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말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게 더 중요하다.
길다 윌리엄스
고흐나 미켈란젤로에게 작가의 말을 써보라고 시키거나 레지던시 입주작가 선정을 위한 지원서를 써내라고 했다 치자. 결과물은 아마 형편없을 것이다. 고흐는 자기 편지에 끄적거렸던 몇 마디 개똥철학을 재탕해서 제출한 뒤 자괴감에 빠져 술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그딴 쓸데없는 짓을 왜 시키냐고 역정을 내다가 전혀 맥락에도 맞지 않는 소네트를 몇 편 후려갈긴 후 다시 먼지 묻은 정을 움켜쥘 것이다. 라파엘이나 바사리라면 물론 대단한 문서를 내겠지만, 그들은 예외적인 인물이다. 작품은 언어적 사유에서 출발하지만, 그 작품을 다시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새로운 창작 행위다.
지금은 고흐나 미켈란젤로의 시대와 다르다.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작품의 외형에서는 ‘질’을 평가할 근거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니 뭔가를 추가로 써내야 한다. 소통 가능한 텍스트를 생산해내야 한다. 작가의 동기와 의도, 그리고 그 의도를 구현하기 위하여 동원한 방법론, 심지어 앞으로의 비전까지 활자화해야 한다. 작품 자체에는 소통 가능성이 내재해 있지 않다. 그래서 대안으로 소통 가능한 매체를 끌어다가 그 작품에 둘러 세워야 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읽고 그 의도가 제대로 구현되었는지, 작품의 제작배경이 얼마나 진실한지를 평가한다.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가, 당신이 뭔데 나를 평가하는가, 이따위 몇 마디 문장으로 내 심오한 작품의 우주를 표현할 수는 없다’, 등과 같은 항변은 그 자체로 완벽히 합리적인 주장이지만, 미술계라는 더 큰 제도적 세계 안에서는 저 뒷골목 어느 취객의 외마디 절규만도 못한 가치를 지닌다. 기회는 한정되어 있고, 어떻게든 작가와 작품을 선별하려면 균질화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세계 무역의 모든 가치가 공인된 잣대인 달러화로 수치화되듯, 미술계의 모든 소통은 텍스트를 매개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경지를 넘어서기 전까지, 즉, ‘설명이 필요 없는 작가’가 되기 전까지는 설명이 필요하다.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열린 18기 입주작가들의 첫 번째 신고 전시, 「전입신고서」 展은 작가들의 대표작 몇 점을 일단 아무런 맥락 없이 나열하기에 급급했다. 협소한 전시 장소에 14명의 작가를 품으려다 보니 작가 한 명이 벽 한 면도 온전히 점유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입주를 신고하는 첫 전시고, 좁은 공간에서 묘한 경쟁 구도가 펼쳐지는 양상이니 작가들이 아무 작품이나 허투루 걸지는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공들인 작품들이 선별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이렇게 주마간산 식의 배치에서 누군가의 작품 세계를 충분히 음미하기란 쉽지 않다. 톡톡 튀는 재기발랄한 작품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이 기관이 대체로 안정적인 선택을 한 것 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오승언 작가는 도대체 팀 아이텔(Tim Eitel)과 무슨 관계일까만 곰곰이 생각하다 ‘작가와의 대화’ 장소로 이동했다.









입주전에서 충분한 공간을 받지 못한 작가들의 아쉬움을 풀어줄 수 있는 자리가 3일간 펼쳐진 부대행사, ‘작가와의 대화’였다. 대가들의 인터뷰나 녹취록이야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지만, 한참 활동하는 동시대 작가들의 속내를 육성으로 들을 기회는 좀처럼 흔치 않다. 내가 간 날은 마지막 날로, 이은우, 임민수, 임재형, 김민혜 작가가 연단에 앉았다. 객석에 앉은 관객 8명은 대체로 작가의 지인들로 보였고, 작가들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관객이라고는 나와 동행인뿐인 것 같았다.
이은우는 조각과 미디어를 중심으로 하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기법으로 다양한 사회적 쟁점들을 다룬다. 여러 작품에 대해 조곤조곤 자신 있게 설명하던 작가는 시간에 쫓긴다고 느꼈는지 빠르게 스킵하다가 이 작품만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며 한 작품에 머물러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2018년에 독일 마인츠에 설치한 <히키코모리>다.
전시장 안에 비정형의 하얗고 작은 방이 있는데, 이 방은 전시장 건물의 외형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모양이다. 작가는 그 작은 방안에 컴퓨터와 최소한의 생활 기반을 마련해 두고 히키코모리 한 명을 섭외해 거기서 머무르게 했다. 전시 기간에 히키코모리는 그 방 안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만약 있다면, 관객들은 방 외벽에 설치된 키보드를 통해 그와 대화를 시도할 수 있다. 또 외부에 설치된 여러 대의 모니터를 통해 히키코모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염탐할 수 있고, 다른 관객과 히키코모리의 채팅을 엿볼 수도 있다. 만약 히키코모리가 거기 없다면, AI가 대신 답변하거나, 작가가 직접 답변할 수도 있다. 작가는 일상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했던 대화를 현실화하는 하나의 실험을 전시장에 구현해냈고, 예측할 수 없는 우발적 상호작용을 촉발하면서 히키코모리에서 뻗어 나갈 수 있는 담론의 가지들을 쳐나갔다.

[출처] [서칭 포 아티스트 #4] 미술작가 이은우 인터뷰 : 사회적 표준(standard)의 경계에 침투하다|작성자 강원트리엔날레
흥미로운 주제와 접근이니만큼 몇 가지 질문이 나왔다. 히키코모리가 전시장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고용 조건은 무엇인지, 또 어떻게 관객들과 상호작용했는지 궁금하긴 했다. 그래서 나도 질문했다. 아니 문제를 제기했다. 내 문제 제기는 이런 것이었다:
우리는 단편적으로 히키코모리를 말하지만, 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폭넓은 스펙트럼의 히키코모리가 존재할 것이다. 가령, 내가 이건희보다 가난하지만, 나보다 가난한 누군가는 분명 존재하듯이, 히키코모리 중에도 어느 정도 사회생활이 가능한 사람과 그 누군가와도 아예 접촉 자체가 불가능한 중증도 있을 것이다. 작가가 고용한 히키코모리는 방 안에 틀어박혀 있지만, 컴퓨터를 통해 집 안에서 제한된 수준의 경제활동을 하고, 음식을 주문해 먹고, 또 자기 스스로 히키코모리라는 정체성에 대해 긍정하면서 그게 뭐가 문제냐고 반문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의 가장 중증의 히키코모리, 즉 엄청난 상처를 가슴에 안고 그 누구와의 작은 접촉조차도 살을 에는 고통처럼 여기는 그런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지는데, 그 특정한 개인을 히키코모리라고 명명하면서 미학적 맥락에 두는 것이 온당하다고 느끼는가? 작가는 앞선 작품 설명에서 사회적으로 정립된 어떤 확고한 정의를 의문시하는 작업을 전개해 왔다고 했는데, 그 맥락에서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히키코모리가 아닌 것 같은 사람에게 히키코모리라고 명명하는 작업은 작가의 권력, 이른바 명명의 권력을 부당하게 사용한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겠는가?
나의 문제 제기에 대한 답으로, 작가는 자기가 고용한 사람이 경증의 히키코모리라는 점을 인정했고, 그럼에도 자기가 그 사람을 통해 히키코모리의 일반화를 시도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여러 한계는 분명 존재하지만, 작가로서 자신이 촉발해야 한다고 느끼는 어떤 쟁점에 대해서는 뭐라도 시도하는 것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그 말도 맞다.
나는 그 이상 추가로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할 말은 남았다. 물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논쟁거리를 던지는 편이 낫기는 하다. 그러나 동시에 뭐라도 논쟁거리를 던지려거든 섬세하게 접근하는 편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자칭 히키코모리를 전시장 안에 두고 관객과 교감케 함으로써 그 개념의 실존적 무게감을 사회적 담론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개념의 자장이 포섭하고 있는 다양한 삶의 양태들을 아우름으로써 그것을 가능케 한 사회·경제·문화적 조건들을 입체적으로 묵도하게 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그래야 제도적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칭 히키코모리 한 사람과 채팅하고 돌아선 후 ‘아, 나는 이제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라는 헛배부름에 그친다면 더 깊고 어두운 심연에 눈을 돌릴 기회를 오히려 놓쳐 버릴 수도 있다. 나는 이런 문제 제기가 이 작품과 관련해 이전에 얼마든지 제기되었으리라고 보지만, 작가의 답변은 준비된 멘트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게 이상했다.
임민수는 작품 하나를 설명하려고 엄청난 이론과 개념들을 총동원하는 작금의 시류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작가였다. 그에게 일관된 키워드라고는 ‘낚다’ 밖에는 없다. 고요한 물에 던져진 빨간색 찌로 표현되는 그 낚음이라는 행위는 삶의 궁극적 진리를 향한 끝없는 여정과도 같은 것인데, 물론 본인은 그렇게까지 진지하고 심오하게 표현하지 않고, 그저 일상적 언어로 에둘러 표현할 뿐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낚고, 작업할 기회를 낚고, 관객 한 사람을 낚고… 이러한 삶의 작은 성취 하나하나가 작가에게는 낚음의 또 다른 은유다. 그의 수더분한 미학에 구태여 부연할 필요도 없어 보이지만, 그 투박한 언어가 화면에 그대로 스며들어 있어 진실성이 도드라져 보였다. 순백의 화면에 흑연으로 간결하게 그려낸 잔물결, 징검다리, 나뭇가지가 어느 하나 허투루 찍어 바른 것 없이 정확히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느낌이다. 단순한 구성이지만 조형적 감각은 확실히 균형 잡혀 있었고, 오랜 시간 쌓아 올린 상당한 내공이 느껴졌다. 그려진 결과물을 중요시하는 서양 회화의 근간이라면, 그리는 행위를 통한 수양의 과정을 중요시하는 것이 동양 회화의 전통일진대, 임민수의 작품은 그러한 전통의 연장선에 가장 가깝게 위치하는 동시대 작품에 해당한다. 주로 물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영감을 얻는 그가 인근에 이렇다 할 물가가 없는 이 레지던시에서 어떤 화풍의 변화를 일으킬지 궁금해진다.

임재형은 작품에 대해 말하기의 부담으로 말을 시작했지만, 그날 연단에 앉은 그 누구보다 말을 잘하는 작가였다. 세월호 참사,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가족의 죽음 등 사회적이거나 개인적인 굵직한 사건들에서 강한 영감을 받아 판화와 드로잉을 넘나들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색을 거의 쓰지 않으면서, 하나의 주제에 강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마치 꿈에서 본 것 같은 희뿌연 이미지로 관찰과 기억 사이를 오가는 작품들이 특색있었다. 그는 주제별, 매체별로 체계적으로 정리된 흐름에 기반해 알기 쉽게 설명했고, 말미에 직접 기획한 아트북도 보여주면서 작품을 매개로 한 소통을 앞으로도 이어갈 것을 시사했다. 그의 세련된 진행은 앞선 임민수 작가의 시간과 전혀 다른 결에 놓였는데, 그로 인해 임민수 작가의 투박한 진실성이 되려 더 도드라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민혜는 독일에서 자신이 전개해 왔던 조각적 실험과 설치 작업을 중심으로 설명했다. 화면에 띄워 놓은 도판들을 통해 겉핥기식으로 본 작품들이지만, 그다지 새로운 시도들이라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작가의 내면에서 빚어 나온 물질들이 왜 그런 모양이고, 왜 거기에 놓여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작품 하나를 빚어내는 것도 어려운데, 거기에 그럴싸한 설명까지 요구하니 오늘날 작가로서 산다는 건 정말이지 시험의 연속이다. 어쩌겠는가, 정책기관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뒷골목에 붙은 구멍가게 같은 갤러리에도 내 작품 한 번 봐달라고 줄 선 작가가 수백수천인 것을!
말주변이 없는 작가를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작품이 작가 본인의 살풀이에서 그치지 않고 세상에 나가 뭐라도 역할을 하게 하려면, 최소한의 소통 가능성은 필요하다. 꼭 언어의 형식을 띠지는 않아도 좋으나 관객이 보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공감의 통로 하나 정도는 열어 둬야 한다는 말이다. 일말의 소통 가능성조차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고생해서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꾸역꾸역 전시장에 작품을 들고나올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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