 본질을 상기하고, 그럼으로써 죽음을 가리킨다. 죽음이라는 존재의 필연이 암시될 때 우리는 저항하거나, 숙연해지거나, 망각의 몸부림으로 맞선다. 진정한 의미에서 예술가란 그리고 싶어서 그린다기보다는 죽지 않기 위해 그리는 존재이고, 작품 속 혐오물질은 그러한 몸부림의 흔적이면서 작가-관객 간의 미적 대화에 탑재된 통역 시스템을 무위로 돌리는 공통의 언어다. “작가란 겁에 질려 죽지 않기 위해, 그리고 기호들 속에서 부활하기 위해 은유화 작업을 성공시키는 공포증 환자에 다름 아니다(줄리아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 73p).”

작가는 무지성적 혐오의 대상이 된 황소개구리에서 혐오물질의 원형을 발견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생태계를 파괴하는 외래종의 대표 주자로 낙인찍혀 온갖 모진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황소개구리가 오늘날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당시의 과대평가와 달리 미미한 것으로 정리되는 모양새다. 황소개구리 퇴치 광풍을 타고 인간이 개입해서 효과를 거둔 것인지, 아니면 인간과 무관하게 자연 자체의 근본적 회복력 덕분인지, 그도 아니면 또 다른 외부 생명체의 우연한 유입으로 인해 먹이사슬이 재편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자연과 상호작용 속에서 인류가 반복해온 행태들이다.

첫째, 인간은 자기 필요로 인해 들여온 어떤 존재가 통제를 조금만 벗어나도 곧바로 그 존재에 대해 악마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 권력기관과 언론은 이례적으로 아주 매끄럽게 공조한다.

둘째, 퇴치해야 할 대상으로 지적된 외래종에 대한 시선은 과학적·객관적으로 구성된 사실에 뿌리를 두기보다는 여러 정황의 교차 속에서 일방적으로 선택된 사실들에 뿌리를 둔다. 외래종을 그대로 놔둘 만한 이유와 당장 내쫓아야만 하는 이유가 교차할 때, 후자에 무게를 두기로 선택했다면, 전자의 이유는 체계적으로 묵살된다.

셋째, 외래종을 대하는 방식에는 주체의 안정된 상태에 어떤 식으로든 원치 않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잠재적 불안과 공포가 종합적으로 투영되어 점차 더욱 격렬하고 폭력적인 상태로 증폭된다.

황소개구리 퇴치의 광풍 속에서 우리는 왜 그렇게까지 현상금을 걸고, 요리법을 개발하고, 매스미디어를 총동원해 사냥과 취식을 권장하고,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미소와 황소개구리의 축 늘어진 사체를 병치해야만 했을까. 우루과이라운드와 구제금융을 거치며 전방위적 금융 및 실물 경제의 개방이 가속화되면서 그 반대급부로 증폭된 실존적 불안감이 황소개구리라는 만만한 아이콘으로 향했다는 비약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혐오스러운 외래종이 되어버린 어느 생물 종 차원의 억울함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못생긴 게 죄는 아니니까.

양은영의 혐오물질 연작에서 황소개구리는 점차로 그 원형을 감춘다. 더 많이 뒤틀리고 더 은밀한 은유적 암시로 치환된 최후의 형국에서는 괴물적 양서류의 최초 형상은 찾아볼 수 없고, 그 존재를 감싸는 폭력적 손아귀나 진실을 가리는 구름, 그도 아니면 그저 먼 발치에서 물질을 휘감는 오로라만이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인다. 물질의 두텁고 끈끈한 외형은 상징적 기호가 되어 딱딱하게 굳어져 간다. 꿈틀거리던 운동성을 서서히 잃고 빛바랜 해부학 교재에서 튀어나온 어느 장기나 체세포 확대 도식처럼 선명한 색을 뒤집어쓰고 분절된 영역들의 선명한 대비만을 천연덕스럽게 표명한다. 최초의 모티브가 사라진 그 자리에 이제는 뭐라도 들어설 수 있다. 끈적하고 팔딱거리는 이 물질을 신체 어딘가 품지 않은 유기체란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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